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54화 (54/227)

#054. 주주 총회 (2)

“밀수 사업은 저희 쪽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에요.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늘 만반의 준비를 하죠.”

전문가들이 밤을 새워 계약서를 검토하고 실력이 검증된 가드들이 차출된다고 했다.

외딴 장소의 폐공장이나 건물로 가면 단둘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그는 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뒤쪽에 도열해 있는 조직원들 몇 명과 함께요.”

“특이한 점은 없었나?”

“글쎄요. 솔직히 말해 조금 무서웠어요. 소름 끼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부분이 한둘이 아니라.”

그녀는 몇 가지 특이점을 꼽았다.

계절과 관계없이 긴 옷으로 온몸을 칭칭 감싼다는 것.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부하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인간이 아닌 것을 대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시간 약속이나 일 처리에 대해서도 굉장히 예민한 사람 같았어요. 그 사람 어깨에 실수로 펜을 떨어트린 조직원 한 명이 있었었는데요. 장갑 낀 손을 머리에 올리더니 그대로 으스러트렸거든요.”

그때가 생각난 듯 피에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 외에도 그의 행동 습관이나 버릇 같은 것을 상세하게 물었다.

“네가 계약 갱신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언제지?”

“일 년 정도 되었어요.”

일 년.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세 달 전보다 훨씬 더 이전의 시점이다.

일단 피에타가 이야기한 것들은 내가 직접 한 설정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나는 전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백진우.

만약 녀석이 나와 같이 이 세계에 떨어져 누군가에 빙의했다면.

110번대 구역의 외곽, 작품 후반부에 공략될 유적이 도굴당한 것이 가정의 근거였다.

확률적으론 내 행동이 누적되어 일어난 나비효과란 편이 높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녀석이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가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다.

그 가정이 사실로 드러나기를.

만약 그렇다면 현실의 복수를 조금 더 일찍 앞당길 수 있을 테니까.

“네가 직접 참여한 가장 최근 계약은 언제였나?”

“한 달 전이었어요.”

바마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일단 설정에서 벗어난 행동은 보이지 않았으니.

열차에서 마주쳤던 라이카 역시도. 라이카는 라이카 그 자체였으니까.

“두 분의 진짜 정체나 목적이 뭔지 굉장히 궁금하지만 묻지 않을게요. 실례가 될 수도 있고, 어차피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으실 거니까.”

피에타는 칵테일을 몇 잔 더 홀짝이며 내일 찾아올 조력자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먼저 올라가 볼게요. 65번 구역에 들어간 뒤의 계획도 점검을 해야 해서.”

그녀가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무알콜 칵테일임에도 왜인지 술에 취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에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쉬운가 보군. 술기운을 아예 차단하며 마시고 있으니.”

그녀 앞에는 빈 잔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잔 테두리를 따라, 그녀의 손가락이 심드렁하게 움직였다.

“참아야죠. 취해도 금방 깰 수 있긴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니 그녀로선 강도 높은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의 손이 셔츠 주머니로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잡지 않은 채 그대로 빠져나왔다.

원래 담뱃갑이 들어 있을 자리로 습관적인 움직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삶에 대한 희망이 생긴 뒤로, 그녀는 담배도 피지 않고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용병들은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인원의 절반을 한 조로 하여 구역 중심가로 향했다.

“마법사님은 쉬고 계십쇼. 이런 건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전투에서 내가 활약하는 걸 봤던, 혹은 직접 도움을 받았던 용병들은 어느샌가 나를 존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걸어 준 마법으로 말할게요. 이쪽이 통신 장비보다 더 먼 거리에서 대화할 수 있으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에스텔이 물자 보충을 나가는 용병들과 함께했다.

탁.

문이 닫히고 남은 이들은 1층의 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대기했다.

“본사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모두 피에타의 신분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고 그녀도 크게 감추는 투는 아니었다.

본사에서 오는 원군.

용병들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예정했던 시간이 되어가도록 조력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의 말수가 적어지고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 때쯤, 누군가 입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물자 팀이 하기로 되어 있던 사인과는 다른 노크였다.

끼익.

피에타가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검은 외투와 모자를 쓴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아가씨!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사내가 피에타의 손을 꼭 맞잡았다.

“오랜만이에요, 비서관님.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지셨네요.”

“말도 마십시오. 아가씨가 변을 당했단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암살자들이 왔었어요. 급하게 도망쳐 나오느라 물건들도 제대로 못 챙겼었지만.”

“어쨌든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비서관이라 불린 사내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데 이쪽 분들은….”

“제가 고용한 용병분들이에요. 78번에서 이곳 68번으로 건너오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아, 저번 통신 때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본사에서 수석 비서관을 맡고 있는 알프레드라고 합니다. 저희 아가씨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고위직의 이미지와는 달리 공손한 태도였다.

그는 피에타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 피에타에게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가장 큰 도움을 주신 에반 님이에요. 작전에 대한 상의를 함께 하려고 해요.”

그는 위아래로 나를 한 번 훑더니 온화한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반 님.”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악수를 받았다.

응접실에 들어가 테이블에 세 명이 둘러앉았다.

“그동안 본사의 소식을 전해 주신 분이 비서관님이에요. 아버지와 굉장히 오랜 친우 사이시고 언니와 오빠들, 그리고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돌봐 주셨어요.”

피에타가 짧은 소개를 더했고, 그는 내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남은 삼 남매는 모두 한통속입니다. 일단 피에타 아가씨를 제거하자 결탁했지요. 아가씨의 자택에 암살자를 보낸 후에 저를 포섭하려고도 시도했지요.”

