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주주 총회 (1)
노을을 맞으며 황야를 달렸다.
오래지 않아 용병들이 탄 카고 트럭 하나와 스포츠카 한 대를 마주칠 수 있었다.
“저, 정말 살아 있었잖아.”
“절벽에서 떨어져서 꼼짝없이 죽었을 줄 알았는데.”
용병들의 수는 여덟로 줄어 있었다.
몸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했으며 붕대를 감거나 다리를 절뚝이는 이도 있었다.
탁.
스포츠카 문이 열리고 에스텔이 뒤따라 나왔다.
그녀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와 내 몸부터 살폈고, 그 광경을 피에타가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괜찮아요? 다친 데는?”
“멀쩡하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곳은.”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그녀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 불길은 역시 당신이 한 일이었군요. 또 몸이 상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테고.”
그때 피에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살았으면 됐죠. 이동부터 해요. 68번 구역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주위에 잔당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요.”
다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어쨌든, 에스텔도 바로 이동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피에타는 용병들의 차에, 나는 스포츠카에 올라타 다시 황야를 나아갔다.
“저 여자가 탄 차와 당신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는 싸움이 흐지부지 됐어요. 적들이 먼저 떨어져나갔죠. 이곳에 오는 동안 다시 마주쳐 싸우긴 했지만요.”
그녀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와중에 추가로 용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간이 장례식을 치러준 뒤 남은 이들을 모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나 역시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쓸데없는 부분은 쳐내고, 필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그럼 삼남은 죽은 거네요. 그리고 맏오빠와 둘째 언니가 있다고 했었죠.
“그래. 그들이 고용한 용병이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셋째가 끌고 온 녀석들은 이게 전부인 것 같더군.”
우리를 뒤따라오는 적은 없었다.
멀리 68번 구역의 외벽이 보여 올 때까지도.
“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내가 더 강했더라면, 당신이 무리해야 할 일이 이제까지 없지 않았을까.”
“…….”
“그냥 그렇다고요.”
운전하는 그녀의 옆얼굴에 미묘한 불만스러움이 묻어났다.
차는 다시 이십여 분을 달려 외벽 아래 도착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차를 댄 뒤, 걸어서 구역 안쪽에 진입했다.
“머물 곳은 조사해 뒀었어요.”
그리고 중심가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의 5층짜리 숙박 시설로 들어갔다.
다소 허름한 감이 있었지만, 지하의 바나 옥상의 라운지를 포함하여 구색은 전부 갖추고 있었다.
“예약하셨던 것보다 일찍 오셨군요. 모레 자정까지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주인은 피에타에게 열쇠 뭉치를 건넨 뒤 허리를 꾸벅 숙이고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실내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녀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죽은 분들에게 지급되었던 계약금은 관련 법률에 따라 가족들에게 양도되거나 유언에 따라 처리될 거예요. 계약 완수에 대한 추가 보수는 받지 못하겠지만요.”
그녀는 열쇠 뭉치를 잘그락거리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서 빠지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요. 단, 계약금의 반은 돌려놓으시고요. 반대로 쭉 함께해 계약을 완수하신다면, 약속했던 추가 보수에 백만 실링씩을 더 얹어 드릴게요.”
용병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중 누군가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적이 격하긴 한데, 여기까지 왔으면 가야지. 원래 다들 목숨 내놓고 이 짓거리 하는 거 아니었어?”
다른 이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만큼 우울하거나, 가라앉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온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죽음은 늘 곁에 있는 일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한 차례 정비하고 이틀 뒤에 출발할 생각이에요. 고속도로를 타면 65번 구역까지는 금방이니까요.”
용병들은 연이어 계속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피에타에게 열쇠를 받아 각자 원하는 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죽은 동료의 혼을 추모해 주겠다고 옥상으로 향하는 이도 있었다.
곧 1층 홀엔 피에타와 나, 에스텔만이 남았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용병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적절한 타이밍이었으며 적절한 동기부여였다.
용병들이 겉으로 보인 태도와 달리, 충분히 이탈자가 나올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말했던 대로. 계약 파기는 없다.”
“감사해요. 에반 님. 에스텔 님도요. 키 받으세요. 죄송해요. 자금 사정 때문에 호화스러운 곳으로 잡아 두지는 못했어요. 숙소보단 인건비가 중요해서.”
“적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이런 곳이 더 나은 지도 모르지.”
나는 열쇠뭉치를 받아 그중 하나를 고르고 옆방 열쇠를 에스텔에게 주었다.
피에타가 말했다.
“일단 구역 안쪽에 들어오는 동안 추격은 없었어요. 감시가 붙은 것 같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사람들 눈이 있는 곳이니 적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예요.”
“아무래도 주가가 걸려 있으니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
“맞아요. 그래서 셋째 오빠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던 것도 파격적인 움직임이었죠.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무리 황야라고 하지만.”
아마 피에타를 제거한 후의 권력다툼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에스텔과 함께 층계를 올랐다.
복도에서 옆방 문고리를 잡은 채 그녀가 말했다.
“쉬어요. 내상은 내가 치료해주지 못하지만, 뭐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요.”
“그러지.”
구색은 갖춰진 작은 방 안.
일부러 찬물로 샤워를 마친 뒤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회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회로 레벨: 2]
[마나: 958 / 1024]
당장 마나를 운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제까지 가해진 손상은 분명 차곡차곡 누적되어 가고 있을 터였다.
촉매와 마석을 꾸준히 사용하고, 최근엔 기존의 정제 한계를 뛰어넘으며 무리를 했으니까.
‘후유증은 대개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명의 단축으로 찾아온다지만.’
