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주주 총회 (5)
“부회장님. 준비하셨다던 깜짝 이벤트, 멀리서 걸어오며 봤는데 굉장히 잘 만드셨던데요. 장본인인 저도 깜빡 속겠다 싶을 정도로요.”
부회장 첫째 헥터.
생긋 미소를 짓고 있는 피에타와 달리 그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이벤트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냐?
─확실히 몇 주간 대외적인 자리에 모습을 비춘 적이 없긴 한데.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해 보이잖아.
피에타가 대화의 선수를 쳐 대처할 타이밍을 놓친 데다 주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에타, 병세가 많이 나아졌나 보구나. 분명 지금 이 시각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할 텐데.”
“어머, 아직도 연기를 계속하시는 건가요? 잘못하면 주주님들이 화내실지도 몰라요?”
헥터는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렸다.
“당장 내려가. 가드들에게 잡혀 끌려가기 전에.”
“내려가야 할 사람은 부회장님이죠. 안 그래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작게 속삭이는 정도였고 주주들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무언가 다툼 비슷한 대화가 오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정도였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는데. 지금 당장 가드를 부르겠다.”
“마음대로 해요.”
“뭐라고?”
“그렇게 하는 순간 당신들이 한 짓을 모두 까발려 버틸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주들이 믿을 것 같아?”
순간 피에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대로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 꺼지라고, 그나마 체면 차리고 싶으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내 옷엔 피가 묻어 있고 행동은 멀쩡해. 너와 나 둘 중 어느 쪽 말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상황을 다 추측하고 있을걸?”
헥터의 시선이 장내로 향했다.
주주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으며 그사이엔 기자들도 몇 명 끼어 있었다.
“내가 베푸는 마지막 아량이야. 네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주가 떨어지는 꼴 보기 싫으면, 꺼져.”
힘주어 발음한 마지막 한 단어.
헥터의 몸이 움찔했다.
깊은 갈등이 얼굴에 스쳤고, 그는 결국 긴 단상 끝으로 가 분한 얼굴로 벽에 붙어 섰다.
“발표 내용 범위에 조율이 있어 진행이 늦어진 점 사과드려요. 이제 진짜 시작하겠습니다.”
피에타가 한 차례 좌중을 둘러본 뒤 포인터로 화면을 가리켰다.
“먼저 자사 주력제품들의 지난해 월별 판매 추이를 살펴보면….”
그녀의 발표는 더없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을 짚어 주주들이 큰 정신력 소모 없이 내용을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분명 누군가는 마법의 발달로 총기가 사용되지 않는 날이 올 거라 말합니다.”
게다가 단순히 보여 주기식 발표가 아닌, 회사의 약점을 명확히 진단하고 그를 보완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발표였다.
피에타의 짙은 호소력과 카리스마가 더해져 주주들은 어느새 발표에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처음의 소란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수첩을 꺼내 필기를 하고 있었다.
“마법과의 상생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협력 업체를 이미 선정해 두신 겁니까?”
“황실 정부의 공장 이전 권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곳곳에서 질문이 날아들었지만, 피에타는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대답해 나갔다.
헥터를 포함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겠단 의도가 명백한 질문들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허를 찌르는 답변으로 질문자를 역으로 당황하게 했다.
발표가 끝났을 때 장내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 차례인 헥터가 복잡한 얼굴로 단상에 올라 기업의 구조 개편과 관련된 발표를 이어갔다.
이제 공수가 바뀌었다.
“마케팅팀을 이렇게 축소했을 때 발생할 손실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마련해 놓으셨나요?”
“그건….”
피에타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실제로 기업의 모든 부서의 업무를 꿰고 있어야 답할 수 있는, 대본에는 없는 질문이었다.
서로를 향한 공격적인 모습에 주주들은 여전히 수군거렸고, 헥터는 쩔쩔매며 발표를 마쳤다.