일단 제안을 수락한 뒤 피에타를 위해 스파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넓은 활동 반경을 가지지는 못하고 있지만.

“셋째 도련님, 아니 이젠 도련님이란 호칭을 쓰기도 꺼려지는군요. 어쨌든 주드로가 황야로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를 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실제로 그랬죠. 마주쳤고요.”

“여기 이렇게 계신 걸 보니 잘 따돌리셨나 봅니다.”

“따돌렸다기보다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줬죠. 그렇죠, 에반 님?”

말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 알프레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친족 살해라는 악독한 계획을 품었으면 역으로 당할 생각도 했어야죠.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드로가 고용한 용병의 숫자가 적지 않다 들었는데 어떻게….”

피에타가 내 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도움을 주셨다더니, 아가씨가 귀한 인연을 만나셨군요. 굉장한 실력자이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계속해 이야기해 주었다.

“주주 총회는 예정된 날짜와 시간 그대로 진행됩니다. 장소는 본사 35층 중 중간위치인 17층의 다목적 홀입니다. 위아래로 평소보다 더 많은 수의 가드가 배치되며 총회가 열리는 동안은 건물 전체에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될 겁니다.”

“예정대로 총회 당일 65번 구역에 도착하는 걸로 해요. 서둘러 진입해봤자 언니 오빠의 눈에 발각될 확률만 높아지니까요.”

“예. 저도 그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총회에 참가하는 주주로 신분증과 서류는 꾸며두었고, 저와 동행하시면 본사 건물에 들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신분증은 몇 개를 준비해 두었지?”

“아가씨 것 하나에 더해 여분으로 하나를 더 준비해 두었습니다.”

총 둘.

“지금 추가제작이 가능한가?”

“어렵습니다. 최근 본사에 감시의 눈이 많아져 이 둘을 위조하는 데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로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업 전략 발표 뒤 총회의 끝에, 대리인이 친필임이 검증된 발표문을 대신해 낭독할 것이라고.

“또, 아가씨가 자살했다 발표하려던 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으로 말입니다. 아가씨가 대외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는 순간 주가가 하락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살보다는 그편이 그나마 낫다 판단한 것 같습니다.”

피에타가 코웃음을 쳤다.

“정신병이라니. 진짜 정신병 걸린 게 누구인데.”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회장님과 아가씨 편입니다.”

그가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고, 나는 그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오전 서쪽 외곽의 출구에서 뵙겠습니다. 명목상 저는 출장으로 되어 있어 당장 들어가지 않아도 본사에서 절 의심하진 않을 겁니다.”

출발은 내일 오전.

중간에 67번과 66번 구역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동해 총회 당일 아침에 65번 구역 본사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다.

“고마워요, 비서관님. 도와주셔서.”

“별말씀을요. 전 회장님의 뜻에 따르니 도의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사견으로도 전 아가씨가 회장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피에타의 다소 지쳐있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를 배웅하려 응접실 밖으로 나갔을 때, 막 도착한 물자 팀과 마주쳤다.

“아가씨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문으로 향하는 길 용병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에스텔이 악수를 피해 내 곁으로 와 속삭였다.

“말했던 조력자인가 보네요.”

“그래. 출발은 내일 오전이다. 밖에서는 별일이 없었나?”

“어떤 놈이 재수 없게 작업 멘트를 던져서 한 번 넘어트려 준 거 빼고는요. 탄약이랑 연료 모두 부족하지 않게 사 왔어요.”

알프레드는 피에타와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출입구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비서관. 피에타의 편이라고 했었지. 이렇게 능력 있는 자가 아군이라니 든든하군.”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전 늘 아가씨의 편이지요. 저도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용병이 함께해 든든합니다.”

그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모자를 쓰고 숙소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등을 돌려 에스텔을 보았다.

“지금 분명….”

어느 정도 예상대로, 그녀는 놀란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 *

다시 다음날 오전.

용병들의 차와 스포츠카가 도로 위를 달렸다.

그 주위를 몇 대의 세단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었다.

중간중간 다음 구역에 도착해 휴식을 취했고, 65번 구역의 본사 지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제지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신분이 확인된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알프레드가 말했다.

준비된 신분증은 둘.

피에타와 동행할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용병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신호를 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용병들과 에스텔의 모습은 사라졌다.

알프레드가 17층 버튼을 누르고 패널에 신분증 카드를 가져다 대자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수석 비서관 알프레드, 1인.

─ 총회 참가인, 2인.

─ 확인되었습니다.

우웅-

엘리베이터가 위로 향하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팽팽하게 느껴졌다.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아가씨?”

“조금은요.”

“17층에서 내리면 홀 입구에서 가드가 다시 한번 신분을 확인할 겁니다. 제가 포섭해둔 인물이니 마스크와 선글라스는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베이터는 느리지만 침착한 속도로 나아갔다.

14.

중간에 그 누구도 타지 않았고.

15.

점차 목표한 층에 가까워져 갔다.

16.

그리고 16층이라는 숫자가 패널에 출력된 순간.

나는 알프레드의 목을 팔로 휘감아 뒤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전격으로 이뤄진 칼날을 만들어 그의 목에 겨눴다.

“커, 컥! 지, 지금 이게 무슨!”

“에반 님? 갑자기 뭘 하시는 거예요?”

나는 팔을 뻗어 17층 버튼의 불을 끄고 18층을 눌렀다.

그리고 말했다.

“총회가 열리는 장소는 17층이 아니라 18층이지. 그렇지 않나?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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