#082. 폭풍전야 (3)
“그 험한 용병들을 한 번에 휘어잡으시다니 대단합니다. 총을 사용한 것이 조금 과격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모두가 에반 님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수긍했으니까요.”
용병들의 신상 명세가 적힌 서류를 빠른 속도로 넘기는 나를 보며 루이스가 말했다.
“숫자가 수백이다. 불만이 있지만 분위기 때문에 나서지 못한 녀석들이 아직 존재할 거다. 모두 중간에 추려내도록 하지.”
“어쨌든 에반 님 덕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처음엔 블루서펜트를 상대로 한 전쟁이 가당키나 싶었는데 이젠 정말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지금 정말 서류를 읽고 계신 것이 맞습니까? 그냥 윗줄만 보고 넘기시는 것 같습니다만.”
“할 말이 끝났다면 나가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아, 옛! 죄송합니다!”
루이스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내 방을 나갔다.
나는 용병들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서류 넘기는 속도를 높였다.
나 혼자 수백에 달하는 인원 각자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적절한 숫자로 분대를 나누고 말단과 중간 관리자들을 두어야 했다.
‘이미 분대가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편제가 아쉬운 부분이 많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인원 편제를 뜯어고치는 작업이었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운영하는 것이 전쟁의 기본이었으므로.
그렇게 2시간 정도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루이스가 다시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지시하신 대로 용병들은 원래 구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47번 구역 내의 숙박 시설에 보내 대기하고 있도록 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시간을 두어 이동을 마쳤고, 최대한 분산해 배치했습니다.”
“고생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추려 놓았던 서류를 루이스에게 건넸다.
“저녁에 다시 돌아오지. 그때 이 마흔네 명을 소집해 놓아라.”
“예? 또 어디를 가시는…. 일단 알겠습니다. 이 뒤쪽은 분대를 나누신 겁니까?”
“용병들이 머무는 곳을 지금 당장 분대별로 바꿀 필요는 없다.”
서류를 넘기는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기존에 이미 분대가 나누어져 있긴 합니다만, 확실히 이쪽이 훨씬 인원들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허,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럼 이 마흔네 명이 새로운 분대장이 되겠군요. 돌아오시는 시간에 맞춰 소집해 놓겠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다시 1시간 정도를 달려 45번 구역의 정보 길드에 도착했다.
사고 위장을 위해 곳곳에 폭발을 일으켰으나 며칠 내에 금세 복구를 마쳐 다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의뢰하고 싶은 정보가 있으십니까?”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직원 중 하나가 임시 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방문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투였다.
「정보 길드의 지부장이 다른 의뢰인과 결탁해 또 다른 의뢰인을 암살하려 했다. 이 일이 상부에 알려지면 상황이 재미있어지겠군.」
「너희 손으로 지부장을 직접 죽여라.」
자신의 켕긴 구석을 잡고 있는 이이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번엔 정보를 받으러 온 게 아니다. 역으로 정보를 주기 위해 왔다.”
“예?”
정보 길드의 정보원은 대륙 곳곳에 다양한 신분으로 퍼져 있다.
정보는 얻는 게 가능하다면 반대로 퍼트리는 것도 가능하단 얘기다.
“소문을 퍼트리란 말씀입니까?”
“불가능한가?”
“다른 구역과 협업을 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만…. 저희 구역에선 받아본 적 없는 형식의 의뢰라 조금 당황스럽긴 합니다.”
“퍼트리길 원하는 소문은 세 가지다.”
40번대 구역 일대.
“퍼틸랜드가 전쟁을 일으킨 목적 중 하나는 파르테르의 비밀 금고다.”
라이카의 아지트가 있는 33번 구역.
“22번 구역의 거래소에 토지의 질에 관계없이 싹을 틔우는 ‘생명의 씨앗’이 매물로 올랐다.”
그리고 치안국의 주 담당구역 중 가장 바깥인 20번대 구역 일대.
