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102번 구역 (3)
칠이 벗겨진 콘크리트.
그리고 눅눅한 습기.
내부 풍경은 처음 벙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벽에 점점이 붙은 전등이, 이곳이 현재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장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 곳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급품인데.’
추측에 조금씩 확신이 더해져 갔다. 피스톨을 꺼내, 앞쪽을 겨눈 채 나아 갔다.
이곳 주인은 118번 구역에서 싸웠던 흑마법사보다 급이 높다 봐야 했다.
그렇다면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인가.
마법사 간의 전투 승패는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마나의 총량.
주 원소 간의 상성.
전투 감각과 쌓아 온 경험.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원소 그 자체를 다루는 능력이다.
경우에 따라 레벨 차를 뒤집고 마법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내 마나의 총량 역시 줄곧 증가해 와 오백 직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었다.
거기에 마법의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내 능력을 감안한다면.
‘승산은 있다.’
백 퍼센트라 장담할 순 없지만, 쉽게 패하진 않으리라 자신할 순 있었다.
멀리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걸음을 빨리해 복도 끝에 닿자, 넓은 홀이 나타났다.
“전혀 쫄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쫀 건 흑마법사 놈이지. 봐, 코빼기도 안 비치잖아. 어, 카인? 이 친구 살아 있었네?”
리프반을 위시한 용병들이었다.
어떻게든 거인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잠입한 모양이었다.
“…….”
나는 녀석들은 무시하고 지나쳐 홀을 살폈다.
책상이나 의자 따위의 집기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또한 다른 통로들이 사방에 뚫려 있었다.
벙커의 규모가 생각 이상이라는 얘기였다.
“어이,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지금 리더는 나니까.”
리프반이 등 뒤에서 무어라 했지만 무시했다.
마나로 파동을 일으켜 전 방위로 천천히 밀어냈다.
파동이 통과한 구조물들의 위치와 생김새가, 투시도처럼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쪽은 아마도 서재. 저쪽 통로로 이어지는 장소는….’
마나 소모가 극심해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당장 다음 루트가 될 만한 장소들만이라도 구조를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자꾸 그렇게 단독 행동을 하겠다면….”
그때였다. 주위 전등이 빠른 속도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쨍! 쨍! 쨍!
“뭐, 뭐야!”
“젠장. 누가 뭐 건드린 거 아냐?”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가장 가까운 책상 뒤에 몸을 숨겼다.
“당황하지 마! 랜턴을 키라고!”
“아, 알겠어.”
찰칵 소리와 함께 랜턴이 켜지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컥!”
용병 중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통로 안쪽.’
탕!
나는 해당 방향으로 피스톨을 한 발 쏜 뒤 다른 엄폐물 뒤로 몸을 굴렸다.
곧이어 정체모를 발사체가 날아와 내가 숨어 있던 책상을 박살냈다.
‘기척이 사라졌다. 맞지 않았어.’
랜턴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용병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개중 하나의 가슴은 날카로운 촉 형태의 마나에 관통당해 있었다.
마나는 은은한 검은 빛을 발산하다 용병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가슴 한 점에 소용돌이가 생긴 것처럼, 마나가 스민 부위가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용병은 숨을 거뒀다.
“주, 죽었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마나 촉이 날아들었다.
말을 뱉었던 용병이 쓰러지고, 같은 과정을 거쳤다.
「사멸의 손아귀」
적중 부위를 세포 단위로 뒤틀어버리는 마법으로, 그 악랄함 때문에 금지 마법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다음 용병들의 행동은 본능적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어떻게든 엄폐물을 찾아 숨었다.
나는 상황을 분석했다.
두 번째 마법은 처음 통로와 다른 통로에서 날아왔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점멸을 사용했거나.
통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용병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리프반. 어떻게 좀 해봐.
─마법 쪽으로 달려가라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쳐. 지금 생각 중이니까.
─자기만 믿으라더니. 지금이라도 후퇴하는 게 낫겠어.
─잡기만 하면 최소 5백만 실링인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더 이상 마법은 날아들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용병들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 바닥에 불이 피어올랐다.
리프반의 손엔 휴대용 기름통이 들려 있었다.
“모두 내 뒤로 붙어! 날아오는 마법은 내가 막는다!”
불의 크기는 그리 크진 않았다.
딱 기름이 뿌려진 범위,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시야는 훨씬 밝아져 있었다.
“따라와! 모두 동시에 움직인다!”
리프반이 먼저 불 옆으로 뛰쳐나갔다.
