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경매 (1)
삑─
지점장은 기계의 패널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고 말했다.
“예. 이상 없습니다.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그리고는 기계에서 카드를 빼고는 패널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정지를 해제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지점장은 카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두꺼운 문이 닫히고, 나는 패널에 뜬 숫자를 응시했다.
C: 1,891,818,090
우즈가 숨긴 돈은 총 20억 실링.
2억은 현찰, 18억은 예치금이었다.
현찰 중 1억은 묘지의 흑마법사가 사용했으며, 나머지 1억은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었다.
원금 자체가 거대하니 5년간 이자만으로 약 1억 실링에 가까운 금액이 붙었다.
‘어차피 금세 줄어들 액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자만으로 평생 호화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내겐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복수를 위해 아낌없이 뿌려야 할 자금일 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발급일이 5년 전인 카드라 센서를 신식으로 갈았습니다. 저희와 협약이 된 구역이라면 대륙 어디에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십여 분 시간이 지나고 지점장이 돌아왔다. 그는 카드와 함께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VIP분들에게만 지급해 드리는 저희의 선물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제도를 시행했지요.”
상자를 열자 금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만년필이 나타났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물건입니다. 혹 위험한 상황에 처하시면, 촉을 가장 안쪽까지 밀어 넣으시면 됩니다.”
“마법이 새겨져 있군. 특정 파장의 마나가 발산되고, 가장 가까운 지점의 병력들이 구하러 온다. 대충 이런 말인가?”
“예. 맞습니다. 정확하십니다. 대부분 고객님들이 자체적으로 호위를 대동하고 다니시지만, 또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마나를 흘려 한 차례 검사를 마친 뒤, 상자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챙겨 두어 나쁠 것은 없겠지. 이그니스의 사설 병력도 쉽게 무시할 수준은 아니니.’
지점장은 그 밖에 VIP가 받을 수 있는 자잘한 혜택과 특권을 안내했다.
대화를 마치고 지점장의 방을 나서 복도를 돌아 나갔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네요.”
에스텔이 곧장 옆으로 따라붙었다.
눈치를 보아, 아직 경호원들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럼 또 방문해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등 뒤로 지점장과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배웅했다.
은행의 출입구를 지나고 그녀가 말했다.
“경비원들 수준이 하나하나 상급기사 정도는 되어 보였어요. 고용비용이 어마어마할 텐데. 자금 규모가 워낙 커 황실 정부에서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한다더니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네요.”
“이곳에 와 본 건 처음인가?”
“그렇죠. 얘기만 들어 봤어요. 일반인들은 보통 방문할 일이 없으니까. 범죄자들과 연관되어 위험하다는 인식도 있고요.”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개 비자금을 숨기려는 정부의 고위인사들이나 범죄계의 거물들이 주 고객층이니까.
차를 세워둔 골목 안쪽으로 가던 중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누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기척이 느껴져요.”
“알고 있다. 일단 걷지.”
상대의 움직임은 그리 정교한 편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골목 앞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 방금 은행에서 나왔지. 가진 것 모두 내놓고 사라져!”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남루한 차림에 몸은 삐쩍 말라 있었고, 손에 든 총은 우리를 향해 겨눠져 있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그리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한 명의 소년이 아니라 다수의 성인이 나타났을지라도 그랬겠지만.
나는 소년을 향해 걸음을 뗐다.
놀란 에스텔이 순간 손을 뻗었지만, 이내 잠자코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돈이 필요한가?”
“오, 오지 마! 총 든 거 안 보여?”
소년의 손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떨리고 있었다.
‘어리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겠지.’
잔뼈가 굵은 놈들은 이그니스의 고객을 절대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상대가 실력자인 경우가 많고, 대개 정부 고위층이나 범죄 조직에 닿아 있다.
어설프게 강도질을 하려는 순간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
“쏜다! 지, 진짜 쏠 거야!”