회로는 혈관과 일체화되어 육체의 기능과 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회로에 과부하를 가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으로 설정했었다.
적게는 몇 개월에서.
많게는 몇 년에 이르기까지.
‘4년. 계산상 약 그 정도의 수명이 깎여 나갔다.’
카인의 나이는 26세.
이 세계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약 40년 정도의 삶이 남았다.
그것을 고려하면 4년은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교도소를 탈옥할 당시에는 복수를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분기로 측정했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도 변수는 많았고, 성장 속도는 더뎠다.
분명 몸과 회로의 혹사를 자제할 필요는 있었다.
최악의 경우 목표 달성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을 바라보아야 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복도는 적막했다.
용병들의 말소리가 방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왔고 피로에 곯아떨어졌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벅. 저벅.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층계를 오르내리며 건물의 구조를 파악했다.
‘조바심낼 필요 없다. 복수 대상들은 어디로 도망가는 게 아니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급하게 생각하다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
하지만 머리를 비우려 해도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생각이 계속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
걸음은 어느새 지하의 바에 닿았다. 내부엔 아무도 없었고 불을 켰지만 여전히 어둑했다.
바 안에 들어가 보드카와 토닉을 꺼내 글라스에 따른 뒤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본적으로 회로의 마나는 체내에 들어온 알코올을 자동으로 분해하지만, 조절하기에 따라 그 기능을 멈출 수 있다.
즉, 의지에 따라 취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취기를 몰아낼 수 있으니.
끼익.
잔을 채워 다시 한번 입에 털어 넣었을 때, 바의 문이 열렸다.
피에타였다.
그녀 역시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문이 닫힌 줄 알았는데, 영업을 하나 보네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바에 다가와 앉은 뒤 손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바의 조명은 우리가 앉은 자리만을 어둑하게 비추었다.
“도수가 없고 달달한 걸로 부탁드려요. 저는 술을 잘 못 마셔서.”
“…….”
적당한 재료들을 꺼내 칵테일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라임이 띄워진 잔을 한 번 홀짝이고 그녀가 말했다.
“술을 좋아하시나 봐요. 동작이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
“와, 언제요? 용병으로 일하시기 전에?”
“열두 살, 매를 맞으며 일했지.”
“…….”
그녀가 잔 밑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에반 님은 어떻게 마법을 배우게 되신 건가요?”
“…….”
“처음엔 단순히 실력이 뛰어난 거라 생각했는데 공장에서의 마법을 보고 느꼈어요. 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고요.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실 때 마나가 띄었던 검은색…. 흑마법과 사제라니, 에스텔 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
그녀는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다 생긋 웃고 말았다.
“죄송해요. 실례가 되는 질문을 했네요. 제가 일만 하고 지내서 업무 외에 이런 쪽으론 조금 서툴러요.”
“65번 구역에 진입한 후의 계획은 있나?”
“있죠. 지금 당장 모든 걸 알려 드릴 순 없지만.”
“주주 총회는 4일 뒤 오전 11시라 들었다.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적도 추가적인 수를 써올 거다.”
“그렇겠죠. 죽이려 들거나. 총회가 열리는 본사에 도착하지 못하게 막으려 들거나. 맛있네요. 한 잔 더 주세요.”
딸그락.
얼음이 잔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칵테일이 그 위를 채웠다.
어둑한 조명 아래,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칵테일이 넘어갔다.
“일단 언니와 오빠는 저를 자살로 위장할 거예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인한 극단적 선택이라고. 이미 제 알리바이를 그렇게 조작해 놓고, 제 고용인들을 매수해 이야기도 맞춰 놓았죠.”
“꽤 상세히 알고 있군.”
“내부에 조력자가 있어요. 단 한 명뿐이긴 하지만요. 내일 이곳에 와 65번 구역의 진입한 다음의 일을 함께 논의할 거예요.”
끼익.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가볍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에스텔이었다.
“지나가다 말소리가 들려서 왔어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내 기운을 뒤따라 온 게 아닐까.
그녀는 피에타의 옆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나도 술 마셔도 돼요?”
“알아서 조절해서 마셔라.”
“당연하죠.”
주문대로 글라스에 위스키를 부은 뒤 하이볼 하나를 만들어 주자 그녀가 방긋 웃으며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피에타가 말했다.
“처음에 무례하게 굴었던 거, 죄송해요. 에스텔 님.”
목 뒤로 잔을 넘기려던 에스텔의 손이 허공에 멈칫했다.
“에? 뭐라고요?”
“죄송해요. 무례하게 굴어서.”
도움을 요청하기라도 하듯, 에스텔은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 여자 갑자기 왜 이래요?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내 잔을 채웠다.
“어, 어. 갑자기요?
“네. 아무리 계약 관계지만 내 안위를 지켜 주시는 분인데 이제까지 너무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아서요.”
잠시 침묵. 조명 아래 먼지가 유유히 떠다녔다.
마시려던 잔을 잠시 내려놓고, 에스텔이 말했다.
“알았어요.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저도 까칠하게 굴었던 거 미안해요.”
두 여자가 빙긋 웃었다.
왜인지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고 둘 사이의 공기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던 나는, 피에타에게 물었다.
“피에타, 네가 본 바마는 어떤 남자였지?”
“바마요? 계약 조건으로 만나게 해 달라고 하셨던?”
“그래.”
피에타가 에스텔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함께 이야기를 들어도 되느냐는 의미였다.
시선을 받은 에스텔이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모든 걸 함께 다 공유하는 사이니까.”
“네?”
“에스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방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네? 네?”
피에타가 드물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나와 에스텔을 번갈아 쳐다보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녀가 아는 바마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