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경매 (4)
“약혼? 우리가 연인 관계로 보이나 봐요.”
에스텔이 호들갑 떨며 웃었다.
“말 나온 김에 할래요? 약혼? 난 당신 정도면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데.”
“그러지.”
“에, 농담인데.”
“나도 농담이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고양이 가면이 왜인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두 분이 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고 계셔서 약혼한 사이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제 소개부터 먼저 할게요. 로우택틱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는 피에타 네드비체에요.”
뒤이어 가면을 벗었다.
가면 뒷부분에 묶여 있던 붉은 머리가 어깨선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로우택틱.
대륙에 유통되는 총기의 삼 분의 일 이상을 생산하는 거대 기업.
회장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의 자식들이 회사 곳곳에 임원으로 자리 잡고 있단 얘기는 들은 적 있었다.
‘피에타. 막내딸의 이름이었던가. 아무리 많아야 이십 대 초반인데, 이 정도로 어릴 줄은 예상 못 했군.’
이곳에서 신분을 밝힌다는 건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였다.
남들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거나.
혹은 그만큼 자신의 지위에 자신이 있거나.
목소리와 표정, 몸짓에서 묻어나오는 자신감으로 보아 그녀는 둘 모두에 해당하는 걸로 보였다.
“…….”
그녀가 빤히 나를 보았다.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니 이쪽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라는 의미였다.
“에반.”
적당히 지어낸 가명만을 말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으니, 굳이 사람들과 더 엮일 필요는 없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무안할 법한 상황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에반 님이시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당신을 제 호위로 고용하고 싶어요. 계약은 지금 이 순간부터 지상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시선이 흘긋 누군가의 시체 쪽을 향했다.
“기사 출신에 용병으로도 활동한 경험이 많다더니 저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거든요. 밖에도 호위가 몇 명 있지만 영 못 미더워졌어요.”
그녀가 백지 수표를 꺼내 금액을 적었다.
“천만 실링.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쪽 의사만 있다면 전속 호위로 쭉 고용하고 싶네요.”
“그만한 돈이 있다면 왜 아까 경매에서 물러났지?”
“팔찌요? 그만한 값어치까진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돈이 많다고 과소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묘한 화법이었다.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고 얘기하면서도, 내게 제시한 돈은 과소비가 아니란 뜻을 은연중 전달하고 있었다.
“거절하지.”
“왜죠?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더 줄 수 있어요.”
돈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녀가 아무리 이사라 해도 개인으로서 유용 가능한 돈이 20억 실링에 가깝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 에스텔, 가지.”
“잠깐만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려던 나의 팔을 피에타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에스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행동을 취하려는 그녀에게 일단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중에라도 연락 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는 내가 받지 않았던 명함을 슈트의 앞 포켓의 꽂아 넣었다.
‘로우택틱이라.’
꺼내어 버릴까 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닿아 일단 보관키로 했다.
“생각해 보지.”
조금 거리가 떨어지자 에스텔이 말했다.
“사람이 뭔가 조금 재수 없네요. 사람 팔을 막 잡고.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부자들은 다 그런가.”
난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 후 경매장 안을 돌며 레드스컬의 시체에서 마나를 흡수했다.
“사, 사제와 흑마법사가 어떻게 한 자리에….”
그 행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수군거리며 눈치를 볼 뿐 감히 제지하려 드는 이는 없었다.
“…좀 강해진 게 느껴져요?”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거부감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는 듯 멀리 떨어져 있다 마나의 흡수가 끝난 뒤 돌아왔다.
“알다시피 난 회로를 구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보다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비난하는 게 아니에요. 난 그냥….”
“어쩔 수 없다는 것 안다.”
미안한 얼굴을 한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마나를 확인했다.
[회로 레벨: 2]
[마나: 223 / 842]
늘어난 마나의 총량은 192.
‘이걸로는 아직…. 더 빨리. 더 많이 강해져야 한다.’
전투마다 획득하는 마나의 양은 점점 늘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전투 중 마나를 바로바로 흡수할 여력이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마나의 최대량이 1000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마나는 상대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이나 죽음 직후 흡수할 때 가장 손실이 적으니까.
그 이후론 대기 중으로 분해되어 흩어지기에 흡수할 수 있는 양이 급감하였다.
“화났어요? 표정이 무서운데….”
“아무것도 아니다. 가지.”
나는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떼었다. 에스텔이 뒤를 따랐다.
우리가 다가가자 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갈라져 길을 열었다.
“우리도 이미 문을 열려고 시도해봤소. 꿈쩍도 안 하더군. 아마 밖에서 장치를 조작해야 열리는 것 같소.”
