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조직 (1)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예상이 갔기에 나는 가면을 찾아 썼다.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왔어요.”
곧 피에타가 방 안에 들이닥쳤고.
“지금 누구 멋대로 들어 오는 거예요?”
그 뒤를 에스텔이 쫓아 들어 왔다.
“제가 했던 제안.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셨나요?”
지금쯤 반드시 생각이 바뀌었어야 한다는 말투였다.
나는 보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내리며 말했다.
“호위 말인가?”
“네. 맞아요. 말하자면 제 전속 호위죠.”
“웃긴 여자네. 왜 허락도 안 맡고 들어 오느냐고요. 당신도 뭐라고 좀 해요. 왜 말을 받아 주고 있어요.”
내가 별다른 경계의 기색이 보이지 않자 에스텔은 내 옆에 다가와서 피에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하고요? 왜요?”
“사제님. 다 들리네요. 참고로 전 황실 예법까지 마스터했어요.”
“아 그래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둘의 시선이 맞부딪히고, 순간 허공에 스파크가 튀기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곧 피에타가 내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말했듯이 돈이라면 더 높여 줄 수도 있어요. 용병으로 보이는데, 계속 여기저기 떠도는 것보단 한 곳에 소속되어 일하는 게 낫지 않나요?”
그녀의 태도는 그녀의 진홍빛 머리색만큼이나 저돌적이었다.
눈동자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겠단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록 내가 직접 설정해 만든 인물은 아니지만, 그녀가 어떠한 부류의 인간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꼭 나를 고용하겠다는 거지? 용병 사무소에만 가도 일을 하겠다는 이가 널려 있을 텐데.”
“많이 고용해봤어요. 모두 얼마 못 가 죽고요. 이번에도 그랬죠. 한두 명 고용한 게 아니었는데.”
“그런 위험한 자리에 나를 고용하겠다는 건가?”
“에반 님. 실력에 자신 있으시지 않아요?”
그녀가 테이블 앞 소파에 자연스럽게 마주 앉았다.
“그리고 전 마법사만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해요. 여러 변수에 대응할 필요가 있을 때는요.”
그녀가 다리를 꼬아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희귀하죠. 수도의 마탑이나 클랙필드 같은 곳에 가야 겨우 볼 수 있잖아요? 에반님 같은 실력자라면 마주치기가 더욱 힘들어져요.”
나는 잠시 침묵하며 주어진 정보를 조합했고 그녀가 처한 상황을 결론짓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움받고 있나 보군.”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곧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생긋 웃었다.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절 죽이고 싶어 안달인 인간들이 많거든요.”
“후계 다툼인가?”
“뭐, 그리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곧 죽어요. 나이가 워낙 많으시거든요. 의사의 말로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거라 했어요.”
그녀의 설명은 간단명료했다.
회장이 부인과 남긴 자식은 총 넷.
그녀는 그중 막내라고 했다.
“아버지는 저를 제일 사랑해요. 언니 오빠들은 회사 지분에만 관심 있을 뿐 아버지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전혀 없거든요. 돌아가실 때가 되니까 이제야 사근사근 구는 거지.”
회장은 그녀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열흘 뒤 주주총회 때 발표할 계획이며, 이 사실은 다른 형제자매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본사가 있는 65번 구역에서 피신을 나와 있는 상태에요. 자꾸 암살자들이 찾아 들어서. 사실 지지기반이 제가 제일 약하기는 하거든요. 팔찌도 호신용으로 낙찰받으려 했었고.”
피에타의 시선이 에스텔의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로 향했다.
그녀가 약간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님. 차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거든요.”
“그쪽이 가져다 마셔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다시 스파크가 튀겼다.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나?”
“조금은요. 예전에 기사 학교에 다닌 적 있어요. 재능이 없어서 금방 그만뒀지만.”
그녀는 계약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차기 회장으로 발표가 나면 중립세력이 모두 제 쪽에 붙을 거예요. 그러면 그 언니 오빠란 인간들도 더 이상 저를 건드리지 못하겠죠.”
주주총회가 열리는 당일, 자신을 65번 구역에 무사히 입성시켜 줄 것.
피에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에스텔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받아들일 건 아니죠? 저 밥맛 떨어지는 여자 제안을?”
“사제님. 다 들리네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피에타가 말을 덧붙였다.
“내키진 않지만, 사제님도 함께 계약하신다면 보수를 더 드릴 수 있어요. 천만 실링에서 천오백만 실링으로. 사제가 왜 이런 장소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사정을 캐묻진 않을게요.”
보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그녀를 도왔을 때 그 외의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후계 다툼이라면 다른 후계자들도 호위를 고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 떳떳한 일은 되지 못하니 음지를 찾을 수밖에 없다.
고용 대상은 용병, 혹은 암흑가의 조직들.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으니, 최악의 경우 상대는 그린호드의 짐승들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피에타가 호위를 나 하나만으로 끝낼 생각은 아닐 테니, 아군으로 함께 할 용병들이 있을 터였다.
게다가 65번 구역이라면 내 동선에서도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잠시, 그녀와의 계약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받아들이지.”
“뭐라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상반된 반응 속에 나는 말을 덧붙였다.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뭐죠? 보수라면 더 올려줄 수 있어요.”
“보수는 상관없다. 대신.”
나는 테이블 아래 가방에서 미스릴을 꺼내 올렸다.
“먼저 이 미스릴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자를 섭외하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으면 한다.”
