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구출, 혹은 구원 (2)
나는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앞쪽에 나타난 공간은 마수들을 가둔 우리가 있는 특별 관리실이었다.
통로 끝 출입문 위에 감시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조명은 쨍한 하얀색이 아니라 은은한 주홍색이었다.
쿠오─.
마수들의 숨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성인 여성 체구 정도로 작은 녀석에서부터 트럭 몇 대를 합친 것 같은 크기의 녀석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이 녀석들이 한 번에 깨어난다면.’
썩 상상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마수들의 종류와 마릿수를 머릿속에 담고 다시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팟.
불이 꺼지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시에 경로에 닿는 모든 우리의 철창에 부식마법을 각인했다.
시간이 조금 남았을 때 카메라 바로 아래 사각지대에 도착했다.
옆쪽 구석에 몸을 숨긴 후에 내가 들어왔던 지점으로 바람을 쏘아 보내 터트렸다.
탕!
총성과 같은 소리가 났고 마수들이 몸을 뒤척였다.
잠에서 깬 몇몇 녀석들이 불편한 울음소리를 냈고 곧 문밖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곧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본래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모든 문은 카드 키로 작동하나 4층과 5층은 달랐다.
재래식 잠금장치를 사용하는 두꺼운 철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설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투기장은 이곳 한 곳이 아니니 줄일 수 있는 부분에선 줄일 필요가 있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마수들이 잠꼬대라도 했나 보지. 봐. 저기 깬 녀석들이 있잖아. 그보다 조명이 불안정해. 최근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잖아.”
“한 번 마나탱크를 보수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윗분들이 쓸데없이 돈 나가는 일을 퍽이나? 가끔 불 나가는 정도로?”
문 바로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 중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타이밍을 맞춰 그들 곁에 스쳐 복도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숨을 멈추고.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움직임마다 일렁이는 공기를 마법으로 옥죄어 통제하며.
팟.
내가 복도를 지나 다시 벽 뒤에 몸을 숨겼을 때 불이 켜졌다.
“방금 뭔가…. 기분 탓인가?”
“왜?”
“뭐가 지나간 것 같아서.”
“지나가긴 뭐가.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딸깍.
‘이걸로 세 번째.’
라이티노는 시도해 본 적은 없으나 자신의 계산상 연속으로 버튼을 누르는 것은 10번 정도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마공학의 대가인 만큼 그의 계산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여덟 번 정도 내로는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미로 같이 꼬인 복도를 돌고, 경비가 지날 땐 멈춰서고, 불이 켜진 뒤엔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아 이동했다.
딸깍.
‘네 번.’
“오늘은 좀 심한데?”
“위층에 올라가 봐야 하나.”
지하 4층과 5층은 수감실과 마수관리실 외엔 별다른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래지 않아 나는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덜걱.
카펫을 들추고 그 아래 깔린 바닥의 타일을 절단해 들어 올렸다.
나타난 빈 곳으로 몸을 집어넣은 뒤 손을 위로 뻗어 카펫과 타일을 원상복구 했다.
“…….”
지하 4층 바닥과 5층 천장 사이의 공간이었다.
마나탱크의 전송관이 빽빽하게 얽혀 있어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확실히 이 부분은 비어 있군. 라이티노의 말대로.’
더 이상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바로 아래가 목표했던 지점이니까.
지직!
바람을 일으켜 다시 한번 바닥을 도려냈다.
작은 구멍 사이로 수감실 바닥이 보였다.
경비가 없는 걸 확인한 후 구멍 주위를 더 도려내 크기를 키웠다.
탁.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곳 역시 조명은 어둑했다.
좁은 통로 양옆으로 철문이 쭉 뻗어있었다.
위쪽에 난 직사각형 모양의 눈구멍을 열어 하나씩 안쪽을 살폈다.
곧 목표했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또 그 제안을 하러 왔나.”
밀시안은 깨어 있었다.
팔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벽에 기대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내가 눈구멍을 닫지 않자 먼저 입을 열었다.
