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열차 (1)
“마셔 봐.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빤히 나를 향했다.
‘조금 곤란한데.’
마나 회로는 구축하는 것만으로 일반인보다 수 배 강화된 신체 능력을 얻는다.
약을 마신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 정신력이라면 고통스러운 티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정도 타격은 입어, 차후 운신에 지장이 있을 수 있었다.
“어서. 뭘 뜸을 들이는 거지?”
나는 병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을 확인키 위해 주변을 곁눈질했다.
‘타이밍 좋군.’
뒤쪽, 쓰러져 있던 현상범 중 두 녀석이 때마침 깨어났다.
주변을 살피며 상황 파악을 하던 녀석들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자꾸 뜸을 들이는군. 계속 망설인다면 내가 직접 입에 부어 주겠다.”
나는 제르비아에게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녀석들에게 눈짓해 신호를 보냈다.
덮쳐라.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징이 박힌 클럽을 빼 들고 제르비아의 뒤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었지만, 눈치는 제법 쓸 만했다.
아무래도 긴 시간 뒷골목을 구르며 살아온 녀석들일 테니.
애초에 저 녀석들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마시겠습니다.”
나는 병을 들어 올려 제르비아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등 뒤 상황을 모두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애초에 저 녀석들이 제르비아에게 타격을 입힐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녀석들이 지척까지 접근했을 때.
클럽을 높이 들어 올린 그 순간.
나는 한 박자 빠르게 외쳤다.
마치 녀석들을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경위님! 위험합니다!”
놀란 녀석들이 허겁지겁 클럽을 내리쳤다.
제르비아가 바닥을 박차며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표적을 잃은 클럽은 테이블 앞부분을 향했다.
콰직!
테이블이 내 쪽으로 밀리며 반으로 쪼개졌다.
나는 그에 맞춰 크게 몸을 비틀거렸고, 손목에 스냅을 주어 자연스럽게 병을 공중으로 던졌다.
제르비아가 녀석들에게 쇄도하는 사이, 병은 바닥에 떨어져 보기 좋게 깨져 버렸다.
제압에는 채 20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검집 끝에 명치를 찔린 것만으로 녀석들은 다시 기절해 쓰러졌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경위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바닥에 깨진 병을 보며 이마를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약을 버린 게 아깝긴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핥아먹으라는 식의 명령을 내리진 않을 것이다.
또 방에 재료가 남아 있으니 다시 제조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는 척 연기하다 말했다.
“검문이 끝났다면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마지못해서라는 듯 떨떠름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붙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현상범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 술을 마시고 있던 떠돌이일 뿐이니까.
“가기 전에 한 가지 묻지.”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녹색 천 조각.
그 위에 박음질 된 776이란 숫자.
탈옥 당일, 내가 고철 더미 위에 던져 놓았던 죄수복. 그중 가슴 부분이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분명 나를 떠보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잠시 고민하다 일부러 입꼬리를 씰룩였다. 제르비아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오가는 눈빛.
“가도 좋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짐과 가방을 챙겼다.
술집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자, 통신용 마법구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제르비아가 보였다.
얼핏 들은 대화 내용으로 보아 현상범들의 처리를 위한 인력을 부르는 듯싶었다.
호텔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거리와 골목을 빙빙 돌았다.
초조함이 슬쩍 고개를 들 때쯤, 누군가 뒤를 밟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밀한 미행이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연기를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정보 길드, 혹은 제르비아.’
전자일 가능성은 낮다.
어제의 그것으로 내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을 터. 엄한 부하를 또 잃고 싶진 않을 것이다.
나는 미행에 개의치 않고 원래의 일정대로 걸음을 옮겼다.
[시모네즈 불릿]
총포상이었다.
118번 구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어제까진 문이 닫혀 있어 방문하지 못했었다.
끼익-
창살로 오후의 햇살이 비쳤다.
유영하는 먼지.
벽면 가득한 총기들.
온갖 종류의 탄약과 부품.
외곽에 있는 가게치곤, 꽤나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안까지 따라붙진 않는 건가.’
아마 밖에서 문을 주시하며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으리라.
“못 보던 얼굴인데.”
수염 덥수룩한 주인이 천으로 라이플의 덮개를 닦고 있다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사냥꾼? 아니면 떠돌이?”
전자는 현상금 사냥꾼을, 후자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무소속 용병을 뜻했다.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 가게에서 내구도가 가장 뛰어난 물건들을 봤으면 하는데. 종류에 상관없이.”
주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구도? 별 희한한 조건을 다 들어 보는데. 가진 돈에 맞춰 달라거나 특정 제조사 물건을 찾는 경우는 있어도.”
뒷골목에 유통되는 총기류는 대다수가 카피 제품으로 잔고장이 많다.
하지만 정품보다 가격이 십 수배 싸기에, 여러 정을 적당히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정품이 몇 정 있긴 하거든. 근데 그쪽도 알겠지만 가격대가 만만치가….”
나는 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돈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잘그락 소리에,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창고로 보이는 문으로 향하던 그가 뒤를 보며 말했다.
“보여 달라니 보여 주긴 하는데, 정말 아무 종류나 전부 상관없는 건가?”
바꿔 말하면, 그만큼의 숙련도가 나에게 있느냐는 말이었다.
모든 총기의 기본 원리는 같다.
장전, 격발, 탄환과 탄두의 분리.
