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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한 천재마법사-47화 (47/227)

#047. 경매 (5)

문은 점차 빠르게 닫혀 들었다.

긴급한 상황에도 녀석은 도주하지 않고 오히려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제! 이제 알겠어! 그 가증스러운 침착함과 비꼬는 말투! 내가 잘못 느꼈을 리 없지. 카인! 어떻게 교도소를 빠져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너를 다시 만날 줄이야!”

녀석이 가면을 벗어 던졌다.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한쪽 귀가 완전히 잘려 있었다.

“나다! 아이작 렉터! 설마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거리를 벌린 채 칼을 겨누고 있던 부하들이 물었다.

“카, 카인 말입니까? 그 블루서펜트의?”

“감옥에 있다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나는 정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침묵 뒤 말했다.

“아이작 렉터.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누군지 모르겠군.”

녀석이 순간 벙 쪘다. 그러다 분노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챙!

메이스가 공격을 튕겨냈다.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한 녀석이 보석함을 꺼내 부하에게 던지며 말했다.

“가라! 그 보석만으로도 이득은 충분해!”

“리, 리더는요?”

“난 여기서 이 개자식을 죽이고 간다.”

“그, 그래도….”

“가! 문이 닫히고 있다!”

지시를 받은 부하 두 녀석이 보석함을 챙겨 반쯤 닫혀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쫓아. 미스릴을 우선적으로 확보해. 죽여도 좋다. 나를 보호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껏 날뛸 수 있겠지.”

“괜찮겠어요?”

“나를 믿어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들을 쫓아 문 밖으로 사라졌다.

철컹.

곧 문이 완전히 닫히고 금고 안엔 아이작과 나 둘만이 남았다.

“나를 모른다고! 나는 너를 이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가면을 벗어라 카인!”

나는 가면을 벗어 변용마법을 쓰지 않은 원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래. 내가 틀릴 리 없지. 너의 사소한 몸짓, 목소리, 표정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겉으로 뱉은 말과 달리 나는 녀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능력이 떨어지진 않는다. 다만 흥분했을 때 판단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을 뿐.’

전투마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꽤 큰 성과를 올리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굴욕적인 자세로 귀를 잘리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아이작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 끝에 어질어질할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죽어!”

챙!

공방이 격렬하게 이어지며 책상이 넘어지고 지폐가 흩날렸다.

“난 한시도 너를 잊은 적 없어! 이를 갈며 힘을 길러왔지. 결국 간부 자리까지 올라왔고 말이야! 머리만 믿고 가만히 있던 너와는 달리!”

챙!

벽면에 검격으로 인한 흠집이 새겨지고 총에 맞은 전등은 깜빡거렸다.

빛과 어둠.

서로의 시야가 점멸했다.

“나를 죽인 다음엔 어쩔 거지? 문은 내부에서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챙!

“바깥엔 내 부하들이 깔려 있다. 지금쯤 학살이 벌어지고 있겠지. 다 죽이고 돈을 가져간다. 과정이 달라졌을 뿐 결과는 변하지 않아!”

“굉장히 낙관적이군.”

나는 공방을 주고받는 중에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촉을 세워 벽면에 내리쳤다.

콰득!

“이그니스에서 VIP들을 상대로 제공한 만년필이다. 촉이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면 이그니스 소속의 특급 용병들이 달려 오지.”

챙!

“그럴 리가 없다! 말재주로 정신을 흩트리는 짓이 네 특기였지!”

녀석의 얼굴에 순간 미세한 당혹감이 번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판단은 네 자유다. 다만 결과는 네가 책임져야겠지.”

녀석의 공격에 점점 빈틈이 생겨났다. 집중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개자식! 또 그런 거짓말 따위로!”

“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게 패한 적 있다면, 그 이유는 알 것 같군.”

챙!

“형편없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년 동안 준비한 작전이란 게 믿기지 않아. 큰손들이 이그니스를 이용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참가자 중 이미 만년필을 누른 이가 있을지 몰라. 아이작, 왜 이그니스의 동향은 주시하지 않았지?”

“닥쳐!”