“몇 번을 찾아와도 내 답은 똑같다. 카인 님을 배신하고 파르테르 밑으로 들어오라니, 내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면 언젠가 수락할 거란 얄팍한 생각이겠지.”
“…….”
스카웃 제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문득 그의 마음을 더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배신이라. 네가 모시던 카인이 이미 보스를 배신했지 않나? 심복이라면 카인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이미 한 번 배신을 해 봤으니 두 번은 쉬울 텐데.”
밀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벅저벅 문 앞으로 다가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네 입을 찢어버렸을 테니까.”
시릴 정도로 스산한 음성이었다.
하나 그가 내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마나 유저의 진가는 마나를 담아낼 도구가 있을 때 발휘된다.
가령 검이나 도와 같은 날붙이나, 수인의 경우 높은 강도를 자랑하는 손발톱이 그 예가 된다.
특수한 수련을 쌓은 권사나 경지를 초월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무기가 없을 때 전투력이 크게 경감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도 육체 자체가 강화되니 일반인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전투력을 유지하겠지만.’
거기에 밀시안의 수갑은 다른 투사들의 것과 모양이 조금 달랐다.
착용자의 마나 운용을 제한하는 마법 도구였다.
제르비아의 아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모델.
경찰청에 납품되는 라티움의 물건으로 기능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현시대의 기술력 상, 밀시안 정도의 강자에겐 절반 정도의 제약밖에 가할 수 없었다.
“다시는 그 더러운 입으로 카인 님을 욕보이지 마. 너희들 따위와는 품은 이상 자체가 다르신 분이다.”
“그 생각 변치 않기를 바라지.”
탁.
눈구멍을 닫자 통로에 곧 적막이 찾아 왔다.
품에서 마정석을 꺼내 씹었다.
몸을 돌려 모든 문에 부식 마법을 각인하며 떨어졌던 천장 아래로 향했다.
‘당장 구출할 수는 없다.’
한 명과 두 명은 엄연히 다르다.
위층으로 빠져나가는 중 발각될 수밖에 없고 몰려온 적들에게 포위당하는 순간 끝장이다.
나는 왔던 길을 거슬러 올랐다.
지나는 모든 경로에 또 다른 안배를 위한 마법을 새겼다.
내려올 때와 같은 횟수 리모컨을 더 사용했고, 경비가 교대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수관리실에 다시 진입했다.
천장과 바닥에 마법을 새기며 나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무사히 방으로 돌아와 안도하는 에스텔의 모습을 보았다.
* * *
오전은 투기장에 머무르며 분위기를 살폈다.
“간밤에 일어났던 정전은 해프닝 정도로 여겨진 걸까요. 직원들 행동이 달라진 게 없네요.”
간밤 일어난 정전으로 시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며, 원인을 파악 중이란 방송이 나왔을 뿐이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그 횟수가 더 잦았으니 분명 보고는 올라갔을 거다.”
물론 그 보고를 받고 대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곳곳의 교전과 시설 관리로 파르테르가 받을 보고는 한둘이 아닐 테니까.
‘만일 조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계산상 빨라야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한다.’
그때면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른 오후까지 휴식을 취하다 투기장을 나서 통신소로 향했다.
「23번 거리 12-1, 29번 거리 1-5, 34번 거리 23-3. 네가 조사를 명령했던 정보다. 요즘 수입이 괜찮은지 파르테르가 사무실을 계속 늘리고 있더군.」
“수고했다.”
정보를 넘겨받고 통신을 종료하려 할 때 바마가 나를 멈춰 세웠다.
「잠깐.」
“할 말이 더 남았나?”
「…네가 말했던 21번 구역의 도서관에 가 보았다. 지하 서고에 있는 모든 기둥을 샅샅이 살폈지. 그리고 돌조각으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레이나, 미래의 대마법사를 꿈꾸며 이곳에 흔적을 남기다.’라고 쓰여 있더군.」
“…….”
「그곳에 그런 글귀가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내 여동생을 찾은 건가? 대체 언제부터…!」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다음 단서를 주지.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가차 없이 통신을 끊었다.