“밖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쪽이 실력자인 건 알겠지만 많이 지쳤잖아요. 일단 쉬면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천천히 문을 살폈다.
아다만티움 합금으로 만들어진 문.
거기에 잠금 마법이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중첩되어 있었다.
‘푸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자원은.’
나는 에스텔에게 말했다.
“뚫을 수 있겠나?”
“글쎄요. 된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두께가 보통이 아니에요.”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에서 몇 발짝 물러난 뒤 품에서 라이플을 꺼내 견착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이들이 황급히 문 근처에서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철컥.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고 문에선 연이은 폭발이 일어났다.
턱. 철컥.
탄창을 갈아 끼우고 다시.
턱. 철컥.
한 번 더.
발밑엔 빠른 속도로 빈 탄창과 탄피가 쌓여갔다.
사격이 끝났을 때, 문 중앙엔 사람 크기만 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가지.”
“화끈하네요.”
고개를 숙여 구멍을 지나던 중 나는 뒤를 보며 물었다.
“혹시 이곳에 옷을 갈아입을 곳이 있나?”
“아, 예, 예! 통로 안쪽에 직원이 쓰는 탈의실이 있긴 합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 중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고맙군.”
점점이 불이 켜진 통로를 따라 걸었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네요.”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진즉 나서서 싸웠을 거다.”
직원이 말했던 방을 발견해 문을 열었다. 안쪽엔 직원들이 쓰는 캐비닛 외에도 새 유니폼이 걸려 있는 행거가 있었다.
등을 돌리고 지체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바깥에도 적이 깔려 있을 수 있다.
곳곳이 찢어진 슈트를 입고 의심을 피하길 바랄 순 없었다.
부스럭거리는 옷 소리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흉터들. 교도소에서 봤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어떤 삶을 살아온 거예요?”
“…….”
“말해 주기 싫으면 안 해줘도 돼요.”
“슬럼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떤 일을 겪으며 자라났을지는 뻔한 일이지.”
그녀의 목소리에 놀람이 묻어났다.
“슬럼이요?”
“놀랄 게 뭐가 있지.”
“그냥… 몰락 귀족이나 명문가의 자제 정도로 생각했어요. 지식이나 화법이 일반인들이 흉내로 가능한 수준은 아니어서.”
“주워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먼저 나가지.”
밖으로 나가 문 옆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곧 흰 셔츠와 검은 조끼 차림의 그녀가 나타났다.
“마석은 되도록 쓰지 말아요. 그럴 상황이 생기지 않게 내가 최대한 노력할 테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군.”
다음으로 물품 보관실을 들렀다.
“아무것도 안 남아있네요. 쫓아갈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미스릴을 포함해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쓸려 있었다.
“조금 서두르지.”
구둣발 소리가 어둑한 통로를 울렸다.
출구의 빛은 점차 가까워져 곧 환한 복도가 나타났다.
지하 최하층의 좁은 복도.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위잉-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의 버튼을 눌렀다.
경매장에 있던 직원에게 금고실의 대략적인 위치는 들은 상태였다.
홀을 지나 대각선 끝, 총지배인의 사무실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준비됐나?”
“조금 떨리긴 하네요.”
띵-
환한 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경매장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래층에서 올라와 의심받을 수 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
“알았어요.”
식당 밖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음료 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지났다.
‘많이도 심어 놓았군. 어림잡아 다섯 명 중 하나꼴인가.’
한 번 인지하고 나자 곳곳에 직원으로 숨어 있는 레드스컬들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이제껏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리더가 금고를 탈취한 뒤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일 터였다.
“쟁반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쪽에 음료를 찾는 손님들이 있어서요.”
직원 하나가 다가와 쟁반에 손을 뻗었다.
소매 끝, 붉은 해골 문신의 윗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그가 고개를 슬쩍 들어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은밀한 동작으로 소매 끝을 걷어 마법으로 그려둔 해골 문신의 일부를 보였다.
그가 속삭였다.
“아래층은 어떤 상태지? 최하층이라 무전이 되지 않아.”
“기본적으로 문제는 없다. 인질 중에 생각보다 요인이 있고 리더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 나왔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비켜섰다. 그 뒤 한 쪽을 가리켰다.
“홀을 가로질러 11시 방향 끝으로 가. 지금쯤 한창 금고를 여는 작업 중일 거야.”
녀석이 길을 비켜서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쪽을 주시하던 의심의 눈초리들이 사라진 게 느껴졌다.
계속해 걸었다.