“41번 구역에 바마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20번대 구역에 불법 무기의 밀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은 임시 지부장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정보원 한둘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갈 겁니다. 저희 지부 쪽의 이윤은 최소화한다고 해도 다른 지부의 이윤은 저희 멋대로 건드릴 수 없으니까요. 저희는 당연히 에반 님이 말씀하신 조건을 다 맞춰 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추산 비용이 얼마나 될지 몰라….”
말을 빙빙 돌리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막대한 비용을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는가.
“이 정도면 증명이 되겠지.”
이그니스의 VIP를 꺼내 보인 순간 임시 지부장이 숨을 들이 삼켰다.
“충분합니다. 기분이 상하셨을 수 있는 데도 저희 입장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던 상관 없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하나다. 거리의 어린아이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소문이 구역 전체를 뒤덮도록 만들 것.”
“알겠습니다. 바로 다른 지부에 연락을 취해 견적을 잡겠습니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의뢰라면 다른 지부도 하던 일을 제치고 나설 겁니다. 통신 코드를 남겨 주시면 내일 오전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47번 구역 용병 사무실의 통신 코드를 남기고 정보 길드를 나섰다.
거리의 상점을 돌며 앞으로 필요할 물자들을 구매해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시간을 계산해 통신소로가 클랙필드에 있는 프로이드의 집으로 통신을 걸었다.
「앗, 아저씨.」
홀로그램에 나타난 것은 레니였다.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켜는 줄을 몰라서 버튼을 막 눌러 봤어요, 헤헤. 오랜만이에요.」
프로이드에게는 추가로 돈을 주어 집에 통신기기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었다.
나 외엔 통신 코드를 아는 이가 없으니 아마 이번이 기기의 첫 사용일 터였다.
「잘 지내셨어요? 조금 피곤해 보여요.」
“괜찮다. 지금쯤 손님이 도착했을 것 같은데.”
「아, 맞아요. 에스텔 언니가 아저씨 한 분을 데리고 오셨어요. 아빠가 진료를 보고 있는데 아마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기다리지.”
그 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레니는 어색했는지 이것저것 말을 붙이려 했다.
「다음에 오시면 직접 요리해드릴게요. 다치신 곳이 있으면 제가 봐 드리고요. 아빠가 환자를 볼 때 종종 보조로 들어가거든요. 이해가 빠르다고 칭찬도 많이 받아요.」
“좋은 일이구나.”
내 칭찬에 레니는 얼굴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레니와 같은 어린아이들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인은 슬럼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여러 이유로 목숨을 잃어 영원히 그 나이에서 멈춘 형, 누나, 친구, 동생들이 적지 않았다.
「안 다치셨으면 좋겠는데, 그건 힘들겠죠? 아빠는 물어봐도 알려 주시지 않지만, 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어요. 아저씨가 굉장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요.」
개중엔 레니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얼마 뒤면 제 생일이거든요. 뭔가 큰 선물 같은 걸 바라거나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아저씨가 다치지 않고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겠다. 약속하지.”
「정말요?」
쑥스럽다는 듯 몸을 꼬았던 레니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곧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료가 끝났나 봐요! 모셔 올게요!」
레니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곧 에스텔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진료는 끝났나?”
「얼추요. 안쪽에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있어요. 워낙 단련이 잘 되어있던 몸이라 크게 이상은 없다고 해요. 앞으로 식사만 잘 챙겨 먹으면 금방 회복할 거라고요.」
“잘된 일이군.”
「예상했잖아요? 부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혹시 몰라 여기로 보낸 거지.」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진료가 끝나는 대로 와야 할 47번 구역의 사무실 주소를 알려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용병들의 지휘를 맡게 될 거다.”
「지휘라니…. 전 누구를 부려 본 경험이 없는데 저한테 그런 큰 임무를 맡겨도 괜찮아요?」
“어차피 큰 틀에선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알았어요.」
그때 그녀의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며 화면에 나타난 이가 바뀌었다.
