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102번 구역 (1)
한밤의 황야를 걸으며 망토를 살폈다.
품 안쪽이 아공간과 연결되어 원하는 좌표의 물건을 꺼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창, 도, 봉, 투척용 비수, 없는 게 없군.’
총기와 탄약은 물론이고, 경찰용 신분증이나 수갑과 같은 업무 도구들까지 존재했다.
철컥.
피스톨 하나를 꺼내 상태를 점검했다.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마나가 가득 찰 때마다 탄약에 마법을 각인하며 나아갔다.
몬스터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제르비아가 곧바로 쫓지 못하도록 중간마다 흔적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서서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다.’
졸음과 피로가 쏟아졌지만 참았다. 대지가 달아오르기 전에 최대한 전진해 놓아야 했다.
이동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몬스터와의 전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위험 구역은 지났고, 탄의 비축분이 있을 때만 전투를 유도했기에 큰 부상은 없이 넘길 수 있었다.
해가 완전히 뜬 뒤론 전진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몸에 열이 완전히 차오를 때마다 적당한 바위 밑으로 들어가 체온을 식히고 마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쪽잠을 취했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이동해 나갔다.
다시 또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나고, 오후의 태양이 떴을 때, 나는 멀리서 들려 오는 바이크 소리를 듣고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 *
사냥개들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땅에 떨어진 총기들을 망토 안에 챙겼다.
드드드-
쓰러진 바이크를 일으켜 올라탔다.
처음 탔던 바이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차체였지만, 황야의 남은 부분을 횡단하는 데엔 충분할 터였다.
부아앙-!
엔진을 혹사해 가며 달렸다.
중간에 한 번씩 사냥개들이 나타났지만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아주 적은 수치지만, 내 마나를 늘리는 데 일조해줄 뿐이었다.
[회로 레벨: 1]
[마나: 372 / 494]
어느 원소를 사용하든, 내가 일으킨 마나는 검은빛을 띠어 갔다.
나중엔 모든 색을 먹어 치우고 완전한 흑색이 될 터였다.
해가 저물 때쯤 112번 구역 외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반 우즈가 비자금을 숨겨 놓은 장소는 102번 구역으로, 112번 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끼익-
바이크를 적당한 곳에 주차한 뒤 구역 안쪽으로 진입했다.
112번 구역의 풍경은 118번 구역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전형적인 슬럼 그 자체.
낙후된 건물과 지저분한 거리.
“한 부 사겠다.”
길가의 신문팔이에게 동전 한 닢을 튕겼다.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은 신문이 팔렸다는 사실에 얼떨떨해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신문 한 부를 내게 건넸다.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신문을 읽을 여유가 없겠지.’
신문은 어제 자였다.
가장 외곽 구역인 탓에 최신 본의 보급이 늦어지는 듯 보였다.
크게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이틀 전 일어난 열차 사고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1면 상단. 이쪽이군.’
외곽 순환 열차 폭발 사고.
예상대로 ‘테러’나 ‘사건’이 아닌 ‘사고’로 기사가 나 있었다.
사고의 원인은 수화물 내 인화 물질 취급 부주의로, 식당 칸에서 있었던 일은 일절 언급이 없었다.
경찰이 사건을 덮은 것이다.
범죄자들의 테러를 막지 못하고, 놓쳐 버리기까지 했다는 것은 이미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화륵-
신문은 허공에서 불씨에 먹혀 사라졌다.
나는 적당한 호텔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문에 알람 마법을 건 뒤, 씻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들었다.
늦은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는 맑아져 있었다. 몸도 개운했다.
얼굴을 씻고, 마탄을 제작하는 루틴을 마쳤다.
부아앙-!
황량한 도로 위, 공무원들의 업무용 차량이나 기업들의 화물 차량이 종종 오가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 정도 걸려 102번 구역에 도착했다.
바이크를 주차하고 열쇠를 꽂은 채 두었다.
─비켜! 내가 먼저 봤어! 내가 임자라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등 뒤로 부랑자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호텔 직원에게 들었던 답변을 떠올렸다.
