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치료 (2)
“아, 그리고. 우리 맹약 맺어요.”
「맹약」
언령 마법의 한 종류.
상호 간에 계약을 맺고 그에 위반 되는 행위를 할 시 사전에 협의된 처벌을 받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런 것도 알고 있나.”
“수도에서 생활한 게 몇 년인데요. 마법사들도 많이 만나봤어요. 기본적인 건 다 알죠.”
“난 너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초조와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분명 내 말이 진심임을 알 텐데.’
때론 그런 것들이 있다.
머리로는 확신을 가져도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것들.
두려운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지.”
손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그녀와 나 사이 기하학적 형태의 작은 진을 그렸다.
“카인 리베르. 상대 계약자의 마병을 치료하는 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협조한다. 단 외부 요인에 의한 불가피한 상황은 제외한다. 이 정도면 되었나?”
“좋아요. 에스텔 엘류이드. 상대 계약자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한다. 만료일은 마병이 완전히 치료되는 날. 외부 요인에 의한 불가피한 경우는 제외한다.”
“복종까지는 필요 없다.”
“난 당신을 믿어요. 그만큼 당신도 날 믿어 달라는 뜻이에요.”
“…뜻이 그러하다면. 처벌은 죽음으로. 이 정도면 불만 없겠지.”
“원하던 바에요.”
우웅-
마법진이 회전을 시작했다.
색이 점차 진해지다 임계점에 달했을 때 반으로 갈라졌다.
두 개의 반원은 허공을 지나 각자의 가슴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계약을 위반하면 심장이 멈추는 거죠?”
“단번에 멈추지는 않는다. 위반 정도가 강할수록 처벌도 강해지겠지. 그러니 혹시라도 시험해 볼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장난 안 쳐요. 내가 어린애인 줄 아나. 알아둬요. 난 당신에게 모든 걸 다 걸었다는 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눈 끝엔 옅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까지 본 그녀 중, 가장 안도감에 젖은 얼굴이었다.
* * *
구역 외곽의 입구.
나는 스포츠카의 견인 고리에 바이크를 연결해 단단히 고정했다.
“운전은 교대로 할까요?
“아니. 너 홀로 다 한다.”
“네? 다음 구역까지 거리가 만만치 않아요. 돌아가면서 하는 게 낫죠.”
“명령에 복종해라.”
“…이런 거에 써먹기 있어요?”
그녀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어차피 그녀 수준의 마나유저는 쉽게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잘 가게. 자네가 걷는 길에 빛이 비치길 빌겠네.”
프로이드가 배웅을 나와 있었다.
레니는 보이지 않았다.
납치 이후 밖으로 나오는 데 아직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대신 프로이드는 레니가 쓴 쪽지를 전해 주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삐뚤빼뚤 쓴 글씨였다.
쪽지를 품속에 넣은 뒤 물었다.
“당신 출발은 언제지?”
“모레쯤이 될 것 같네. 일단 호위를 구해야지. 오는 길엔 문제가 없었지만 가는 길은 또 다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네.”
클랙필드의 위치는 55번 구역.
이동 경로가 겹치지 않아 내가 직접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천천히 모아볼 생각이네. 허허.”
나는 품에서 현금 뭉치를 몇 덩이 꺼내 그에게 건넸다.
레니가 가지고 있을 병의 치료제 가격과 정확히 일치하는 액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프로이드 당신을 고용하고 싶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에스텔 역시도.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나를 위해 일해 주었으면 한다. 업무 시작일은 3개월 뒤. 아니 그 전이 될 수도 있겠군. 내가 55번 구역으로 찾아가지.”
“일이라고?”
“하던 일 있지 않나. 부상자의 치료와 내 인공 힘줄의 점검 정도가 되겠군.”
세력을 늘린다는 것은 관리해야 하는 인원이 그만큼 많아짐을 뜻한다.
지속적으로 부상자가 나올 테고, 나와 에스텔만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을 터였다.
‘3개월. 그쯤이면 어느 정도 세력의 토대는 잡혀 있겠지.’
