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118번 구역 (3)
나는 천천히 서류를 넘겨 나갔다.
간부들이 나눴던 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접선 장소에 카인이 가장 일찍 도착하겠지. 그때 보스의 호위를 카인이 죽인 것처럼 연출하자고.」
「필요한 인원은 내 쪽에서 준비하지. 시간을 잘 맞춰야 할 거야.」
블루 서펜트는 기본적으로 점조직 형태에 가깝다.
보스는 매번 접선 장소를 바꾸어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면을 쓰고 나타나 변조된 목소리로 지령을 전달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간부는 없었다.
‘경찰이나 타 조직의 움직임을 소름 돋을 정도로 잘 예측하는 인물이었지.’
물론 나는 그 정체를 알고 있다.
아직 글로 쓰진 않았지만, 극 후반부 주인공 일행에 의해 정체가 밝혀지는 식으로 전개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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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업 - 증오의 불길]
목표: 배신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십시오. (0/3)명
획득 스킬: 과감성, 불굴의 의지. 냉철함.
보상: 현실 세계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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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대상은 셋으로 보스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간부는 나를 포함해 총 다섯.
그중 셋이 내 복수 대상이다.
백수왕 라이카.
싸움꾼 파르테르.
검은 밀수꾼 바마.
라이카에 비해 밀리긴 하지만, 나머지 두 간부의 무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쨌든 카인은 배신당했다.
보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그 자리에서 제압당했고, 후에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류를 계속해 넘겼다.
대화록이 끝나고, 라이카의 향후 몇 주간의 스케줄이 이어졌다.
타 조직과의 거래나 협약을 위한 접선, 구역 농토 관리자와의 만남 등.
그중 한 일정이 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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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15시 정각
외곽 순환선 4번 열차
카가르 워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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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래’를 위한 접선임을, 주고받을 물건이 무엇일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워렉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약상 중 하나였으니까.
‘날짜는 사흘 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예약한 표는 이틀 뒤 3번 열차였다.
하루를 더 기다린다면 4번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일정표가 털린 시점에서 장소나 시간 따위를 수정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라이카라면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설정한 주요 키워드가 ‘오만함’이기에.
세계관 내 열 손가락에 들 정도의 무력. 그에 못지않은 두뇌 회전과 악랄함.
‘방해꾼이 나타나봤자 하등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지만, 어쨌든 라이카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여러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거래 현장을 덮쳐 기습하거나.
음식에 독을 넣어 암살을 시도하거나.
분명 쉽진 않을 것이다.
라이카 본신의 무력이 상당할뿐더러, 주위에 호위 역시 붙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겠지.’
열차는 한 방향으로만 도니, 원래의 내 목적지인 102번 구역으로 향하는 계획에도 차질이 없었다.
나는 앞으로의 행동을 머릿속에 그려나가며 그 자리에 대기했다.
소모된 마나가 회복되어, 마법을 이용해 시체를 모두 태워 버렸다.
막심의 시체는 수습해 주변 그나마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멀리 떨어진 건물 뒤편이었다.
‘지부장이 꼬리를 붙였나 보군.’
나는 마나를 그러모았다.
마법의 발현 좌표는 건물 옥상 높이의 허공.
순식간에 형성된 푸른 뇌전이 낙하했다.
파직!
“끄윽!”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굳이 사망을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변을 정리하고 체크인해 두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방문을 걸어 잠근 뒤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알람 마법을 걸었다.
옷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쏴아아-
온수가 얼굴과 몸에 튀었던 피를 씻어 내렸다.
그간 누적된 피로와 긴장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줄곧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냈으니.’
어깨에 손을 대 치유 마법을 사용하자 천천히 상처가 아물어 갔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온수를 맞고 있다, 냉수로 스위치를 돌려 정신을 일깨운 뒤 밖으로 나갔다.
* * *
다음 날 나는 구역 곳곳의 잡화점을 돌았다. 주인들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쓰여 있는 물건들을 구하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리십쇼.”
희귀한 약초류나 특정 브랜드의 비누 같은 것들.
필요한 모든 재료를 구할 순 없었지만,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모든 재료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몰려든 마나가 들끓으며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연성」
촉매를 만들 때와 기본 원리는 같았다. 다만 들어가는 재료와 최종 완성물이 다를 뿐.
재료가 녹아들며 서로 엉기기 시작했다.
빛이 일었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엔 투명한 빛깔의 액체가 남았다.
나는 그것을 준비해 둔 작은 병에 담았다.
‘제대로 된 명칭이 있는 건 아니지만.’
독극물이었다.
단 한 방울만 체내에 흡수되어도 일반인은 죽는다.
마나 유저, 그것도 라이카에겐 치명적인 효과가 있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터였다.
그 후론 구역을 돌며 소문을 모았다. 정보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곳은 술집이었다.
“이번에 58번 구역에서 주민을 받는다던데.”