사람들은 최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시설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네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지배인의 사무실 문이 나타났다.
홀 외곽 복도 끝에 있어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끼익-
안쪽의 기척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피 냄새가 확 올라왔다.
사무실 내부엔 경비로 보이는 이들 몇 명의 시체가 나부라져 있었다.
“곳곳에 흔적이…. 엄청 치열했나 본데요.”
“금고를 지키는 인력이니 실력이 만만치 않았겠지.”
사무실 안쪽에 난 문을 열고 통로를 따라 걸었다.
“…열어…않으면.”
“기다려…게. 지, 지금….”
말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걸음에 속도를 더하고 장비를 꺼내 에스텔에게 건넸다.
팟.
통로가 끝나자 시야가 단번에 밝아졌다.
타일 바닥이 깔린 넓은 방.
벽 중앙엔 거대한 원형 금고문이 있었다.
‘리더와 부하 둘. 지배인. 경매장에서 나갔던 인원 그대로.’
인원이 추가되진 않았다.
그들은 금고 앞쪽에 모여 있었으며 주위론 현금 운송용 상자와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에스텔이 속삭였다.
“저 녀석들이 서류 가방 두 개를 나눠 들고 있잖아요. 보관실에 있던 귀중품은 모두 저기에 담았나 봐요.”
“그래. 우리가 찾는 물건도 저 둘 중 하나에 있겠지.”
끼이익-
그 순간 금고문이 열렸다.
내부는 또다시 별도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수북이 쌓인 현금 더미가 멀리서도 얼핏 눈에 들어왔다.
“리더. 감격스럽습니다. 무려 1년 동안 기다린 순간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떨어지는 몫도 상당하겠죠.”
“호들갑 떨지들 마라. 밖으로 무사히 가져나가기 전까지는 우리 돈이 아니니까.”
우리가 기척을 내며 모습을 드러내자 녀석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시선이 오가고, 리더가 말했다.
“오늘 지배인이 받을 저녁 보고는 분명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예. 분명 일정상으론 비어 있었습니다.”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들어 왔나. 뭐, 상관없지. 처리해.”
“예.”
부하 하나가 검을 바로 잡고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허공에 검선이 그어지는 순간 에스텔이 뒤에 감추고 있던 메이스를 꺼내 검을 쳐냈다.
챙!
녀석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튕겨 나가 원래 자리에 착지했다.
리더가 의외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 이제 보니 눈에 익은 놈들이 아니야. 직원들 대부분은 내가 기억하고 있지. 경매장을 빠져나왔나? 아니면 중간에 달라붙었을 가능성도 있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건 상관없다. 가방을 넘겨라.”
녀석이 킬킬거리자 부하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강도질한 물건을 다시 강도질하겠다는 건가?”
“원래 내 물건을 되찾는 일이다.”
“아, 낙찰받은 물건이 있나 보군. 근데 있잖아. 지금 당신이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래. 명령이니 따라라.”
마지막 문장에 리더가 움찔했다.
난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설정한 단역이기도 하며, 카인의 기억에도 있는 인물이었다.
아이작 렉터.
레드스컬의 조직원 중 하나로 과거 카인과 수많은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녀석 역시 두뇌파이나 단 한 번도 카인을 이긴 적은 없었다.
─그래. 명령이니 따라라.
카인이 녀석에게 굴욕을 줄 때 사용했던 문장. 녀석의 입장에선 절대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녀석의 몸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잠깐, 이제 보니 그 말투….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죽여!”
외침을 시작으로 격전이 벌어졌다.
총신으로 검을 쳐내고, 피하고, 틈을 노려 탄환을 쏘고.
“조심해요!”
챙─! 탕─!
3대2의 공방을 이어갔다.
자연스럽게 밀리고 밀려 금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 피할 곳이 점점 좁아지는데 이제 어쩔 거지!”
리더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돈 좋아하나?”
“뭐?”
위이이잉─!
그 순간 천장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등골이 쭈뼛 솟을 만큼 날카로운 소리였다.
“뭐, 뭐야!”
녀석들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자리엔 벽에 난 유리막을 부수고 안쪽의 스위치를 누르고 있는 지배인이 있었다.
“그쪽도 잘 알 텐데. 경보 스위치다. 지금쯤 전 층의 경비가 여기로 몰려들고 있겠지. 네 부하들은 그걸 막으려 할 텐데 큰 전투가 벌어지겠군.”
철컹.
그와 동시에 금고 안쪽의 이중문이 닫혀 갔다.
위에서 아래로.
꽤 빠른 속도로.
나는 물었다.
“이제 어쩔 테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