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경매 (2)
“조금 눈을 붙여 둬라. 4시간 뒤에 깨울 테니.”
80번 구역을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연료가 떨어지면 황야 중간에 멈춰 서 그 즉시 보충하고 끼니와 수면은 모두 차 안에서 해결했다.
그 결과 경매 시작 4시간 전에 80번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매장 입구는 구역 외곽에 작은 건물 형태로 나 있었다.
주위로는 이미 온갖 고급 차량들이 열을 맞추어 주차되어 있었다.
“대부분 검은색이긴 하네요. 자기가 누군지 드러내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차를 타고 오겠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주차를 맡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 전 이곳에서 가면을 골라 써주시기 바랍니다. 받으신 번호표는 가슴 오른편에 부착해 주시면 됩니다.”
57A와 57B.
번호표를 정장과 드레스 가슴에 단 뒤 온갖 종류의 가면이 걸려 있는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가면으로 할 거예요?”
“이걸로 하지.”
나는 무난한 디자인의 흰색 유령 가면을, 그녀는 여우 가면을 골랐다.
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향했다.
띵-
문이 열리자 지하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 데스크엔 절도 있는 복식의 직원들이 서 있었고 양측으로 뻗은 복도엔 넓은 간격으로 객실 문이 나 있었다.
다른 복도나 계단은 수영장이나 레스토랑, 카지노 등의 시설과 이어졌다.
“모든 시설의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되오니 체류하시는 동안 모쪼록 편히 지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객실의 카드키를 받아 짐을 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런 데 처음 와 보긴 하는데, 휴양시설이나 다름없네요. 방도 웬만한 호텔의 디럭스 룸 수준이고.”
휴양 시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 번 입장하면 퇴실할 때까지는 별다른 기간 제한 없이 모든 시설을 즐길 수 있다.
때문에 고가의 입회비를 내고 휴양 개념으로 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곳을 만들고 또 유지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겠죠?”
“기업 한둘이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니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 넘을 거다.”
높이 거슬러 올라가면 황실 정부나 경찰청 쪽의 고위 인사가 나오기도 하니까.
“경매 시작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즐기다 들어가도록 하지.”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동일한 드레스 코드의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스며들었다.
직원들 역시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 지하는 어딘지 파티회장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고, 카지노에 입장했다.
“나한테 투자해 볼 생각 없어요? 내가 확실하게 불려줄 수 있는데.”
“…슬롯문양은 무작위다. 동체 시력으로 때려 맞추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아.”
내 쪽은 시설을 즐기기보다는 내부 구조를 파악해 두려는 목적이 컸다.
만일을 위해서였다.
큰돈이 모이는 만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은 곳이니까.
‘…무언가 이상하다.’
시설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직원들이 바삐 돌아다닌다.
곳곳에 배치된 경비들은 무전을 주고받으며 매섭게 눈을 빛내고 있다.
겉보기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 사이,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탁.
다른 생각을 하던 중 한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쟁반에 들려 있던 내 칩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군요.”
“…괜찮다.”
허리를 굽혀 함께 칩을 주웠다.
마지막 칩을 그가 주워 내게 건네주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허리를 펴 그를 보았다.
중간 관리자쯤 되는지 직위를 표시하는 별이 3개였고 가면은 산양 가면을 쓰고 있었다.
‘…….’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체격도, 머리 색도, 목소리 톤도 아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이것 봐요! 다 내가 땄어요!”
그녀의 쟁반 위엔 어마어마한 양의 칩이 쌓여 있었다.
방금 그녀가 앉아 있던 슬롯머신 자리엔 잭팟이 터져 있었다.
“…….”
“이 칩은 내가 환전해서 마음대로 써도 되죠?”
“…그래.”
그녀의 운을 따로 높게 설정한 적은 없었다. 이번은 그녀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보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 경매 시작이 가까워져 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최하층으로 향했다.
“이곳부터는 사전에 예약하신 분만 입장 가능합니다.”
이전 지점에서 발급받았던 패와 함께 가슴의 번호표를 보여 주었다.
몇 개의 이중문을 지나 경매장 안으로 진입했다.
“생긴 게 오페라 극장 같네요. 크기가 조금 작긴 하지만.”
“가본 적 있나?”
“사람 무시하기는. 자주 갔었어요. 예전 꿈 중 하나가 노래 부르는 사람이었거든요.”
좌석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아래엔 경매 품목이 올라오는 단이 있었다.
“이전에 경매에 참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
“그러면 안내는 생략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소형 마이크를 받아 셔츠 칼라에 단 뒤 가장 높은 좌석에 올라가 앉았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해 만석이 되었다.
떠드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1층의 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텔이 속삭였다.
“…긴장되네요. 미스릴은 경매 후반에 나온다던데. 얼마까지 생각 중이에요?”
“동일한 매물이 2달 전에 9천만 실링에 낙찰되었다. 변수를 감안하면 1억 실링 정도는 써야겠지.”
사실 실제로 1억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번 경매의 메인 경매품은 따로 존재하며 큰손 대부분은 그것이 목적일 테니.
깃털로 장식된 가면을 쓴 남자가 단 위로 올라와 마이크를 들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경매의 진행을 맡은 데이런이라고 합니다. 먼 길 와 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가 허리를 숙여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산양 가면.
밖에서 부딪혔던 그였다.
작은 박수갈채가 지나고 경매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200만.”
“200만 나왔습니다. 그 이상 없으십니까?”
“320!”
“320만! 5초 세도록 하겠습니다!”
경매는 크고 작은 미술품에서 시작해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마탑에서 제작된 희귀품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150만!”
“180만.”
“230만!”