잠시의 망설임 뒤, 남은 용병 둘은 뒤로 따라붙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 불에 비쳐 붉게 드러났다.
“마법사라고 별 거 없어! 마법을 못 쓰면 일반인만 못하다고!”
“마법을 어떻게 막는데. 마나로? 마나로 막는 건가?”
“닥치고 보기나 해!”
용병들의 고개가 사방 통로를 향해 쉼 없이 움직였다.
허공에 펼쳐 든 리프반의 손엔 못 보던 반 장갑이 착용 되어 있었다.
손바닥 부분에 새겨진 기하학적 모양의 마법진이 눈에 띄었다.
“저기다!”
외침, 그리고 손바닥의 방향을 돌린 동시 세 번째 마나 촉이 날아들었다.
“마법 따위 내가 무효….”
마나 촉은 리프반의 귓가를 지나쳐 그대로 뒤에 있던 용병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털썩.
“히, 히익!”
네 번째 마나 촉이 날아들고, 남은 하나의 용병마저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리프반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니야. 이럴 리, 이럴 리가 없어. 내, 내가 얼마를 주고 산 건데. 일회용이라 해서 이제껏 아껴 놨는데!”
장갑의 손등을 보며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섯 번째 마나 촉이 날아드는 순간, 나는 엄폐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간섭’을 시도했다.
마법에 사용된 원소들의 종류.
구성비와 결합 순서.
공식에 따른 부분 외에, 사용자의 성향이나 특질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앞선 네 번의 마법으로 그것들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마나 촉은 리프반의 이마에 닿기 직전 분해되어 허공에 사라졌다.
질끈 감겨 있던 리프반의 눈이 떠졌다.
어리둥절해 하다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이제야 작동을 하네. 이제야…!”
“꺼져라.”
“뭐, 뭐?”
“죽기 싫으면 꺼져라. 그 장갑을 내려놓고.”
“지, 지금 내가 마법….”
마나 촉은 통로의 위치를 바꾸어 계속해 날아들고 있었다.
내 손짓 한 번마다, 허공에서 맥없이 사라졌다.
나는 패드를 떼어 목의 문신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장갑을 내려놓고 꺼져라.”
리프반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를 덜덜 떨며 장갑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입구를 향해 뛰었다.
나는 마법의 ‘간섭’을 계속하며, 허리를 숙여 장갑을 주워 착용했다.
손 전체에 달라붙는 착용감이 나쁘지 않았다.
라티움에서 제작된 물건이었다.
‘간섭’시 마나의 흐름을 촉진시켜주는 기능이 있었다.
원래 용도는 마법사 간의 대련에 쓰이는 보조도구였다.
즉, 일반인이 이걸 착용한다고 마법을 파훼할 순 없다.
마법사 전용이며, 단순 능력 보조이기에 기본실력은 뒷받침되어야 했다.
예상 가는 바는 있었다.
흑마법사와 싸운 경험은 있지만, 주력 전투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마법사의 호위로 들어가 마법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듣고, 빈약한 경험을 쌓지 않았을까.
또, 마법사가 장갑을 착용한 채 상대 흑마법사의 마법을 ‘간섭’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법사에게 비싼 돈을 주고 새 물건을 구매하지 않았을까.
정부의 물품이 외부로 빼돌려지는 일은 이 세계에서 흔한 축에도 들지 못했다.
‘장갑 하나 꼈다고 마법을 무효로 할 수 있다니.’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지금 당장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법은 전격 계열로 종류를 바꾸어 날아왔다. 그것이 놈이 다루는 주 원소인 듯했다.
탕!
통로에서 마법이 날아들 때마다 해당 방향으로 대응 사격을 했다.
폭발 계열의 마법이 각인된 탄은 쓰지 않았다. 벙커가 무너져 나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있으니.
대신 전격 계열의 마법이 각인된 탄을 사용했다.
탕! 탕!
마법이 날아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간섭’ 역시 빨라졌다. 총구 역시 연이어 불을 뿜었다.
‘마나 양에 꽤 자신이 있나 본데.’
놈은 쉼 없이 점멸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도에 점이 찍히듯 위치가 감지되었다.
소모전으로 흘러가는 방향도 나쁘지 않았다.
‘간섭’에는 상대가 마법에 들인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마나가 소모되니, 교환비가 훌륭하다 볼 수 있었다.
다만 내가 고려하고 있는 건 시간이었다.
사제들이 거인을 제압하고 지하로 진입해 올 가능성이 있었다.
마법의 사격이 멈추고, 더 이상 놈의 위치가 감지되지 않았다.