프로이드만한 실력자는 쉽게 구하기 힘드니 미리 포섭해 두어 나쁠 것은 없었다.
“그대로 써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돈이다.”
“…자네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알아들었네. 감이 잡히는군.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이드의 시선은 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과 갈등에 빠져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다 폐기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리라.
“알겠네.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지. 클랙필드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겠네.”
그가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물 고인 얼굴을 한 채 한참 만지작거리다 가방에 넣었다.
“전망대 꼭대기 층의 바텐더를 찾아.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호위와 약을 구하는 일을 책임지고 도와줄 거다.”
“고맙네… 정말. 내가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는 내 손을 꾹 붙잡고 한참 놓지 않았다.
몇 분여 뒤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시가지 쪽으로 사라졌다.
탁.
옆자리에 올라타자 에스텔이 말했다.
“뭘 믿고 그렇게 큰돈을 줬어요? 아니, 그보다 그만한 금액을 현찰로 들고 다녀요?”
“에스텔.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했지.”
“그랬죠.”
“나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투자를 한 셈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저 사람이 돈을 들고 도망치면요? 나라면 맹약이라도 맺었을 거예요.”
나는 시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먼저 신뢰를 보여주는 게 상대의 신뢰를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사람 이렇게 돌려 까네. 지금 나 먹이는 거죠?”
“좋을 대로 생각해.”
나는 눈을 감았다.
차의 시동이 걸리고, 곧 얼굴에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당신의 할 일이라는 게 뭔지 공유해 줘도 되지 않아요? 서로 배신할 일은 없어졌으니까.”
“안쪽 구역에서 유명한 범죄 조직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나?”
“알 만큼은 알고 있죠. 당신과 만난 뒤로 많이 조사해 봤거든요. 당신에 대해서도, 얽혀 있는 조직들에 대해서도요.”
차체가 흔들렸다.
살짝 눈을 뜨자 도로에 떨어진 바위를 피해 그녀가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특히 당신을 조사하면서 많이 놀랐어요. 전설적인 일화들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일단 일반인의 몸으로 간부 자리에 오른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
“말해 봐요.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왔던 거예요? 아니면 교도소 안에서 마법사가 된 건가요?”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캐물을 기세였다.
“후자다.”
“불가능해요. 성인 이후로 회로를 만드는 건 분명…. 하지만 동시에 가능하겠죠. 당신이니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절박해지는 법이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너도 죽이고 싶은 이가 있지 않나?”
그녀가 순간 움찔했다.
“…한 명 있긴 하죠. 어쨌든 당신의 목표가 그건가요? 복수? 대외적으론 당신이 조직의 보스를 배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호사가들은 배신당한 사람은 당신이라 하던걸요. 다른 간부들에게 배신당해서요.”
“조사를 꽤 많이 했군.”
“돈 좀 많이 썼어요. 대출금에 더해 퇴직금도 당겨 받았죠.”
“노후 대비할 생각은 없군 그래.”
“농담은.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어쨌든 그래서, 그 간부들을 잡는 게 목표라 생각하면 되는 거죠?”
“그래.”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뿌옇게 인 흙먼지. 메마른 바람.
그 너머 끝없이 펼쳐진 황야.
“나를 배신한 이들을 모두 죽인다.”
건조한 목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그리고 조직을 붕괴시킨다.”
“…….”
내 쪽의 백미러를 곁눈질하던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 당신 얼굴 엄청 무서웠던 거 알아요?”
“…….”
“어쨌든 알았어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그 일이 선행되어야 내 병도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말은 옳았다.
정확히 말하면, 마병의 치료는 내 복수를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었다.
‘블루서펜트의 주 활동지는 30번대부터 50번대까지.’
간부들은 그중 한 구역씩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고 있다.
제이나의 31번 구역.
라이카의 33번 구역.
본래 내 구역이었던 34번 구역.
바마의 43번 구역.
파르테르의 47번 구역.