두 손만 멀쩡히 달려 있다면 어떤 종류의 총이든 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만 촌각을 다투는 실전에서 그것들을 모두 다룰 수 있느냐는 별개의 이야기다.
같은 계열의 총기라도 제조사에 따라 작동 방식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숙련도가 가장 높은 한두 종의 총기만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관없다.”
주인이 총기가 가득 담긴 자루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쏟아 내었다.
라이플, 피스톨, 서브 머신 건, 스나이퍼 라이플 등 종류가 다양했다.
“자 보라고. 정품 마크가 찍혀 있지. 품질은 안심해도 된다고. 이쪽 물건은 콜트 액션 제조사 제품인데….”
나는 말을 끊고 총기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상태를 살폈다.
익숙한 그립감과 무게.
굳이 마크를 살피지 않아도 정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숙련된 동작으로 총기를 하나하나 살피는 나를 보며 주인이 멍한 얼굴을 했다.
‘이걸론 부족해.’
일반적인 무기는 마나의 주입을 견디지 못하고 파쇄된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총기들도 마찬가지.
회로 레벨이 올라 고강도의 마법을 탄환에 새기게 된다면, 망가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 자명했다.
그것이 정품이든, 카피 제품이든 간에.
“브라운 홀 사의 MK 시리즈는 없나? 아니면 로우택틱 사의 12번 시리즈도 괜찮은데 말이야.”
마나 내성이 강한 금속, 오리하르콘이 바디의 제조 과정에 쓰인 제품들이었다.
함유 비율이 높진 않지만, 적어도 눈앞의 것들보단 뛰어난 내구성을 보여줄 터였다.
‘제르비아의 검이 순도 100퍼센트 미스릴로 만들어진 주문 제작품이었지.’
오리하르콘보다 상위 등급의 금속.
마나에 대한 내성은 물론 받아들인 마나를 증폭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마나 유저를 위한 총기는 일반적으로 제조되지 않으니, 마탄을 계속 운용하려면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주문 제작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어… 우리 가게에 그런 고가품은 들여놓지 않는데 말이야.”
주인은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휴대가 가능한 크기의 것들만을 값을 치러 구매한 뒤 가게 문을 나섰다.
미행이 남아 있는지 확인키 위해 다시 거리를 돌았다.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장소를 탐문하는지 잠시 사라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리 오랜 간격을 두지 않고 다시 따라붙었다.
미행은 그렇게 호텔 앞까지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 호텔 앞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집요하군. 하긴 속으론 이미 내가 카인이라 확신을 하고 있을 테니.’
아마 내가 실수로 정체를 흘리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바이크를 끌고 역으로 향했다.
다시 표를 끊으며 매표원에게 물었다.
주위를 향해 들으란 듯 큰 소리로.
“102번 구역으로 향하는 열차가 맞나?”
황량한 플랫폼 위에서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삐이이이이─!
요란한 경적과 함께 열차의 거대한 몸체가 눈앞을 스쳤다.
광풍이 불며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철컹- 철컹- 끼익-
질주를 마친 열차가 멈춰 섰다.
시야 끝, 마지막 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차량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먼저 화물칸에 바이크를 실은 뒤, 열차 중간 즈음의 여객 칸에 올라탔다.
실내는 고요했다.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승객들이 신문을 읽거나 식사를 하는 등,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플랫폼 쪽을 내다보았다.
검은 외투를 입은 한 인영이 멀리 떨어진 여객 칸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눌러 쓴 후드 아래, 짙푸른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철컹- 철컹-
다시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풍경은 뒤로 멀어져 갔다.
여기까지, 제르비아는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주었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이 상황을 잘 이용하는가.
‘일단 라이카가 확실히 이 열차에 탑승했는지 확인해야겠지.’
크로스 백은 2개였다.
하나는 수화물 선반에 올리고, 다른 하나는 어깨에 둘러멨다.
부피가 작은 총기들만을 담은 가방이었다.
‘일단 이 칸에는 조직원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없다.’
곁눈질로 승객들을 살피며 열차 꼬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 빠른 속도만큼이나 열차의 움직임은 거칠었고, 나는 중간중간 몸을 비틀거렸다.
간간이 이어진 화물칸에는 표를 끊지 않고 탄 걸로 보이는 부랑자들이 적지 않았다.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딘가에 마약상 워렉이, 또 어딘가에 라이카와 부하들이 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열차의 꼬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승무원 하나가 통로를 막아섰다.
“이 앞으론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눈빛을 보내자 승무원이 움찔하며 말했다.
“뒤쪽 차량 3칸을 통째로 대여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가 예약했다는 말이지? 안쪽 구역의 귀족들인가?”
“죄송합니다. 규정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거칠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안쪽에서 벽을 뚫고 들려왔다.
‘라이카.’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차오르는 분노로 피가 들끓었다.
“일행이다.”
“죄송합니다. 한 시간 뒤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서 말입니다.”
승무원의 태도는 강경했다.
‘벌써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기습을 한다면 거래 현장을 덮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고가의 마약을 두고 거래하는 만큼, 외부보다는 서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
‘아니.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아직 열차 앞쪽은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지금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향했다.
워렉을 찾을 겸, 제르비아의 움직임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이동하던 중, 앞쪽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승무원 하나가 고급스런 식기가 올려진 수레를 끌고 뒤쪽 차량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고려해두었던 계획 하나를 그 순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