공격은 점점 받아넘기기 쉬워지고 있었다.

“천천히 짚어 주지. 먼저 넌 금고 내부에 있는 스위치를 망각했다. 셋 중 한 명은 지배인을 마크했어야 하지.”

“닥치라고 했다!”

챙!

“둘째로 문이 닫히는 순간에 감정에 휘둘려 부하들만을 내보냈다. 분명 충분히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 입…!”

챙!

“셋째로 넌 상대가 나란 걸 알고도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다.”

탕!

난 뒤편의 현금 더미를 향해 총을 쏘았다.

궤적 상에 있던 지폐는 모두 찢겨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무슨…!”

녀석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공격을 크게 쳐냈다.

곧바로 또 다른 곳의 현금 더미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탕!

“어딜 쏘는 거지! 상대는 나다!”

녀석이 소리치며 다시 달려들었다.

“공격이 느려졌군. 돈이 신경 쓰이나?”

“개 같은 새끼가! 당장 멈추지 못해!”

“이미 자기 돈이 된 것처럼 말하는군.”

돈을 탐하다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버릇. 녀석은 아직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금고 내의 돈을 줄여나가는 동시 남은 마나를 모두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공세로 전환해 녀석을 몰아붙여 갔다.

‘무력은 부하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애초에 주력 전투원이 아니었으니.’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난 분명 강해졌다고!”

“강해진 게 너뿐이라고 생각하나?”

피스톨의 탄창 부분으로 녀석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녀석이 거리를 벌리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드득.

녀석이 이를 갈며 말했다.

곳곳의 현금 더미가 불에 타들어 가며 금고 안을 밝혔다.

“이렇게 된 이상 다 필요 없어. 이만큼 자원을 쏟아부었는데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라고. 하, 이러나저러나 난 죽은 목숨이야.”

녀석이 품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꺼내 쥐었다. 마석이었다.

“저승길 동무로 삼아주지. 어디 한 번 몸부림쳐 봐라.”

녀석이 마석을 모두 입안에 털어 넣더니 유리 조각을 씹듯 씹어 삼켰다.

탓.

녀석이 뛰어올랐다.

흉흉한 기세의 마나를 내뿜는 검이 나를 향해 내리쳐 왔다.

‘온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할 수 있는 속도와 각도가 아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치명상을 입을 상황이었다.

‘침착하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식의 행동도 예상범위 내에 있었으니.

나는 녀석을 향해 총구를 들었다.

무어라 작게 입술을 움직였고, 그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쐐액!

검은 아슬아슬하게 목을 비껴가 어깨를 깊이 베었다.

직후 내 총구는 떨어져 내리는 녀석의 이마에 닿았다.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나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바닥 위로 이마가 꿰뚫린 녀석의 시체가 떨어졌다.

나는 어깨를 움켜쥐고 벽에 미끄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마나 72 / 907 ]

적지 않은 양의 마나가 늘었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이 정도 양의 마나로는 온전히 치료할 수 없었다.

‘마석을 사용하면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품에 손을 넣어 마석을 꺼내려던 순간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마석은 되도록 쓰지 마세요. 그럴 상황이 생기지 않게 내가 최대한 노력할 테니까.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나.”

픽 웃으며 마석에서 손을 뗐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마석을 사용하면 회로에 손상이 가니, 부상을 치유하든 방치하든 몸이 상한다는 결론은 같지 않은가 하고.

나는 옷을 찢어 대강 지혈을 마친 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녀석은 결국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내가 뱉었던 문장은 그것이었다.

─명령이다. 네 손으로 귀를 베어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지.

과거에 뱉어졌던 말은 현재까지도 녀석의 무의식을 둥둥 떠돌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칼끝이 흔들렸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군.’

불길은 돈을 장작 삼아 조용히 타닥거렸다. 그 이상 범위로 번지지는 않았다.

은은히 전해져오는 온기에 눈꺼풀은 내려앉고 몸은 노곤해졌다.

거기에 마석의 후유증으로 몸은 강력하게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에스텔. 바깥 상황은 잘 헤쳐나가고 있겠지.’

