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55화 (55/227)

#055. 주주 총회 (3)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

피에타는 그저 경악한 채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뛰어난 머리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가정을 찾기 위해 바삐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취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컥, 컥!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유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목을 감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시선을 흘긋 위로 향했다.

내부를 감시하는 마법 카메라가 달려 있었고, 내가 마나를 흘려 내부에 주입한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망가져 버렸다.

팟.

그 순간 18층 버튼의 불빛이 꺼지고 나머지 모든 층의 불빛이 다닥다닥 들어왔다.

빌딩 통제실에 있는 이가 뒤늦게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입력된 명령을 수행해 18층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띵-

엘리베이터의 둔중한 문이 좌우로 갈라지고, 흰색 대리석으로 된 넓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배치되어 있던 가드들이 즉각 총을 꺼내 이쪽을 겨눴다.

“비, 비서관님?”

얼굴에 당황한 기색들은 감추지 못했지만, 대응 속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총! 컥! 다, 당장 내리게!”

“하, 하지만….”

나는 비서관을 방패로 삼아 천천히 앞으로 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피에타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옆을 따랐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겠나?”

“…….”

아래층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점점 가까워져 왔으며, 개중엔 인간의 것이 아닌 것도 섞여 있었다.

“17층에서 내렸다면 주주 총회 장소가 아닌 다른 홀로 안내되어 흔적도 없이 묻혔을 거다.”

“컥!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컥! 어, 어서 이 자를!”

“당황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18층의 홀은 어디지?”

오전 10시 44분.

총회 시작까지는 16분이 남았다.

주주와 기업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해 대기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문 뒤 대답했다.

“조금 이동해야 해요. 반대편으로 돌아가 구름다리를 하나 건너야 해요.”

“컥! 아, 아가씨!”

“내게 바짝 붙어 따라와라.”

내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자 가드들을 주춤대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몇 걸음 떼지 않은 순간, 복도 끝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다 죽이라고 했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복도 바닥이 울리며 온갖 외형을 한 수인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경로에 닿는 모든 것을 넘어트리고 부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살려 줘!”

“왜, 왜 수인이 우리 건물에…!”

가드들도 마나유저로 보였지만 수인들의 수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저자가 둘째인가.’

복도 끝엔 적갈색 머리의 키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다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 비서관이 틈을 노려 품에서 총을 꺼냈다.

잔뜩 핏발이 선 눈동자로 피에타를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발사했다.

탕!

“끄아악!”

내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방호를 두른 손바닥으로 총구를 감싸 쥐었고, 탄환은 그대로 폭발해 비서관의 손목을 날려 버렸다.

털썩.

내가 목을 감았던 팔을 풀자 비서관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렸다.

“작별 인사할 시간이 필요한가?”

“…됐어요.”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배신감과 분노, 슬픔 따위의 여러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서 총을 꺼내 비서관을 겨누었다.

탕!

비서관의 몸이 한 차례 떨림과 함께 완전히 멈추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나는 아공간에서 제르비아의 검 한 자루를 꺼내 건넸다.

“기사 학교에 다녔다고 했나. 수인들을 상대로 총보다는 이쪽이 더 도움이 될 거다.”

“알았어요.”

수인들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다만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 그린호드 외의 다른 곳에서도 고용한 것으로 보였다.

‘확실히 수인들이 써먹고 버리기는 편하겠지. 인간들의 정치엔 관심이 없고 전투만 원할 뿐이니.’

그만큼 개체 하나하나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탕!

켕!

가장 먼저 달려드는 놈을 총으로 쏘아 떨어트렸다.

공격은 쉴 새 없이 쇄도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은 부분적으로 방호를 펼쳐 막고.

틈이 보일 때마다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고.

달라붙는 녀석은 총 손잡이로 내리쳐 떨쳐 내고.

사방에 피가 튀며 복도와 벽은 핏자국으로 물 들어갔다.

피에타와 등을 맞댄 채, 호흡을 맞추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녀에겐 여러 종류의 강화마법을 걸어 주었고, 전투 센스 자체가 나쁘지 않아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투에 적응할수록 빠르게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 입으로 재능이 없다고 했었나.’

기사 학교를 그만둔 다른 사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에요. 그런데 비서관이 배신할 생각이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총회가 열리는 곳이 17층이 아니라 18층이란 것도요.”

“앞의 질문은 대답해 줄 수 없다.”

탕!

“총회 장소에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아무 수작을 부리지 않으니 그가 우리를 다른 장소로 유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컥. 탕!

“적들이 배치되어 있을 테고, 유사시를 대비한다면 그 위치는 총회장에서 멀지 않다. 네 말로는 인원을 대거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16, 17, 18층 그리고 아예 떨어진 26층 밖에 없다고 했었지. 바닥에 울릴 소음을 고려한다면 16층보다는 18층이 총회 장소일 가능성이 크다.”

엄밀히 말하면 확률이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선택지를 골랐고 그것이 맞아떨어졌을 뿐.

적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기에 적당한 선에서 길이 뚫릴 때마다 복도를 달려 이동했다.

그럴 때마다 배치되어 있던 가드들이 뒤쫓아 오는 수인들에게 쓸려나갔다.

‘다른 직원이나 방문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예 작정하고 근처의 층들은 비워 놓았나.’

멀리, 반대편 빌딩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보여 왔다.

하지만 머릿속에 한 가지 미심쩍음이 남았다.

적들이 너무 약했다.

주드로의 실패를 전해 듣고, 내가 실력자란 걸 알고 충분히 대비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도.

‘기업인들이라 용병들의 전투력에 관해선 감을 잡지 못한 건가. 올라오는 건 나 하나이니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아니, 그래도 나라면 분명….’