총회는 식순대로 진행되어 막바지에 다다랐다.
대리인이 자물쇠가 달린 철제 가방에서 밀봉된 서류 하나를 꺼냈다.
“바쁘신 시간 내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서류를 뜯자 종이 하나가 나왔다.
나는 흘긋 헥터를 살폈다.
그는 총회가 진행되는 내내 굳은 얼굴로 피에타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어 나는 그의 안배가 아직 남아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생각이 있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게 좋을 텐데.’
나는 고개를 돌려 홀 안쪽을 둘러보았다.
곧 단상에 가까운 벽 쪽에 배치된 가드 하나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발표하겠습니다.”
종이를 든 대리인이 한 차례 심호흡한 뒤 말했다.
“현 시간부로 로우택틱의 회장직을 전무이사 피에타 네드비체에게 위임한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내 말뜻을 이해한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곧 장내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표였기에 박수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피에타 전무이사. 단 위로 올라오십시오. 회사의 모든 정보를 열람하고 시설을 작동할 수 있는 마스터 카드입니다.”
대리인의 지시에 따라 피에타가 계단에 올랐다.
그 순간 눈여겨보고 있던 가드가 품에서 총을 꺼내 피에타를 향해 쏘았다.
탕!
방호를 두른 손을 뻗으며, 총알이 날아들 궤도를 향해 나는 몸을 날렸다.
* * *
“주주 총회에서 일어난 총기 발사. 정치적 모략인가,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전략인가.”
에스텔이 신문을 들고 방 안을 거닐며 헤드라인을 읽어 내렸다.
로우택틱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용 숙소였다.
한 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해 작은 저택과 다름없었고, 방 중 몇 개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었다.
“봐요. 여기 당신 사진도 실렸어요.”
거대한 집무용 책상에 앉아 탄환과 총기를 점검하고 있던 내게 그녀가 다가와 말했다.
신문 하단엔 내가 손아귀로 총알을 움켜쥐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용케도 찍었군그래.”
“특종에 목숨 거는 인간들이니까요, 기자들은.”
피에타가 힘을 썼지만, 총회장에 있던 이목이 워낙 많았고 결국 기사가 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소란이 있었는데 주가가 급등하다니 신기하네요.”
“사업전략발표가 그만큼 완벽했다는 이야기겠지.”
세간의 분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회장의 병과 연관 지어 후계자 간의 세력 다툼이라 정확히 진단하거나.
혹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일종의 잘 짜인 쇼라고 분석하거나.
그것과 별개로 피에타의 회장 임명과 내년도 기업 성장에 대한 기대 심리 때문에 주가는 끝도 없이 치솟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 놔야 하나. 돈 좀 빌려줄래요?”
그녀는 농담을 건네며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기사의 다음 부분을 읽었다.
“피에타 네드비체 회장은 일련의 소란을 ‘해프닝’이라는 말로 일축했으며 총격을 막았던 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녀가 책상 위에 신문을 내려놓고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당신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나 봐요. 사진에 얼굴이 반쯤 나와 있기는 한데, 마법으로 또 바꾸면 되니 큰 문제는 안 되겠죠.”
나는 천으로 총기를 닦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바빠도 너무 바쁘네요. 그날 이후 우릴 여기에 방치해 두고 며칠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추었잖아요.”
그녀가 툴툴거렸다.
피에타는 회장 자리와 함께 회사 운영에 관한 모든 전권을 위임받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어차피 안정을 취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당신이 또 마석이나 촉매로 무리하니까 그렇죠. 무리했어야 할 상황이니 그랬겠지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언젠가 당신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서져 없어지지 않을까.”
“적어도 네 병을 치료하기 전까진 멀쩡할 테니 안심해도 좋다.”
“아뇨.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고 피에타가 나타났다.
“죄송해요. 변명이 아니라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힘없이 몸을 파묻었다. 시체라 해도 믿을 안색이었다.
