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36화 (36/227)

#036. 스카이 스크래퍼 (1)

빠르게 여러 방을 오갔다.

고서적이 잔뜩 꽂혀 있는 서재도, 실험에 쓰인 시체들이 나부라져 있는 방도 있었다.

‘여기군.’

가장 깊은 통로, 가장 안쪽의 방이었다.

성인 남성 키 정도의 높이의 현금이 직육면체 형태로 쌓여 있었다.

어마어마한 부피였지만, 20억 실링에 미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뱅크 이그니스」

더미 가장 위엔 고풍스런 디자인의 검은색 카드가 놓여 있었다. 위에 글씨가 금박되어 있었다.

익명성과 기밀성이 뛰어난 은행이었다.

고가의 연회비가 존재하는 대신 어떠한 돈이든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온갖 출처의 검은 돈이 이곳으로 모인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나는 반 우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카드는 정지시켜 놓았으니 본점이나 지점에 가서 풀어야 할 걸세. 그때 필요한 비밀번호는 지금 알려주지.」

정지를 푸는 일이 급하진 않았다.

당장 쓸 현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나는 지폐 뭉치들은 아공간에 욱여넣고, 카드는 품속에 챙겼다.

─ 이쪽이다! 시선을 끌어! 부상자들을 엄호해!

벙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지상의 소리가 들려 왔다.

급박한 외침과 충돌, 거인의 울음소리 등이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계단 위쪽에 올라,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상황을 살폈다.

─그어어!

전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십 수 명의 사제와 용병들이 거인을 에워싼 채 분투하고 있었다.

거인의 몸에 온갖 상처가 가득했지만,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아, 오히려 흉포함만을 더 불러일으킨 듯 보였다.

“사, 살려줘!”

용병 하나가 갈고리에 끌려 거인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갔다.

두둑!

그대로 목이 뽑혀 나가, 숨이 끊긴 채 바닥에 나부라졌다.

“지원은 아직인가!”

“반대편 외곽에 있던 인원들이 합류 중입니다! 곧 도착을…!”

‘저 거인이 제 주인보다 강한 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근접전을 펼치는 사제나 기사들을 상대론.’

잠시 상황을 주시하다 은밀히 걸음을 돌렸다.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옆을 지나, 구역으로 돌아가는 방향이었다.

“…….”

전장을 지나치던 그때, 사제 하나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용병 무리를 찾아와 협조를 구하던 금발의 그 사제였다.

‘전투 중에 내 기척을 느낀 건가. 분명 마법으로 최대한 지웠는데도.’

몇 초간 눈이 마주쳤다.

전장을 이탈하는 겁쟁이를 보는 시선이었다. 픽 한 번 웃어 주고는, 걸음을 다시 떼었다.

“소, 소리가 들리는 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 가서 개죽음이나 당하려고. 사제님들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구역 입구에 몰린 주민들을 지나쳐 호텔로 향했다.

짐을 챙기고, 1층 문을 나서기 전 벨 보이에게 동전을 튕겼다.

“혹시 푸른 머리의 여자 경찰이 사람을 찾으면 92번 구역으로 향했다고 전해라”

“아, 예, 예!”

그 뒤 곧장 중심가에 있는 바이크샵으로 향했다.

“찾으시는 모델이 있으십니까?”

“이곳에서 가장 좋은 걸로.”

현금 뭉치를 꺼내 내려놓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쪽으로 오시죠.”

매장 안쪽엔 여러 디자인의 바이크들이 줄지어 있었다.

주인의 설명을 듣고, 내게 가장 적합한 모델을 골랐다.

블랙 휠, 속칭 검은 바퀴 사에서 제조된 SI-006 모델.

전투용 차량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으로, SI-006 역시 그에 걸맞게 두꺼운 장갑을 갖추고 있었다.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4개의 냉각장치를 부착해 장시간 주행에도 끄떡없는 모델이죠.”

바이크의 세세한 부분들을 살핀 뒤 현금으로 값을 치렀다.

300만 실링 어치의 지폐뭉치가 테이블 위에 쌓여 올라갔다.

“또 오십시오!”

주인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헬멧을 쓰고, 거리의 사람들이 지나길 기다렸다 스로틀을 당겼다.

부아앙-!

맞은편 도로, 가드레일이 부서져 벌어져 있는 공간을 향해 달렸다.

바이크는 틈을 매끄럽게 지나 허공을 날았다.

쿵!

그리고 언덕 아래 도로 위에 안착했다.

엔진의 떨림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나쁘지 않군.’

처음 에스텔이 준비해주었던 바이크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었다.

차량 사이를 이리저리 추월해 달렸다.

순식간에 구역을 벗어나, 쭉 뻗은 도로와 황야가 나타났다.

‘다음 목적지는 90번대.’

슬럼과 같은 극빈층이 줄고, 서서히 하층민들의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구간이었다.

조직 간의 이권 다툼이 치열히 일어나고 암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 구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의사를 먼저 구할 생각이었다.

몸의 치료.

신분증 위조.

그리고 전용 무기의 제작 의뢰.

그중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것은 몸의 치료였다.

신분증은 출입 제한이 엄격히 이루어지는 30번대 구역부터 필요하다.

무기는 총기를 아공간에 대량 보관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다.

모두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운신하고 있는 몸의 경우는,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무방비 상태에 처하게 된다.

잠시 모든 생각을 접고 주행에 집중했다.

속도는 어느새 252킬로미터에 달해 있었다. 스크린 양옆으로 바람이 흐르며 굉음을 일으켰다.

풍경이 쏜살같이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황야. 줄지은 공장지대. 매연.

운송 차량. 사냥개들. 갈라진 땅.

뜨거운 태양, 그리고 다시 황야.