「바이크 샵이요? 이곳은 없고, 가장 가까운 곳을 꼽자면 102번 구역에 있습니다. 그냥 동네 가게라 판매하는 모델이 몇 안 되지만요.」
사냥개들에게 탈취한 바이크는 성능이 떨어졌다.
땅에 쓰러질 때 차체에 큰 충격을 받은 데다, 무리한 운행으로 엔진 상태가 말이 아닐 터였다.
‘비자금을 확보한다면 새것을 사는 게 낫겠지. 임시로 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외에도 돈을 들여야 할 곳이 많았다.
힘줄의 치료와 위조 신분증.
그리고 마나를 견딜 수 있는 총기의 제작 의뢰까지.
비자금을 찾지 못한다면 안쪽 구역의 진입 준비를 마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었다.
‘공기가 묘하게 팽팽한데.’
구역 주민들의 침울하고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그들의 삶이 팍팍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리 곳곳에 눈에 띄는 이방인들은 내 신경을 잡아챌 수밖에 없었다.
‘차림새로 봐선 떠돌이 용병들인가.’
어딜 가든 용병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지금 거리엔 그 수가 과도하게 많았다.
102번 구역에 현재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외투를 여미고 걷던 중, 앞쪽에 나타난 이들을 보고 골목에 몸을 숨겼다.
사제들이었다.
일반 사제가 아닌, 등 뒤에 해머와 메이스를 멘 전투 사제들.
구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를 수첩에 적고 있었다.
─그러니까 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말입니까?
─예. 처음에 착각인 줄 알았는데… 분명 묘지 쪽에서…….
나는 사제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골목 밖으로 나왔다.
흑마법사는 교단의 척살 대상에 올라 있으니 괜스레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았다.
─어제는 또 잭이 사라졌잖아.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아무리 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라 해도 그렇지.
─조금만 참자고. 이만큼 사람들이 몰려 왔으니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거리를 지나며 주민들의 목소리는 좋든 싫든 계속해 들려 왔다.
─보나 마나 흑마법사 짓이지. 현상금 두둑하게 받아서 신분 상승 좀 하자고.
─그 돈 주기가 싫어 교단에서 직접 나온 거 아니겠어.
용병들의 목소리 역시도.
상황의 윤곽은 빠르게 그려졌다.
근방에 흑마법사가 출몰하고, 주민들이 실종되는 모양이었다.
‘…묘지를 거점으로 잡은 녀석이 있나 보군.’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흑마법사는 타인의 마나를 흡수해 성장한다.
그리고 희생양이나 시체의 공급처로는 슬럼만 한 곳이 없다.
사람이 사라져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시체는 매일 같이 묘지에 쌓여 나가니까.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돈을 찾아가면 될 뿐이니.’
하지만 구역의 반대쪽 외곽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
광활한 대지, 돌이나 나무판자 따위로 만든 묘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름 모를 시체들이 사이사이를 가득 메워, 발 디딜 틈조차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102번 구역 외곽의 묘지.
설정을 짤 때 분명 ‘드넓다’라는 단어를 쓰긴 했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이 정도까지의 넓이로 구현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반 우즈는 ‘보우&도스’라 쓰인 묘비를 찾으라 했다.
자기 이름의 철자를 재배열해 만든 가상의 단어라고 했다.
「돌로 된 묘비야. 잘 살펴야 할 걸세. 워낙 작게 새겨 놓은 데다 시간이 지나 글씨가 흐려졌을 거거든.」
묻은 위치는 묘지의 북동쪽.
하지만 방향을 안다고 비자금을 곧장 찾을 수 있을까.
이 끝도 없이 펼쳐진 묘비의 바닷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는데. 묘비가 이렇게 늘어 있을 줄은.’
면적을 어림잡아 탐색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최악의 경우 이틀,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사이 사제들과 묘지에서 마주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일단 걸음을 돌려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방을 잡았다.
“바깥에 사제들이 돌아다니던데. 아는 게 좀 있나?”
“아, 교단에서 나오신 분들입니다. 요즘 구역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손님도 소문을 듣고 오신 거지요?”