“270만! 더 이상 없다면 낙찰하도록 하겠습니다!”
품목들이 가격대는 점차 높아져갔다.
재력가들이 모인만큼 호가 역시 껑충껑충 뛰었고, 분위기는 점차 열띠어갔다.
“이번 품목은 75번 구역 외곽에서 출토된 팔찌입니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이렇게 마나를 주입하면….”
지잉.
작은 울림과 함께 진행자 바로 앞에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막이 생겨났다.
보조자가 나타나 그 앞에 총을 쏘고 검을 휘둘렀지만 막은 깨지지 않았다.
“마법사가 직접 쓰는 것만은 못하지만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충분히 강력한 방어막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마탑의 검증이 끝난 제품이며 기준이 되는 마나 양에 따라 200회 정도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호가 100만 실링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00만. 130만. 160만. 250만.
호가는 순식간에 높아져 갔다.
“300만!”
외침은 내 옆자리에서 들려왔다.
에스텔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는 아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 팔찌가 욕심 나나보군.’
카지노에서 그녀에게 주었던 10만 실링은 슬롯머신이 터져 500만 실링까지 불어났다.
경쟁이 심하게 붙지 않는다면 저 정도의 팔찌는 충분히 낙찰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310만.”
반대편에서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315만.”
“320만!”
“330만.”
“340만.”
“…350만.”
“370만.”
“400만.”
묘한 기류가 흘렀다.
호가가 높아질 때마다 고양이 가면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다른 참가자들이 어느새 빠져,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되어 있었다.
“410만.”
“420만.”
410만 실링을 불렀지만 이번에도 여지는 없었다.
에스텔이 상대를 쏘아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500만.”
“510만.”
10만 실링 단위로 높아지던 낙찰가는 결국 500만 실링을 넘겼다.
상대가 510만 실링을 부른 순간 그녀는 망연자실해졌다.
“510만! 더 이상 호가가 나오지 않으면 42번분께 낙찰하겠습니다! 5초를 세겠습니다!”
상대의 입꼬리는 의기양양하게 올라가 있었다.
“5!”
“4!”
“3!”
“2!”
초가 줄어들수록 에스텔과 상대의 표정 차는 극명해져 갔다.
“1!”
“600만.”
장내가 순간 술렁였다.
에스텔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6, 600만 실링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상대가 이를 악물고 다음 호가를 불렀다.
“…610만.”
“700만.”
나를 쏘아보는 고양이 가면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호가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결국 팔찌는 내게 낙찰되었다.
“…고마워요.”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말을 해라.”
뒤에 나올 물건들에 비하면 아이들 싸움이나 다음 없는 금액이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또한 그녀의 전력 상승은 곧 나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지니 나쁘진 않은 선택이었다.
경매는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다다랐다. 금액 역시 높아져 호가는 이제 최소 천만부터 시작되었다.
“9천 8백만! 57번분께 낙찰되었습니다!”
예상대로, 미스릴 원석은 경쟁자가 많진 않았다.
몇 번의 공방 끝에 어렵지 않게 낙찰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기다리고 계셨을 대망의 그 물건입니다.”
좌중 모두가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딱!
진행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안쪽 통로에서 보조인이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타났다.
열쇠를 돌리고, 안쪽의 잠금장치까지 해제하자 영롱한 빛을 발하는 푸른색 보석이 나타났다.
그 순간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남은 파편을 모아 만들었다는 탄자나이트입니다. 제대로 된 세공품은 대륙에 단 3개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중 하나는 8년 전 메디나 공작가가 몰락하며 사라졌다고 알려진 상태입니다.”
곳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내에 긴장감이 팽팽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들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저희가 이미 진품 감정을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진행자의 대사와 손동작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둘러 경매를 진행해야겠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보여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갑자기?
─뭔가 준비한 게 있나 본데.
장내에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나는 에스텔에게 속삭였다.
“마나를 끌어 올려. 만일을 대비해라.”
“네? 뭐를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녀는 일단 내 지시에 따랐다.
진행자는 경매 시작 때부터 바닥에 놓여 있던 다른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나는 녀석의 정체를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이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도 역시.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상자가 열렸다.
안엔 붉은 해골 가면이 들어 있었다.
“제가 보석을 밖으로 무사히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나?
─느낌이 좀 이상한데. 갑자기 왜 저래.
─잠깐만, 해골?
녀석이 산양 가면을 해골 가면으로 완전히 바꾸어 썼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상황을 눈치챈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딱.
녀석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경매장 내부로 통하는 모든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폐쇄되었다.
푹.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단으로 향했다.
“……!”
보석함을 든 보조인의 가슴은 어느새 단도에 깊숙이 찔려 있었다.
보조인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바닥에 쓰러지고, 녀석이 허공에 뜬 보석함을 낚아채 품에 넣었다.
“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경비원 반수가 칼을 꺼내 근처 자신의 짝을 찔렀다.
“끄윽!”
“가, 갑자기 무슨…!”
그리고 자신들의 리더와 마찬가지로 품에서 꺼낸 해골로 가면을 바꾸어 썼다.
곧 여기저기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셋이었다.
“열어! 열라고!”
“비키게!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부터 나가야 한단 말일세!”
공황에 빠져 몸싸움을 하며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거나.
“범죄자 새끼들이 주제를 모르고!”
맨손, 혹은 어떻게든 검사를 피해 몰래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꺼내 난전에 뛰어들거나.
“어떻게 할 거예요?”
혹은 우리처럼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거나.
“우리가 값을 치른 물건부터 찾아야겠지.”
싸움 중 밀려 날아온 누군가를 방호 마법으로 쳐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