에스텔은 말없이 커피를 하나 타다 주었고 피에타는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에스텔 님.”
피에타는 며칠간 바빴던 이유를 간략히 풀었다.
가장 먼저 대대적인 인사 숙청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후계 후보에 붙었던 이들을 모두 잘라내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중립 세력과 기존에 자신을 따랐던 이들로 인사를 채워 넣고 있다고.
헥터와 멜리나는 직위를 해제한 뒤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부회장도 자기 마음대로 자르다니 정말 무소불위의 권력이네요.”
“맞아요. 그래서 로우택틱은 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운영 방식이 확연히 달라지죠.”
피에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반 님은 한자리 맡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난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농담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잘하실 것 같아서.”
“거절하지.”
“아쉽네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이야기는 계약 완료에 대한 보수로 넘어갔다.
“다른 용병분들에게는 이미 지급을 마쳤어요. 에반 님과 에스텔 님에겐 기존에 약속드렸던 1,500만 실링 외에 3,000만 실링을 추가로 드리려 해요. 두 분이 주신 도움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당장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많진 않아서요. 현금이나 계좌, 원하는 방식으로 준비해 드릴게요.”
“계좌로 받지.”
추가로 준다는 보수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단 추가로 받는 3,000만 실링은 주식으로 받고 싶은데. 가능한가?”
피에타가 놀란 눈을 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에스텔 역시도.
“가능은 하죠. 하지만 3,000만 실링을 전부 다요?”
“그래.”
“별로 추천해 드리고 싶은 방법은 아니에요. 저희 회사를 믿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미 며칠 사이에 주가가 너무 많이 올랐어요. 차라리 몇 주 뒤에 주가가 안정된 다음에 구매하시는 게….”
앞으로는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는 얘기였다.
“아니. 매입 시기는 지금이다.”
“…알았어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게요. 그리고 바마와의 재계약일은 2주 뒤에요. 53번 구역의 폐공장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알겠다. 기술자의 섭외는 어떻게 되었지?”
“62번 구역에 저희 공장이 있어요. 총기 외에 다른 무기의 주문제작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대장간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피에타는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공장장이 성격은 괴팍하지만, 실력은 뛰어나요. 황실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정도로요. 감사히도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신 분이라 저희 쪽을 택해 주셨어요.”
피에타는 봉투 안에 자신이 직접 쓴 편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공장장은 매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통신이 안 될 때가 많으며 이번이 그런 경우라고.
“찾아가 편지를 보여 드리면 에반 님이 부탁하는 대로 작업을 진행해 주실 거예요.”
피에타는 그 뒤 커피를 조금 마시며 한담을 떨다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 전속 호위 이야기를 다시 꺼내 에스텔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에반 님.”
그녀가 나가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지.
바마와의 만남에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 녀석의 숨을 끊을지 말이다.
* * *
이틀 뒤.
62번 구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도로가 잘 닦인 데다 거리가 멀지 않아 몇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짜 대장간에 가깝네요. 공장이라기보다는.”
나는 에스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에 표시된 넓은 공터엔 2층 높이의 공장 하나가 서 있었다.
주위 창고엔 가공된 상태의, 혹은 날 것 그대로의 광석들이 식량창고처럼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쇳물이나 달궈진 금속을 실은 기계들을 인부들이 조종해 곳곳을 바삐 돌아다녔다.
후끈한 열기가 이곳까지 전해져 왔다.
“입구는 저쪽인가 봐요.”
차에서 내려 안쪽으로 진입했다.
공장 문을 향해 걷는 동안 누구도 제지하거나 말을 걸어 오지 않았다.
방문객을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각자 할 일로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개인 작업실은 공장 안쪽에 있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에스텔과 함께 공장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발을 딛자마자 쩌렁쩌렁한 고함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철을 추출할 때는! 1도도 어긋나지 않게 온도를 맞추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냐! 이 시원찮은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