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73화 (73/227)

#073. 헥사메디컬 (3)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벨포트가 되물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것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잭 역시 들어 올리던 술잔을 멈추고 동그래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헥사메디컬. 요즘 한창 주가가 폭등하고 있더군. 지금이라도 주식을 매수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발뺌할 생각인가? 나에 대해 조사를 했겠지. 나 역시 그쪽에 대해 조사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쨍한 조명 아래 답답할 정도의 속도로 먼지가 유영했다.

“회사의 조직도까지 읊어 줘야 믿을 텐가?”

“…아닙니다. 저희 쪽 보안이 허술한 편은 절대 아닌데 말입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니, 이것도 쓸데없는 질문이겠군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적어도 그쪽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많이.”

“곤란하군요. 소문이 퍼지면 땅을 팔지 않고 버티는 이들이 있어 비밀리에 토지를 매입하고 있었는데요. 마병의 치료제라는 게 그만큼 파급력 있는 가십거리이지 않습니까?”

그는 내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자신이 속한 기업의 보안 체계를 되짚어 보고, 여러 경우의 수를 검토하며, 머리를 팽팽히 회전시키면서.

‘그래 보았자 이를 수 있는 결론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거나.

보안상의 실수로 정보가 누출되었다거나.

단순히 내가 소문과 정보를 조합해 자기 집단의 정체를 맞추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상 실험의 결과가 거짓임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까진 결코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입막음을 위해 제거되었으며 관련 자료는 모두 폐기되고 오로지 조작된 자료만이 세상에 발표되었으니까.

“그럴 만하지. 마병의 치료제 개발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 나도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땐 정말 놀랐다고.”

“예. 앞으로 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사라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땅 문제겠지. 그것 때문에 블루서펜트와 싸우고 있는 걸 테니까.”

“맞습니다. 수도나 10번대, 20번대 구역의 땅이 가장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모두 황실 고위 관리 같은 높으신 분들의 소유라 저희 입장에선 매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군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토지 가격도 가격이고 말입니다. 아무리 저희가 투자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자금이 무한정 한 것은 아니니까요.”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40번대 구역인가?”

“그렇습니다. 더 안쪽 구역의 땅만은 못하지만, 약재를 재배할 정도는 충분히 되더군요. 문제라면 농지로 쓸 만한 땅은 이미 다 주인이 있습니다. 거액을 제시했지만 팔 생각도 하지 않고요.”

40번대 구역의 농토는 대부분 블루서펜트의 소유이다.

제시된 금액의 문제 이전에, 마약 농장은 중요한 기반 시설이니 거래를 수락할 리가 없다.

“에반 님. 저희는 좋은 일을 하려는 겁니다. 원인 불명의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 말입니다.”

“…….”

사기꾼의 입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사실이 순간 신경을 거슬렸다.

“블루서펜트에서도 곧 추적이 붙을 겁니다. 이미 실력이 출중하시지만,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더 안전하게 위기를 넘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위해서.

단호히 거절하는 것은 이쯤으로 하고, 슬슬 여지를 줄 타이밍이었다.

“선행이니 악행이니 하는 건 이 세계에서 선택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지. 하지만 뒤의 이야기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군.”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습니다. 에반 님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블루서펜트의 조직원들은 모두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추적이 붙어 다수를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연봉은 되었고 계약금을 올려 받고 싶은데. 사천만 실링으로.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그 정도는 이 자리에서 즉답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의사 결정권이 꽤 높은 자리에 있어서 말입니다, 하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악수를 청했다.

“계약하시게 된다면 이전에 소속되어 계시던 곳이나 출신 성분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의심 같은 게 아니라 동업자로서 최소한의 신원 보장을….”

“조건을 하나 더 걸지.”

내가 이번에도 악수를 받지 않자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시죠. 웬만한 조건은 다 맞춰 드리겠습니다.”

“용병들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고 싶다.”

“지휘권 말입니까? 당연히 에반 님에게 어느 정도의 직급은 드릴 예정입니다. 못해도 스무 명은 휘하에 두실 수 있을 겁니다.”

“부족하군.”

“다섯 명 정도의 인원은 제 재량으로 추가로 넣어 드리죠.”

“아니. 46, 47, 48번 이 세 구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용병에 대한 지휘권을 원한다.”

“예?”

“제대로 들었을 텐데. 말귀가 조금 어두운 편인가?”

“…그건 조금, 아니, 많이 무리한 요구입니다. 저희도 체계와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협상은 여기서 결렬이다.”

탁!

그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한 구역당 포진해 있는 저희 조직원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못해도 세 자릿수는 될 겁니다.”

알고 있다.

오히려 잘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다.

“흡수한 하위 조직을 포함하면 그 이상이죠. 그런데 지휘권을, 그것도 세 구역의 지휘권을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가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이유는 파르테르가 참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의 수를 줄여나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무한정 전투를 늘릴 수는 없다.

전쟁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파르테르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직접 싸움에 뛰어들 것이다.

‘전장의 기울기를 무너트리는 것은 그 바로 직전의 타이밍.’

녀석이 예상하지 못할 시점에 공세를 전환할 생각이었다.

모든 힘을 일시에 쏟아, 미처 대응할 틈도 가지지 못하도록.

그러기 위해선 병력이 필요했다.