구름다리를 뛰어 지나던 중 나는 문득 살기를 느끼고 피에타를 잡아끌며 뒤로 몸을 굴렸다.

“눈치가 제법 빠른 놈이군. 피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에 도마뱀 모습을 한 수인 하나가 단검 두 자루를 바닥에 내리꽂은 채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운이 나빠. 그냥 있었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을 텐데. 킥!”

녀석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곧바로 쇄도해 왔다.

챙! 챙!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수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나를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이 정도의 검로를 구사한다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상관없어! 여자를 먼저 죽이라고 했지!”

녀석의 단검은 집요하게 피에타를 노려 왔다.

나는 녀석과 피에타 사이에 끼어 방어에 치중했고 피에타는 내 움직임과 합을 맞춰 공격을 찔러 넣었다.

탕!

콰직!

틈을 보아 피스톨을 쏘았다.

적중당한 팔이 「바람칼날」에 통째로 떨어져 나갔고, 녀석은 공중제비를 돌아 우리가 진입했던 방향에 착지했다.

뒤쫓아 온 수인들이 도착했다가 녀석을 보고는 주춤하며 멈춰 섰다.

‘일부러 피하지 않은 느낌이다. 분명 여유가 있었음에도.’

피에타의 손을 잡아채어 비어 있는 앞쪽으로 달렸다.

“켄드릭 님과 한 몸이 되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뒤를 돌아보자, 녀석의 입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져 다른 수인의 머리를 잡아 삼켰다.

콰득.

머리를 잃은 몸체가 쓰러졌다.

겁에 질린 수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났다.

꿀꺽.

삼켜진 머리가 녀석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곧 녀석의 팔 절단부에 피거품이 일며 잘렸던 팔이 재생돼 나왔다.

팡!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챙!

피에타를 향해 단검이 휘둘러져 왔고, 나는 사이에 피스톨을 끼워 넣어 검을 튕겨 내었다.

피스톨은 그대로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곧바로 품에서 다른 총을 꺼내 녀석을 향해 쏘았다.

탕!

이번에는 맞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천장에 양손과 양발을 붙인 자세로 달라붙어 있는 녀석이 보였다.

“키키키키킥!”

녀석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팡!

녀석이 다시 천장을 박차고 달려드는 순간, 수인들 쪽에서 소란이 일며 금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텅!

“키헥!”

허공에서 섬광과 충돌한 녀석은 멀리 날아가 구름다리 벽에 박혔다.

우리 앞, 섬광이 멈춘 자리엔 에스텔이 서 있었다.

“늦었나요?”

“아니. 적절한 때에 왔다.”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중간에 방해꾼들이 조금 달라붙었거든요. 여긴 우리가 맡을게요. 가요.”

다른 용병들 역시 따라 올라와 안쪽 복도에서 수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고마워요, 사제님.”

“…이번 건 진심 같네. 가요 어서. 늦겠어요.”

피에타와 나는 구름다리를 지나 반대편 빌딩에 진입했다.

총회 장소가 있는 쪽이어서인지 복도에 수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벽면은 통유리로 이루어져 지상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복도는 적막했고 우리의 숨소리와 발소리 외엔 들리지 않았다.

“잠시, 잠시만요.”

피에타가 멈춰 서 가쁘게 숨을 골랐다.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체력은 어쩔 수 없었다.

마나회로가 없는 일반인이니, 사실 이 정도까지 해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53분.

7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앞머리를 따라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 조금만, 하, 조금만요….”

힘들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지만 아직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녀를 다독여 다시 출발하려 할 때, 앞쪽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오랜만이야, 피에타. 설마 여기까지 다시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는데.”

아까 보았던 적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그녀는 반 정장 차림이었고 손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부채가 들려 있었다.

피에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야말로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어. 이번에도 뒤에 숨어서 꿍꿍이만 부릴 줄 알았거든.”

“어머, 언니한테 너라니. 못 본 사이에 입에 험해졌구나?”

피에타에게 들었던 용모나 인상착의가 아니라도, 그녀가 누군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멜리나 네드비체.

네드비체 가문의 둘째였다.

그녀가 부채를 입으로 가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안녕하세요, 신사분. 제 동생을 돌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부족한 게 많은 아이인데.”

“…….”

“쭉 지켜봤는데 뭐 하시는 분인가요? 특급으로 분류된 용병이라 쳐도 말이 안 되는 실력이던 걸요. 마법사? 아녜요. 제가 마탑 출신인데 그곳에서도 그렇게 빠른 몸놀림을 가진 마법사는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또 총으로 수인들의 가죽을 뚫고….”

그녀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살폈다.

“길을 비켜라. 내가 해 줄 말은 그것밖에 없다.”

“안 돼요. 그건 곤란해요. 우린 총회가 시작되자마자 저 아이가 정신병원에 들어갔단 안타까운 소식을 발표할 생각이거든요. 주주들에게 보일 서류도 이미 다 준비해 놓았어요.”

그녀가 콧소리를 섞으며 말을 이었다.

“협의된 내용이 아니니 아버지의 대리인도 당황하겠죠. 총회 끝에 후계자를 발표하려 했겠지만, 그러지 못할 거예요. 정신병 걸린 여자를 어떻게 후계자로? 그 분위기에?”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피에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갔다.

“뭐, 분위기가 조금 다운되긴 하겠지만 괜찮아요. 저 아이가 만들어 놓은 다음 해 사업전략자료가 있어서, 그건 예정대로 발표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니까 못 가요.”

멜리나가 부채를 내렸다.

“피에타, 너도 우리 결정을 이해하지?”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었고, 그녀가 나왔던 통로에서 다른 이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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