로우택틱의 주 사업은 총기 생산이긴 하지만 마나유저들을 위한 무구들도 소량 생산한다.
분명 미스릴을 가공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개인 장비를 만드시려나 봐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좋아요. 단 제가 무사히 회장에 취임한 다음에야 가능할 거예요. 다음 조건은 뭐죠?”
“바마를 알고 있나?”
순간 피에타의 몸이 멈칫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건가요?”
“이것도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알만한 사람들이 알 만큼은 모두 알고 있지.”
로우택틱에서 제조된 총기는 전 대륙에 유통된다.
반입이 금지된 20번대 안쪽에도 유통되며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대다수의 물량이 소화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검은 밀수꾼 바마.
블루서펜트의 간부인 만큼 그 정도의 유통망과 인맥은 지니고 있었다.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네요. 맞아요. 알고 있어요.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주기적으로 만나 계약을 갱신하죠.”
“다음 회합은 언제지?”
“한 달 뒤에요. 다만 제 차례가 아니에요.”
“순서는 상관없다. 그쪽이 회장이 되면 원하는 대로 지정할 수 있으니까. 돌아오는 회합에 나를 호위로 데려가라. 그게 두 번째 조건이다.”
‘이런 곳에서 바마와 엮일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미스릴로 만들어진 무기는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그 위력을 증폭시킨다.
단 한 자루라도 내 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 총이 생긴다면 바마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거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라. 위험 부담이 없다곤 말 못 하지만 일단 무사히 아버지의 자리를 넘겨받는 게 중요하겠죠. 계약해요. 맹약을 맺어요.”
“알고 있는 게 많군.”
“말했잖아요. 기사 학교에 다닌 적 있다고. 교양 과목으로 그 정도는 배워요.”
내 손바닥 위에서 검붉은 빛의 마나가 흘러나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계약 파기의 대가는 죽음으로.”
“상관없어요. 회장 자리에 못 오르면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똑같으니까요.”
서로가 계약의 내용을 선서하자, 반으로 갈라져 가슴에 스몄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은 이틀 뒤에요. 그 정도면 에반님도 몸이 안정될 테고 저도 다른 용병들을 추가로 고용할 시간이 되겠죠.”
“좋다.”
방을 나가기 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맨 얼굴, 지금 보여줄 수 있나요? 나중에 어차피 보게 될 텐데.”
가면을 내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짜 얼굴은 아니죠?”
“부정하진 않지.”
“마법사들은 자기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더라고요. 마법으로 다른 얼굴로 바꾸어 다니죠. 언젠가 진짜 얼굴을 봤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이틀 뒤에 봐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곧 입구 쪽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다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을 테니까. 난 당신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믿어요. 하지만.”
에스텔이 툴툴대며 말했다.
“난 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녀가 말한 것 중 거짓이 있었나?”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맹약까지 맺었으니 걱정할 일은 없겠죠. 그냥 인간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그녀는 어릴 적 슬럼에서 은인에게 거둬져 교단의 사제로 자랐다.
수습사제 대다수가 부유층의 자제들이었고 그녀는 출신 성분으로 많은 조롱과 차별을 당했다.
반감을 품은 것이 단순히 피에타가 안하무인 격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소파에 몸을 깊숙이 뉘었다.
‘로우택틱의 회장이라.’
천오백만 실링이라는 보수금도.
미스릴을 다룰 수 있는 기술자도.
바마를 덮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모두 피에타의 제안을 받아들인 진짜 이유라 볼 수는 없었다.
돈은 충분했으며 뒤의 두 가지 일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충분히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내가 고려했던 건 그녀가 회장 자리에 올랐을 시 생기게 될 연줄이었다.
나는 사람을 더 모을 생각이었다.
내가 목표를 이뤄 가는 데 도움을 줄 체스 말들을.
어쨌든 내가 죽여야 할 세 명의 간부는 블루서펜트 내에서도 무력이 강하기로 꼽힌다.
나 스스로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녀석들이 늘 부하들과 함께 다니는 만큼 나 홀로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테니까.
예측도 그러하였으며, 실제 열차에서 라이카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레드스컬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순간의 유효타를 노리지 못했을 것이다.
‘목표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이 필요하다.
조직이라 부르기까지엔 그 수가 미치지 못할 테지만, 내가 부릴 인원은 분명 늘어난다.
지시에 따라 여러 구역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할 테고, 그때 재계 거물과의 연줄은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그녀가 회장 자리에 오른다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자리에 올라 나와의 관계를 계속해 유지할지도.
단지 내 직감으로, 걸어볼 만한 승부수라 판단했을 뿐이다.
나는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에스텔. 네가 보기엔 내 직감이 어떤 것 같나?”
“직감이요? 모든 상황을 다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아요?”
다시 내 팔의 붕대를 풀던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확률을 철저히 따지잖아요. 직감이란 단어랑은 잘 안 어울려요. 당신.”
“네가 본 나는 그렇군.”
“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요. 웬만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 만나 보기도 했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방안엔 붕대가 슥삭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많은 환자를 돌본 경험답게 그녀의 손동작은 능숙했고 곧 붕대는 새것으로 바뀌었다.
작업을 끝낸 그녀가 말했다.
“치유마법도 결국 세포의 재생력을 가속하는 방식이라 계속 쓰다 보면 몸에 무리가 가요. 가벼운 상처들은 자연적으로 치유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하지.”
“오늘은 어떻게 할 거예요? 출발은 이틀 뒤인데, 방에서 쉴 건가요?”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