뜻은 명확하게 전해져 왔다.
나를 잡고 싶다면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안쪽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뿐더러, 어떤 함정이 깔려 있을지 몰랐다.
대신 나는 전(電)계 원소를 끌어 올렸다.
탄에 마법을 각인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손바닥 위에 검푸른 전류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
피한다면 피할 곳이 없게.
숨는다면 숨을 곳이 없게.
그렇게 만들면 될 뿐이었다.
놈에게서 간섭이 들어왔지만, 나는 간섭을 다시 한번 간섭해 무마시켰다.
파직─!
전류가 뱀처럼 갈라져 전 방위의 통로로 쏘아져 나갔다.
내 인도에 따라, 벽을 튕기며 통로 내부를 휩쓸어 갔다.
─끅!
“거기군.”
통로 한쪽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마법으로 빛을 띄우고 해당 방향으로 다가갔다.
총기 하나를 꺼내 앞쪽을 겨눴다.
현대식으로 개량된 쇠뇌로, 전체적인 형태는 라이플과 비슷했으나 앞쪽에 두꺼운 쇠뇌 살이 매겨져 있었다.
빛을 비추자 통로 끝에 로브를 걸친 남자가 보였다.
이미 실신 직전의 타격을 입은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라!”
간섭은 계속해 이루어졌다.
놈이 원소를 결합하고, 나는 해제했다.
나는 천천히 접근하며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탕!
쇠뇌 살이 날았다.
놈의 손바닥과 함께 뒤쪽 벽에 박혀 들었다.
“크악!”
마법을 파훼하고, 접근하며, 다시 한 발 살을 매겼다.
탕!
“끅!”
반대편 손.
“크윽!”
왼쪽과 오른쪽 허벅지.
내가 바로 앞에 접근했을 때, 놈의 몸은 쉼 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놈이 마지막으로 사용하려는 점멸을 간섭으로 무효화시켰다.
“괴, 괴물….”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에 피스톨의 총구를 박아 넣었다.
“…괴물은 네가 만든 키메라 같은 걸 괴물이라 하지. 거기에 신경이 팔려 자기 힘을 키우는 데엔 소홀했나 보군.”
생각만큼 전투 경험이 많고 노련한 녀석은 아니었다.
아니, 충분히 강력한 상대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단 한 번만 묻지. 근처 벙커에 있던 돈에 손을 댔나?”
놈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고개가 격렬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더 쪽, 더, 더 쪽 방에!”
눈짓과 몸짓으로, 뜻은 알아들었다.
“돈의 위치는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 알려 주었나?”
“우, 우여 이야! 도, 돌아다니다!”
방아쇠에 힘을 주자 놈의 떨림이 격해졌다.
“저, 저마이야!”
필사적으로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놈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을 읽었을 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뒤 짧게 정보를 캐냈다.
출신지나 이곳에 도착한 시기, 목적 따위의 것들.
처음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고, 별달리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었다.
“다, 다 마해으니, 사, 사려줘. 나, 나가서 자수…!”
탕!
벽에 밀려 있던 놈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발견될 리 없는 돈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중요한 설정들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관 그 자체나, 조연들의 성격, 배경과 같은 것들.
하지만 118번 구역 외곽의 유적이나 이번 경우의 비자금같이, 상대적으로 자잘한 요소에 관련된 사건들은 내가 알고 있던 흐름을 벗어나고 있었다.
“…….”
카인은 주인공의 가장 큰 조력자다.
그런 인물이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걸음마다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가 변함없이 흘러가리라 기대하는 일 자체가 큰 오만이며 욕심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종래엔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비틀어져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작은 파문이라도 쌓이고 쌓이면 거대한 파도가 되기 마련이니까.
일단 생각을 접었다.
눈앞에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존재했으며, 어쨌든 내겐 복수와 현실로의 귀환이라는 나침반이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거나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나는 피스톨에 묻은 피를 한 차례 털어냈다. 그리고 흑마법사의 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회로 레벨: 2]
[마나: 92 / 526]
상승치는 약 30.
거기에 더해 회로 레벨도 올랐다.
마나의 회복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두 배, 아니 그 이상 가속되어 있었다.
다음 회로 레벨에 필요한 마나는 2500.
전투력이 조금 떨어지는 조직 간부들이 보유한 마나 수치였다.
‘…원소도 전보다 더 선명히 느껴진다.’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회로를 살폈다.
파악을 완전히 끝낸 뒤, 나는 돈이 보관되어 있을 방으로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