그다음으로 벨포트에게 통신을 걸었다.
대기하고 있던 듯 곧바로 연결이 되었다.
「언제 연락이 오실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내부의 반대가 그리 세지 않아 예상보다 일찍 병력을 소집하고 지휘권을 인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든 제가 말씀드리는 주소로 가시면….」
47번 구역의 중심가 건물.
나는 그가 부르는 주소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40번대 구역의 모든 농토를 퍼틸랜드가 소유할 수 있게 해주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밖에 저희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통신소를 나서 중고차 매장으로 향했다.
“찾으시는 차종이 있으십니까?”
“굴러가기만 하면 상관이 없다. 최대한 내구성이 좋은 것들로.”
차 몇 대를 구매해 심부름꾼들을 시켜 구역 곳곳 내가 생각해 둔 위치에 주차했다.
근처의 총포상에서 탄약을 보충한 뒤 구매한 차 중 한 대를 직접 운전하여 목적지로 출발했다.
블루서펜트의 사무실.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랐다.
가면을 쓰고 중간에 보이는 감시카메라는 모두 총으로 쏘아 깨트렸다.
“침입…!”
탕!
나타나는 적을 거침없이 쏘아 넘기며 사무실이 있는 층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저쪽이다!”
거리에 있던 적이 지원을 온 타이밍에 맞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미리 준비해 둔 차가 있었다.
사뿐히 지상에 발을 딛고, 기존의 차를 버리고 새 차에 탑승해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건물에서도 내 행동은 같았다.
더 이상 교전이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았다.
적진으로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적을 쓰러트리고 그때마다 차를 갈아타 이동했다.
경기가 열리는 오늘 밤까지 멍하니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남는 시간 모두 적의 수를 줄이는 데 사용한다.’
정체를 숨겨야 할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행동은 더욱 거침이 없었다.
외곽에서 시작된 사냥은 구역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이루어졌다.
목적한 사무실은 물론 중간중간 거리에 보이는 적 역시 모두 사냥감이었다.
투기장이 존재하는 도심에 도착했을 때 해는 주홍빛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탕!
투기장 근처 건물의 마지막 적을 쏘아 쓰러트리고 계속해 복도를 지났다.
피가 묻은 외투와 가면을 벗어 던짐과 동시 불꽃을 일으켰다.
화륵.
외투와 가면은 재가 되어 등 뒤로 흩날렸다.
품에서 투기장에서 사용하던 다른 가면을 꺼내 얼굴에 착용했다.
‘갈아입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군.’
안에 입고 있던 정장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바람을 세게 일으켜 단시간에 몸을 말리고 머리를 정돈했다.
건물 출구를 빠져나와 고급 세단에 탑승해 그대로 투기장으로 향했다.
“다시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에스텔에게 물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나?”
“네. 직원들 움직임은 어제와 완전히 같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에 지장은 없었다.
이제 남은 일은 마나를 회복하며 밤에 있을 경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 * *
“자네가 기획한 이벤트, 기대하고 있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이티노는 파티 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유리 벽 너머를 응시했다.
「오늘의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진행과 함께 두 명의 투사가 경기장에 등장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배팅 된 금액은 치솟았으며, 홀의 분위기는 열띠어 갔다.
“방금 뭔가 울리는 소리 못 들었어요?”
“글쎄요. 저는 느끼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시작되었군.’
시간에 맞추어 발동한 부식 마법은 천천히 우리와 철문을 녹여 제 역할을 다 했을 것이다.
나는 리모컨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마음속으로 초를 셌다.
“봐요. 지금 분명 바닥에 진동이….”
진동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느낀 순간 버튼을 눌렀다.
딸깍.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마수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쿠오오오-!
그리고 이어지는 투사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등골을 쭈뼛 서게 만들기 충분했다.
영원 같은 어둠이 끝나고 시야가 빛을 찾았다.
팟.
투사들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나부라져 있었다.
경기장에는 마수들이 잔뜩 흥분한 움직임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몸으로 유리 벽을 들이받고 발톱으로 쉼 없이 긁어 댔다.