거리가 좁혀질수록 소년의 얼굴은 울 것만 같이 변해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내가 총 위쪽을 움켜쥐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우, 우으….”
“그런 각오로는 동전 한 푼 빼앗지 못한다.”
나는 소년이 쥔 총을 움직여 내 심장을 겨눴다.
“상대가 첫 경고를 무시한 순간 쏘았어야 할 거다. 이곳을 이렇게 말이다.”
“우, 우… 자, 잠깐… 잠깐만…요.”
소년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손을 빼려 했지만, 힘에서 차이가 났다.
“자, 자 잠깐만요. 제발, 제,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나는 애원을 무시하고 소년의 손가락을 밀어 그대로 방아쇠를 눌렀다.
탕!
털썩.
소년이 주저앉았다.
바지 사이 소변이 지려져 있었다.
높은 출력의 방호를 걸어 놓아 약간의 욱신거림만 있을 뿐 가슴은 멀쩡했다.
허리를 숙여 지폐 몇 장을 소년의 손에 쥐여 주고 몸을 돌렸다.
“가지.”
소년이 있던 곳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에스텔이 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냥 겁만 주어서 쫓아냈어도 될 텐데.”
“…….”
“돈을 줘도 근본적인 건 변하지 않아요. 며칠 못 버티고 다시 굶기 시작할걸요.”
크게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귀찮게 할 기세였다.
“어중간한 각오로 이쪽에 발을 디뎠다간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이라도 허기를 달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돌아보자 조금 놀랐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음.”
“뭐지?”
“그냥요. 저번도 그렇고 생각했던 이미지와 달라서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시 내 옆에 따라붙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고급브랜드의 의류점이었다.
“진짜 원하는 만큼 골라도 돼요?”
“그래. 경매장에 입장하는 데도 드레스 코드가 있으니.”
바깥 번호 대의 구역 곳곳엔 ‘제로플로’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경매장이 존재했다.
참여자의 신분이 비밀로 유지되는 익명 경매로 대륙의 희귀한 매물은 모두 이곳으로 흘러든다고 보면 되었다.
다만 재력을 증명해야 하기에 누구나 쉬이 참가할 수는 없었다.
“진짜 나 다 골라요? 막 담는다고요?”
처음엔 쭈뼛거리던 그녀는 매장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드레스나 구두 따위를 들고 피팅룸과 매장 사이를 바삐 돌아다녔다.
“이거 봐요. 잘 어울려요?”
“그래.”
“이 옷이 색감이 더 낫죠?”
“그래.”
“생각해보니 이 구두와는 디자인이 잘 안 어우러지는 것 같아요.”
“그래.”
“굽은 적당한 게 좋아요. 내가 원래 다리가 길어서 굽까지 높으면 비율이 깨지거든요.”
“그래.”
매장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문 너머, 그녀를 흘긋 보았다.
‘즐거워 보이는군.’
낙천성과 쾌활함, 긍정.
그것이 그녀의 본래 성격이다.
삶의 불확실성과 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한 무기력함에 젖어 살아왔을 뿐.
‘조력자들은 주인공을 만난 뒤 원래 자신의 색을 되찾아가니, 그 과정이 앞당겨진 거라 봐도 좋겠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손에 양복 한 벌을 건 직원이 다가왔다.
“워낙 치수를 꼼꼼하게 말씀해 주셔서 찾는 데 조금 오래 걸렸네요. 한 번 입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옷을 건네받아 피팅룸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과하지 않은 디자인의 깔끔한 슈트였다.
‘망토는 재킷 안쪽에 걸쳐 갈무리하면 되겠군.’
가장 좋은 방법은 아공간의 출입 좌표 자체를 망토에서 분리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수식에 잠금이 걸려 있어, 아직 그것을 푸는 데 시간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다 골랐어요.”
쇼핑백을 양손에 든 그녀가 멀리서 다가왔다.