호텔 지배인도 크게 아는 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몰려 장사가 잘되는 데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는 방에 도착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흑마법사의 아지트가 묘지에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정황적 증거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묘지 아래엔 고대 마도 왕국 시절 사용되었던 지하 벙커가 다수 존재했다.
흑마법사가 개중 하나에 들어앉았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반 우즈가 비자금을 숨긴 곳도 지하벙커.’
사제와 용병들이 흑마법사를 찾으려 묘지 곳곳을 들쑤시고, 그러다 비자금을 발견한다면.
원래는 작품 후반부 주인공에 의해 발견되는 돈이다.
하지만 유적 건과 같이 나로 인해 무언가 나비 효과가 발생했다면.
그래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다면.
물론 확률은 높지 않을 수 있다.
가정은 가정일 뿐이니까.
하지만 무시하고 넘기기엔 상황이 발생했을 시의 리스크가 너무도 컸다.
나는 일단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내 돈에 눈독 들이지 말라고!”
“염병, 마법사를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놈이. 잡을 실력은 있어?”
호텔이 운영을 겸하는 식당 겸 주점이었다.
용병들이 북적여 소란스러웠다.
잔을 부딪치고, 테이블을 내리치고, 벌써부터 포상금이 자기 것이 된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곧장 움직여 비자금을 찾아야 한다.’
사제들과 마주치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용병들 틈에 섞여드는 게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말린 소시지와 치즈. 그리고 맥주 한 잔.”
간단한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런 경우 대개, 사람들을 규합해 득을 보려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한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근육이 두드러진 거구의 남자였다. 그는 앞쪽 테이블에 앉은 갈색 외투에게 힘껏 잔을 던졌다.
쨍-!
잔은 정확히 뒤통수에 명중했다.
유리 파편이 비산했다.
갈색 외투가 쓰러지고, 순간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
“시끄러워서 술을 마실 수가 있어야지.”
거구의 남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제, 제타, 괜찮아? 정신 차려!”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쓰러진 갈색 외투의 동료들이 술병을 쥐고는 거구에게 달려들었다.
용병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주위를 에워쌌다.
─우와아!
“죽어!”
갈색 외투 일행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싸움은 다소 일방적이었다.
거구는 맨손으로 상대들을 제압해 바닥에 고꾸라뜨렸다.
“어차피 사람을 모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바로 말하지. 나는 잭 리프반이다. 너희들처럼 흑마법사를 잡아 포상금을 받을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녀석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팔뚝을 걷어 올려 문신을 보였다.
“브, 블루서펜트잖아.”
“블루서펜트가 여기서 왜 현상금 사냥꾼 짓을 하고 있어?”
“멍청아. 가끔 조직에서 쫓겨 나는 녀석들이 있다고 하잖아. 그건가 보지.”
문신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렸다.
“아는 녀석은 알겠지만 흑마법사는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놈이다. 베테랑 용병도 마법 한 방에 나가떨어지기 쉽지. 나 역시 마나를 다룰 줄 알지만 혼자서 놈을 상대하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녀석의 문신을 유심히 살폈다.
‘가짜군.’
블루서펜트는 조직 내에 전속 문신사가 있다. 모든 푸른 뱀은 그의 정교한 손끝에서 탄생한다.
완성도가 높긴 하나, 녀석의 문신은 오리지널과는 곳곳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모집하려 한다. 조건은 흑마법사를 수색하고 상대하는 일을 도울 것. 물론 포상금은 나눌 생각이다. 나만큼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내 몫이 가장 크긴 할 거다. 하지만 섭섭지 않을 정도론 챙겨 주지.”
녀석이 상금 분배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풀자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번져갔다.
“저 정도 조건이면 괜찮지 않나?”
“진짜 블루서펜트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보여 준 실력은 진짜잖아.”
거액의 포상금이란 말에 별다른 준비 없이 이곳에 도착한 이들.
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땐 분명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내가 지원하지.”
“나, 나도 함께하겠다.”
이야기에 혹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