마병의 치료는 33번 구역의 특정 사물을 부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물을 부수는 데 라이카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
나는 운전을 하고 있는 에스텔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말해 줄 필요 없겠지. 그 사물이 무엇인지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녀는 깊은 혼란에 빠질 테니까.
그건 그때가 되어서 그녀가 견뎌야 할 몫이었다.
* * *
“아으으.”
긴 운전을 끝낸 에스텔이 핸들에서 손을 떼고 한 차례 몸을 풀었다.
우리는 82번 구역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무기를 먼저 구한다고 했죠? 마나를 버티지 못하고 총이 자꾸 부서지니까.”
“정확히는 재료를 구하고 그다음 기술자를 찾는다.”
이동 중간 휴식을 취할 때 마탄의 시연을 이미 마친 상태였다.
사격 한 번에 가루가 된 바위를 보며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걸 수십 발 연달아 맞으면 나라도 멀쩡하지 못할 거예요. 물론 온전히 다 맞는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긴 하지만.」
메이스로 쳐내 볼 테니 자신을 향해 한번 쏴 보라는 그녀의 말은 무시했다.
일단 안쪽으로 차를 몰아 중심가의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방 두 개를 잡고 다시 밖으로 나와 거리로 향했다.
“미스릴로 만들겠다고요? 조금 섞는 것도 아니고 순도 백 퍼센트로?”
“그래.”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 물건은 대주교님 봉밖에 본 적이 없는데.”
미스릴은 채광지가 없어 획득 경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옛 마도제국의 유물을 녹여 소량 채취하거나, 혹은 유적지에서 원석을 발견하거나.
두 경우 모두 난이도가 높기에 부르는 게 값이며, 이는 많은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유적에 진입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가진 유물들은 이미 옛날에 감정받아봤죠. 꽝이에요. 그냥 오리하르콘 합금 덩어리에요.”
당장은 그리 많은 양이 필요하진 않았다.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피스톨 한 정만 제작해도 전력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일단 은행부터 들르지.”
“알았어요.”
이그니스의 지점은 구역 중 가장 부유하고 번화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부유와 번화함이라고 해 봐야 어디까지나 다른 거리와 비교했을 때긴 하지만.
위잉-
입구를 지나자 거대한 체격을 가진 경비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총이 아닌 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데서 마나유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비어 있는 창구 중 하나로 다가가 앉았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카드에 걸린 정지를 해제하러 왔다.”
카드를 내밀자 접수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가장 높은 등급의 카드이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점장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뒤 정장 차림을 한 노련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나타났다.
“귀한 분이 오셨군요. 93번 구역의 지점장입니다. 안쪽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의 복도로 안내받았다.
배치된 경비들이 뒤따라오던 에스텔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카드 소유자 한 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내가 눈짓을 하자 얌전히 근처의 벽에 다가가 기대어 섰다.
“넓은 양해 감사드립니다.”
굽이진 복도를 지나 지점장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테이블엔 카드를 삽입할 수 있는 형태의 작은 기계가 놓여 있었다.
트레이에 담긴 카드를 앞에 두고, 서류를 보며 지부장이 말했다.
“일련번호를 보니 상당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카드군요. 당일 바로 정지 요청이 되어 이후로 단 한 번도 출금된 적이 없습니다.”
“기능은 제대로 하나?”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멀쩡할 겁니다. 보관 상태가 새것과 같으니까요.”
지점장이 끝을 흐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럽습니다만. 사례를 보면 도난이나 분실 후에 주인이 죽은 경우가 많더군요.”
그의 시선이 빤히 나를 향했다.
“나를 도둑이나 살인자로 의심하나?”
“하하하. 그럴 리가요. 카드를 가져오신 분이 누구든 저희에겐 모두 고객님일 뿐입니다. 단 정지 해제를 하려면 사전에 지정해 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지만요.”
그가 테이블 위 기계로 눈짓했다.
나는 그에게 숫자와 알파벳 열두 자리로 조합된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거침없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지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드를 기계에 꽂았다.
그리고는 내가 불러 준 번호를 입력해 나갔다.
삑─
입력이 완료된 순간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