평소라면 정신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내가 줄곧 가지고 있던 긴장감을 덜어냈다.

‘아주 조금. 조금만이라면.’

[‘카인 리베르’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현 동기화율 - 85.5%]

귓가에 울리는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수면 아래 의식을 가라앉혔다.

* * *

“…신원은 내가 보증한다니까요.”

“그래도 사제님. 저희도 확인해야 하는 절차라는 게 있어서….”

눈을 뜨자 불이 꺼진 금고 벽이 보였다. 주위엔 경매장 관계자들과 경찰이 몰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어디 있어요. 이 사람 아니었으면 돈은 다 도둑맞고 인질들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아주 화난 얼굴의 에스텔이 그들을 향해 씩씩대고 있었다.

흘끗 시선을 내렸다.

임시방편으로 감아 놓았던 옷은 깨끗한 붕대로 갈아져 있었다.

통증도 멎은 거로 보아 그녀가 치유마법을 사용한 듯 보였다.

가면 역시, 얼굴에 다시 씌워져 있었다.

“그래도 흑마법사라는 신고가 들어와서 저희도 일단 확인은 해 봐야….”

제복 차림의 경찰이 그녀 앞에서 쭈뼛거렸다.

전투 사제라는 신분은 확실히 경찰이라도 쉽게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부스럭.

기척을 내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마주했다.

“깼어요? 몸은요?”

“괜찮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두 시간 정도요. 바깥은 아직 정리 중이에요.”

그녀의 양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찰은 제가 최대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괜찮다.”

그녀의 곁을 지나 앞으로 나선 뒤,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치안국의 표식과 발급인의 이름에 더해 보유자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면 신분은 증명되겠지.”

모든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경찰을 상대로는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아, 예. 확인되었습니다. 혹시 저희가 불편함을 끼쳤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앞에 나서 있던 경찰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등을 돌려 다른 대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거리가 멀어지고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조사는 한번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멍청아. 발급자가 누군지 못 봤어? 청장님 딸이잖아. 치안국 부국장. 괜히 얽히지 마. 모가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에스텔이 당신이 그것을 왜 가지고 있느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난 무시했다.

“고맙네.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어. 대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지배인이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그는 아이작의 시체를 보며 부들부들 떨다 나를 보고 말했다.

“자리를 좀 바꾸지. 이렇게 서서 얘기할 일이 아닌 것 같네.”

금고 통로를 지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곳곳엔 시체가 나부라져 있었으며 경찰과 직원들이 난전이 벌어졌던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아직도 안 믿겨요. 1년 가까이 일했던 동료들이 레드스컬이었다니.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자고.

곳곳에서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응접실에 도착했다.

테이블에 앉아 지배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묻지 않겠네. 그게 이곳의 원칙이니까. 답례의 경우 내 재량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해 주겠네.”

그가 제시한 것은 어느 지점에서든 적용되는 VIP 권한이었다.

모든 경매에 우선적 참여.

평생 입회비 면제.

모든 시설 무료 이용 가능.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기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게. 지금 매장 꼴이 말이 아니라 정리가 되는 대로 카드를 만들어 주겠네.”

그밖에도 본사에 문의해 내게 줄 수 있는 보상이 더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순간 비틀거린 나를 에스텔이 부축했다.

“일단 좀 쉬어요. 치유마법을 쓰긴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그러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원래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며칠간 안정을 취했다.

촉매와 부상의 후유증으로 바로 떠날 몸 상태가 되지 못했다.

소파에 몸을 눕히고 신문을 보고 있을 때 에스텔이 방으로 들어왔다.

“경찰에서 찾아왔었어요. 레드스컬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해 표창을 주겠다고.”

“필요 없다고 전해라.”

“조금 그림이 웃기긴 해요. 범죄 조직 간부가 경찰에게 표창을 받는다니.”

그녀는 픽 웃고는 테이블 위에 붕대와 소독약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똑똑.

그때 방 너머 입구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만요. 다녀올게요.”

그녀가 사라지고 곧 방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여긴 왜 왔어요?

─ 그쪽한테는 관심 없어요. 안에 에반 님이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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