「카인 님. 투기장에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점 사죄드립니다. 이렇게 다시 얼굴을 뵙게 되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카인 님이 다른 간부들의 함정에 빠질 때 저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대체 왜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나는 그가 잠시 감정을 해소할 시간을 준 뒤 말했다.
“지나간 일은 떠올려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진료는 잘 받았나?”
「예. 아무 이상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바로 전투에 참여해야 할 것 같다.”
「바라던 바입니다. 가장 가까운 목표는 파르테르의 제거라고 들었습니다. 카인 님의 검이 되어 앞장서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지.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통신을 종료하고 다시 차에 올라타 47번 구역으로 향했다.
투두두-!
거리 곳곳에선 심심찮게 총성이 들려왔다.
두 조직 사이에 벌어지는 시가전.
숫자는 대개 퍼틸랜드 측이 우세했으나 마나유저의 수와 전투원 개개인의 기량 차이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패배가 어느 쪽에 돌아갈지는 분명하군.’
47번 구역에 도착했을 때 해는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마흔네 명의 용병들을 따로 소집해 두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곧바로 강당으로 향했다.
마흔네 쌍의 눈동자가 내게 모였다.
첫 만남에서 내가 보여 준 모습 때문인지 오전보다는 공손해진 분위기였다.
“눈이 많을 때는 나서기 부담스러웠을 수 있겠지. 아직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면 도전해도 좋다.”
앞쪽에 선 거대한 체격의 용병이 손을 들고 나섰다.
“난 오전에 덤빈 놈들이 멍청했다고 생각해.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는 마법사를 전에 본 적이 있어. 마법사들은 몸이 허약하기 마련이라 신체를 강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고. 강화를 유지하는 데도 시간제한이 있고 말이야.”
녀석은 쉽사리 덤벼들지 않았다.
“난 다 알고 있다고. 강화마법은 겉으론 티가 나지 않아. 하지만 공격을 보고 마법을 사용하면 너무 늦지. 분명 지금도 걸어 둔 상태일 거라고. 내 말이 틀려?”
그 상태로 몇 분의 시간이 지났다.
녀석은 자신의 경험에 반추해 내 마나가 다 떨어졌을 만한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나만큼 경험 많은 놈은 만난 게 실수라고!”
녀석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강화마법은 사용에 시간이 걸리기에 미리 걸어 두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다.
다만 나의 경우 시전 속도의 빠르기가 통상의 수 배는 되기에 매 순간 마법을 해제하고 필요한 순간마다 마법을 다시 사용해 마나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마나는 미량도 소모되지 않았으며 회로 내에서 정제가 완료된 마나가 강화마법으로 변환될 준비를 마친 상태라는 말이었다.
턱.
녀석의 주먹은 내 손아귀에 가로막혔다.
주먹은 계속해 앞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압도적인 손의 크기 차이에도 불구하고 점점 밀리는 것은 녀석이었다.
“마법사가 허약하다고.”
우득.
녀석의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누가 그러던가.”
나는 녀석의 손을 놓고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녀석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쏘, 쏘지 마! 살려 줘! 내가 생각을 잘못…!”
탕!
총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시체가 치워졌다.
“날 상대로 마법사의 특성을 더 시험해 보고 싶은 녀석이 있다면 나와도 좋다.”
일부러 시간을 두어 오전과 같은 상황을 연출한 것은 의도한 바였다.
어떤 감정에 대한 각인은 대개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 이루어지니까.
나는 더 나서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너희들이 따로 소집된 이유는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나름 용병으로 오래 활동했고 실력 또한 인정받은 이들이지. 너희에겐 10명에서 12명 단위로 구성된 분대의 장을 맡길 생각이다. 그에 따른 추가 보수 역시 지급하겠다.”
전투 시 통제를 따르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게도 분대원이 아니라 분대장이다.
“추가 보수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머릿속엔 그 감정을 더 깊이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저기 굴러먹던 이들이라면 파르테르의 비밀 금고쯤은 들어본 적 있겠지. 금고에서 노획한 금액 중 일정 비율을 약속하겠다.”
공포, 그리고 보상.
두 요소에 기반한 복종심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