검은색 이브닝드레스 차림이었다.
직원이 세팅해 주었는지 평소의 긴 금발은 틀어 올려져 있었고, 드레스의 색과 대비되어 가히 ‘눈부시다’라는 말이 떠오르게 했다.
매장 안의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쪽에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계산만 하면 되….”
그녀는 나를 보고 말을 멈췄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오’했다.
“내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거 같네요.”
“…그보다 그 옷들은 모두 어디에 보관하려 그러지.”
“트렁크 있잖아요.”
언제 어느 장소에 출입하게 될지 모르니 미리 여러 코드의 옷을 사두겠다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차를 몰았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제이플로’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빌딩이었다.
붉게 깔린 카펫.
양측 벽에 전시된 고가의 미술품.
광이 나는 대리석 바닥.
입장객을 주눅 들게 만들어 쉬이 발을 딛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첫 방문이십니까?”
“전에 이용한 적이 있다. 찾는 매물이 있어 왔는데.”
접수원의 시선이 우리의 복장 위아래를 훑었다.
외부에서 굳이 이목을 끌 필요가 없기에, 평상복으로 다시 갈아입은 채였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주최하는 경매에 참여하시기 위해선 그때마다 입회비와 별도로 자격 증명이 필요합니다. 그 요건으로는….”
말없이 블랙카드를 꺼내 보이자 접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쪽엔 몇 개의 방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로 안내받아 커다란 모니터가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용하신 적이 있다 하시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떤 매물을 찾고 계신지요?”
“미스릴. 원석 상태 그대로일수록, 크기가 클수록 좋다.”
접수원이 모니터 밑 패널의 몇몇 버튼을 조작하자 매물 목록이 출력되었다.
[미스릴, 원석, 6.22킬로그램]
남은 시간: 2일 3시간 5분 58초
경매장: 80번 구역
다른 매물도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경매 일시가 최소 한 달 이후, 장소도 꽤 떨어진 곳으로 잡혀 있었다.
시세 유지와 매물의 이동 간 탈취 가능성 등을 고려한 복합적인 결과였다.
‘6.22킬로그램. 낭비 없이 제작한다면 피스톨 두 정 정도 가능하겠군.’
“가장 가까운 일시로 하지.”
“알겠습니다.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접수원은 패널을 이용해 뭔가를 입력하고 57이란 숫자가 쓰인 패를 건네주었다.
“최대 100명의 입찰인이 참여하며, 경매장 내부에 입장 가능한 동행은 입찰인당 1명까지입니다. 경매장 내 혼잡을 막고 빠른 진행을 하기 위함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로플로 사의 경매장은 대개 지하에 건설되어 있다.
땅 아래, 경매가 이루어지는 ‘안’과 편의시설 및 숙박 시설이 존재하는 ‘밖’으로 나뉘어 있다.
호위를 대거 대동했다면 모두 ‘밖’에 대기시키라는 이야기다.
너도나도 병력을 이끌고 입장한다면 분위기가 볼만해질 테니.
“시간 늦지 않게 입장해 주시면 되며 변동 있을 시 언제든 지점을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입회비를 결제하고 건물을 나와 적당한 식당 테라스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시간에 맞추려면 바로 출발해야 하지 않겠어요?”
80번 구역.
경매가 시작되기까진 이틀 남짓.
크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썩 여유롭진 않았다.
“식사가 끝나면 바로 출발하지. 괜찮겠나?”
“뭐 물어볼 게 있겠어요. 전 당신 의견에 따르는 거죠.”
나는 웨이터를 불러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그리고 연료와 휴대용 식량 등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 건넸다.
“내가 시간이 없어 부탁하지.”
“…….”
빌지에 고액지폐 한 장을 끼워 넣자, 멀뚱히 서 있던 그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물건 목록과 빌지를 챙겨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곧 웨이터들이 서로 심부름을 다녀오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