“꺄아악!”
유리 벽 가까이 붙어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겨, 경비를 불러! 어서!”
사람들은 유리 벽에서 떨어졌다.
움직임이 빠른 이들은 문을 열고 홀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방송이 나왔다.
「개폐 장치에 이상이 생겨 원인을 파악 중입니다. 관람석과 경기장 사이는 완벽히 차단되어 있으니 안심하셔도 되오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상으로 이동하여 사태가 소요될 때까지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안전하다면 대피시킬 필요가 없다.
또다시 마나의 공급이 끊기고 유리 벽이 깨질까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전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싫겠지.’
문을 열고 나가던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멈춰 섰다.
“그래요. 지금 저 녀석들이 유리에 몸을 부딪쳐대고 있는데 꿈쩍도 안 하지 않습니까?”
한 중년 남성이 유리 벽에 다가섰다.
이내 안전한 걸 확인하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로 말했다.
“클럽 측에서 준비한 이벤트 같기라도 하군요. 마수를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말과는 달리 그의 몸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상류층 특유의 허세였다.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기 이 두 신사분도 꽤 강심장인 것 같군요. 마치 저처럼!”
그는 미동 없이 좌석에 앉아 있는 나와 라이티노를 보며 말했다.
“강심장이긴 하네. 나이가 들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니 말이야.”
라이티노는 그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장에는 어느새 진입한 경비인력이 마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투기장 내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인원이라 봐도 될 정도로 많은 수.
곧 출입구로 수갑을 찬 투사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경기장은 완전한 아수라장이 되었다.
“…….”
스피커를 꺼 놓았는지 경기장 내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다.’
나는 중년 남성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들을 의식한 게 명백한 동작으로 유리 너머 마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크어엉-!
“고객님! 벽에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홀에 도착한 경비가 소리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이 무너지지 않는 걸 확인한 다른 이들도 중년 남성을 따라 가까이 다가와 마수를 관찰하고 있었다.
“…….”
순간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분명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부득부득 남아 죽음을 재촉하는 꼴이.
‘자신이 죽는 상황을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겠지. 평생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을 테니.’
죽음에 대한 둔감함.
어쩌면 그들에게 죽음은 피부에 맞닿은 ‘현실’이 아닌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서만 들은 ‘이론’에 가깝지 않을까.
딸깍.
버튼을 눌렀다.
아주 잠시였다.
찰나의 순간 총을 쏘았고 벽은 무너져 내렸다.
버튼에서 손가락을 뗀 순간 빛이 돌아오고, 홀 내부로 달려드는 마수가 보였다.
탕!
바람을 일으켜 벽 근처에 있던 관람객들을 모두 뒤로 날려버리는 동시, 다시 한번 총을 쏘았다.
마수는 그대로 미간이 꿰뚫려 쓰러졌다.
“…….”
뒤를 돌아보자 바지에 소변을 지린 중년 남성이 보였다.
이 정도로 참아야 했다.
사람이 죽으면, 정확히는 고위 인사가 죽으면 구역 경찰이 사건을 무마할 수 없고 치안국의 조사가 들어오게 된다.
‘경비들이 도착했으니 최소한 누군가 죽는 일은 없겠지. 약간의 부상을 입을 수 있을지언정.’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에스텔에겐 투기장 곳곳을 돌며 관람객들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려둔 상태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경기장을 보았다.
출입구에서 회색 머리의 사내가 피 묻은 검 한 자루를 쥔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무너진 유리 벽을 넘어 경기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홀에 있는 경비들은 사람들을 추스르느라 내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C조 인원 절반은 모두 경기장으로 올라와! 지원이 더 필요하다!”
카아악─!
경기장 내부의 경비들 역시 죄수와 마수 사이에서 전투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색 머리의 사내는 경기장 중앙으로 오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내 바로 앞에 다가와 떨리는 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영원한 제 주군. 카인 님을 뵙습니다.”
그의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가면을 벗고 진짜 얼굴을 드러낸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