기업 로고가 새겨진 차량들이 구획으로 나뉜 도로를 따라 자재와 상품을 운송하고 있었다.

석양이 질쯤 다음 구역에 도착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와 하늘을 덮은 매연, 그리고 주민들의 무기력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호텔 방을 잡고 나와 거리를 돌며 정보 길드의 표식이 새겨진 간판을 찾았다.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데.’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부랑자에게 다가갔다.

앞에는 깡통이 놓여 있었고, 몸 곳곳에 난 흉터로 보아 전직 용병이나 조직에서 쫓겨난 이로 보였다.

땡그랑-

“이곳에서 소문이 가장 빠른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부랑자는 나와 깡통 안을 번갈아 쳐다보다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구역 중심, 엄청난 높이의 건물 하나가 매연을 뚫고 솟아있었다.

바이크의 핸들을 돌려, 건물에 접근했다.

높이는 51층이었다.

부식된 벽면은 곳곳이 떨어져 나가고 매연이 눌어붙은 검은 때로 가득했다.

‘손님이라곤 보이지 않는군.’

안쪽은 고요했다.

유리 벽 너머, 공실 상태의 방들이 황량한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유리로 된 벽을 통해 지상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마석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그래도 건물에 꽤 많은 투자가 되었다는 증거였다.

띵-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최상층은 거대한 라운지였다.

곳곳에 테이블이 가득했고, 벽면은 통째로 유리로 이루어져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바가 있었고, 단정한 차림을 한 중년의 바텐더가 잔을 닦고 있었다.

그 앞에 다가가 앉았다.

“오랜만의 손님이군요. 구역민은 아닌 것 같고 여행자이신 것 같습니다.”

“검은 새의 울음을 주문하지.”

잔을 닦던 바텐더의 손이 멈칫했다.

“그쪽 손님이셨군요.”

“118번 구역에서 의뢰를 하나 했었는데.”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상으로 이어진 뒤쪽의 나선 계단으로 향했다.

잠시 뒤 파일 하나를 들고 돌아와 내게 건넸다.

“118번 지부장이 그러더군요. 귀빈이니 아주 잘 모셔야 한다고.”

“…뭐. 그렇게 생각했나 보군. 그런데 이곳은 지부장이 따로 없나?”

“제가 지부장입니다. 고객의 응대도 함께 겸하고 있을 뿐이죠.”

“보통 지점은 이런 눈에 띄는 곳이 아니라 뒷골목에 주로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부마다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이곳도 사람들 이목을 피하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운지에 나 외에 다른 손님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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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센 조사 보고서

분류: 인물

보안: A급

──────────

나는 파일의 표지를 넘겼다.

* * *

에스텔은 멍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숙소였고, 침대였다.

시간은 아침 8시였으며 창밖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래, 사고였다.

대외적으로 처리가 된 건.

중앙 건물에서 일어난 폭발은 한 죄수의 난동으로.

창고에서 일어난 폭발은 죄수들의 담뱃불 문제로.

황실에서 조사원이 나왔고, 불미스러운 소문을 막기 위해 모두 ‘사고’로 처리되었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러난 정황이나 물증도 어느 정도는 ‘사고’임을 뒷받침했으니까.

“세 사람이 죽었어.”

소장과 키프텔, 그리고 카인.

공식적으로 세 사람 모두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카인, 그 사람은.”

앞의 두 사람은 정말로 죽었다.

사체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장례식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카인은.

에스텔은 카인이 걸어 주었던 펜던트를 손에 꽉 쥐었다.

마기의 침식을 늦춰 주는 펜던트라고 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목에서 푼 적이 없었다.

생사와 위치를 공유하는 반지 역시도 단 한 번 빼지 않았다.

“…분명 살아있어.”

살아있음은 물론,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대략적인 방향까지 알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계속해 멀어지고 있고.”

구체적인 원리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느껴진다고 표현할 수밖에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보여준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이미 여럿 보았지만, 사건 당일까지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탈옥을 했다.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난 이곳을 나간다.」

정해진 미래는 예견이라도 하는 투였다. 불안감 따윈 일절 보이지 않았다.

“…….”

대체 뭐였을까 그 사람은.

사실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지만, 목에 걸린 펜던트와 손가락의 반지가 꿈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라면 정말 내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나를 찾아와야 할 때는.」

그는 자신의 일을 먼저 끝내야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얌전히 때를 기다렸다 찾아오라고.

“그때는 지금이야.”

사실 지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해결하는 데 적어도 반년은 걸릴 거라 덧붙였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사형 선고를 받은 채 살아오던 삶에,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일을 끝내야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내가 그 일을 끝내도록 도와주면 되잖아.”

에스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면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사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무작정 찾아갔다 구박을 들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짐이 되기보단 도움이 되는 면이 많았다.

전투 사제 중 상위에 꼽히는 무력.

수준급의 신성 마법.

대륙을 떠돌며 교단의 임무를 수행해왔기에 다방면의 경험 또한 풍부하다 볼 수 있었다.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할 일이란 게 아무래도 조직에 관련된 일일 테고, 그만큼 또 위험한 일일 테니까.’

그녀는 그밖에도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할 여러 이유를 찾았다.

외모가 출중하다거나, 요리 실력이 뛰어나다거나, 자잘한 이유까지도.

‘생각해 보면 수석 교도관도 사건 직후에 곧장 그만두었지.’

자비르 경위.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전부터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그녀는 부임 기간 내내 카인을 의심했고, 카인이 사망 처리되자마자 사임했다.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 카인이 살아 있다 판단하고 뒤쫓아 간 게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가 붙잡힌다는 얘기는, 병을 치료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게 둘 순 없어.”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사직서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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