나와 에스텔만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그만큼 위험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다시 말하지. 46, 47, 48번의 세 구역. 지휘권을 넘긴다면 그쪽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겠다.”

“저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 오갔다.

그가 어떤 타협안을 제시하든 나는 칼같이 거절했다.

원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지휘권을 넘겨받지 않느니만 못했다.

계획을 위해서는 세 구역에 존재하는 모든 인원이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시는군요.”

벨포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잭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할 이야기는 피차 더 남지 않은 것 같군.”

방안에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보 길드에 연락을 넣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도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조율할 의사가 있으신 거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집불통으로 나오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때였다.

내가 줄곧 느끼고 있던 미세한 기척들이 일제히 움직인 것은.

쨍!

술 진열장이 넘어지며 그 뒤에 숨어 있던 인원이 뛰쳐나왔다.

콰직!

천장이 무너지며 그 위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검 끝은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모두 예상하고 있던 움직임이었다.

우웅.

4단계의 정제를 마치고 몸 주위를 돌고 있던 원소는 내 의지에 감응해 현상으로 화했다.

냉기였다.

닿는 것만으로 대상을 영원히 얼려버릴 것 같은 냉기.

쩌적.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며 허공에 자그마한 얼음 결정이 생겨났다.

탕!

결정을 싣고, 냉기는 총성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방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깨어진 병 조각과 함께 허공에 엎질러지던 술도.

표독스러운 얼굴로 검을 내리쳐 오던 적들도.

부서져 비산하는 진열장과 천장의 파편들도.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지정 범위에서 벗어난 벨포트와 잭만을 제외하고.

쾅!

다음 순간 에스텔이 문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순식간의 벨포트의 양팔을 뒤로 꺾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그의 목에 단검을 꺼내 겨눴다.

“움직이지 말아요. 몸에 든 자기 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으면.”

모든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채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잭. 너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소중한 의뢰인 목이 달아나면 많이 곤란하지 않겠나?”

잭은 이미 검을 꺼내 쥔 채였다.

다만 사로잡힌 벨포트와 방 안의 상황을 보고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느라 붉어진 얼굴로 벨포트가 말했다.

추위로 입술을 덜덜 떨며,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라. 무엇이 말인가? 사전준비 없이 마법을 쓴 것? 기습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

내 워커가 그의 얼굴 앞에 멈춰 섰다.

“부, 분명 화염 계열의 마법사라 들었는데!”

“폭발에 휘말릴까 이런 좁은 방에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그건 그렇다 쳐도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아니. 말이 된다. 네 눈앞에서 직접 일어난 일이니까. 세상일이 꼭 자신의 상식선 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지.”

그때 직원 몇이 들어왔다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 멈춰 섰다.

그 이상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바깥에 있었어야 할 이들은 지금 모두 얼음 동상이 된 상태기에.

나는 행동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잭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의뢰 몇 개를 중단하니 더 두고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더 이상 뽑아먹을 구석이 없으니 팔아넘겨도 되겠다고.”

“다, 다가오지 마.”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녀석이 테이블과 의자에 몸을 부딪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왜 응접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을까 생각했지. 45번 구역의 정보 길드 지부장은 피를 질색하기로 유명한데, 사람이 죽어 핏자국이 남았던 곳을 왜 계속 집무실로 쓰고 있을까. 가능성은 크지 않지. 또다시 시체를 치를 일이 생기거나, 혹은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뀌었다거나. 아무리 봐도 전자의 확률이 높지 않나?”

“난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야. 저 인간이 멋대로….”

얼음 동상들은 마나에 의해 그대로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손을 대자 ‘쨍’하고 하나둘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익숙한 얼굴들인데. 길드의 정보원들이 지부장이 아니라 외부의 의뢰인 명령을 듣고 움직였다는 말인가?”

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제안을 하지. 이번 일을 조용히 묻는다면 앞으로 45번 구역에서 의뢰하는 모든 정보 비용은 무료로 처리해 주지. 물론 저 인간은 손님 마음대로 처리해도 되고 말이야. 아니면 우리 둘이 마음먹고 헥사메디컬을 협박해 돈을 뜯어낼 수도 있겠지. 어때?”

이번 일이 상부에 알려진다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다른 누구보다 잭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눈앞의 일 외에도 이제까지 온갖 원칙을 어기며 길드를 운영해 왔으니까.

“내가 어떤 대답을 할 것 같나?”

그 말과 함께 나는 슬쩍 빈틈을 보였다.

곧바로 잭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번개처럼 날아온 에스텔에게 밀려 장식장을 무너트리며 구석에 처박혔다.

탕!

그와 동시에 나는 몸을 돌려 피스톨을 쏘았다.

도망치려 자세를 잡던 벨포트의 머리맡에 총알 자국이 생겨 있었다.

“다음은 머리다.”

그 사이 잭은 에스텔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나름 분전했지만, 팔꿈치에 명치를 찍히고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나는 벨포트의 잔을 들어 허공에 얼어 있는 술 결정 밑에 가져다 댔다.

열기가 끓는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결정은 다시 액체가 되어 잔을 채웠다.

그 잔을 바짝 엎드려 있는 벨포트에게 다가가 얼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잔이 비었더군. 이제 아까 못다 한 대화를 다시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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