“꿈 깨. 우리 같은 놈들이 거기까지 어떻게 가?”
“103번 구역에선 북쪽 탐사에 나설 용병을 구한다더라고. 다음 달 말까지.”
“약 좀 가진 거 있어?”
“염병. 죽지 못해 살지. 죽기 전에 수도에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야.”
술집엔 대낮부터 사람이 많았다.
구역 주민이나 떠돌이 용병들.
얼굴을 가리려 가면을 쓰고 다니는 현상범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확실히 세계관은 내가 설정한 것과 같다.’
술잔을 기울이며 정보를 취합했다. 혹 쓸만해 보이는 정보가 오갈 때는, 대화에 끼어 술 한 잔을 사는 식으로 이야기를 더 끌어냈다.
동시에 마나가 가득 찰 때마다 마탄을 비축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구석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누군가 술집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따릉-
실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푸른 생머리와 새하얀 피부.
그와 대비되는 검은색의 라이더 수트.
‘제르비아.’
솔직히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추적해 올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정확히 나를 쫓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이거 이런 험한 곳에 웬 미인이 ….”
술을 마시던 한 거한이 제르비아에게 다가갔다.
빛이 번쩍였다고 생각한 순간, 거한의 손목은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끄윽! 이, 이런 씨발!”
자신의 비어 버린 손목을 멍하니 바라보던 거한이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듯 반대편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휘두르려 했다. 곧장 자신의 목울대에 겨눠진 장검이 아니었다면.
“E등급 현상범. 두카트. 강도 및 연쇄 방화.”
그녀는 기본적으로 기억력이 좋았다.
상위 등급의 강력범들뿐 아니라 잡범들의 얼굴과 죄목 하나하나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로.
“제국 경찰청 치안국 부국장 자비르 경위다. 지금부터 이곳의 인원은 내가 통제하며 검문을 실시하겠다.”
제르비아가 검을 쥔 반대 손으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펼쳐 보였다.
순간 실내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두카트란 놈 외에도 뒤가 구린 녀석들이 있겠지.’
“우, 웃기지 마! 혼자서 여기 사람 모두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예상대로, 좌중 중 하나가 앞으로 튀어 나왔다. 피스톨을 꺼내 제르비아를 향해 연달아 쏘았다.
그 잠시의 소란을 타, 나는 목덜미의 패드 위에 손을 얹고 변용 마법을 걸었다.
챙! 챙!
몇 번의 쇳소리와 함께 탄두들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조차 등 뒤로 소름이 흘러내렸다.
라이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녀 역시 세계관 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란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마, 말도 안 돼.”
총을 쏘았던 녀석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모두 그 자리에 동작 그만. 이후로 허튼수작을 부리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제르비아가 다가와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할수록, 실내의 긴장감이 부풀어갔다.
현상범으로 판명된 이들은 제르비아에게 명치를 맞아 하나둘 바닥에 고꾸라져 기절했다.
‘마법으로 얼굴을 바꿨으니 들키진 않겠지만.’
회로는 이미 비활성화시킨 상태였다.
마법 역시 시전 순간 마나가 움직이는 때가 아니면 감지될 염려가 없었다.
‘제르비아를 이용하면 라이카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본래 계획은 그녀를 동남부의 유적으로 유인해 길을 뚫는 데 이용할 생각이었다.
간부들을 상대하는 데 유용한 유물들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제르비아를 열차로 유인해 라이카와 맞닥트리게 한다면.
분명 난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만큼 라이카의 빈틈을 노리기 쉬워질 것이고.
“고개를 들어라.”
어느새 그녀가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다른 이들보다 나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
“…….”
그녀는 분명 내가 마법으로 용모를 바꾸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교도소를 탈옥하던 날, 허공에 마법으로 글씨를 남겼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육안이나 감만으로 마법을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하다.
더 급이 높은 마법사가 디스펠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목에 패드를 떼라.”
나는 순순히 패드를 떼었다.
그 자리엔 푸른 뱀 문신 대신, 내가 마법으로 그린 흉터가 나타났다.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 나는 말했다.
“가리고 다닙니다. 보기 흉측한 모양새라.”
“…….”
그와 동시에 내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엄지와 중지가 번갈아, 특정 박자로 천천히.
초조하거나 긴장감을 느낄 때 나오곤 하던 카인의 습관.
다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내비친 동작이었다.
그녀에게 어느 정도 확신을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탁. 탁. 타닥.
예상대로 그녀의 시선은 내 손가락에 머물렀다.
분명 알아본 것이다. 그녀는 적지 않은 시간 카인을 연구하고, 또 쫓아왔다.
“모두 나가도 좋아. 지금 이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한 마디와 함께 사람들이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술집엔 그녀와 나, 가게 주인, 그리고 기절한 현상범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내 앞자리에 앉아 말했다.
“양손을 머리 뒤로.”
나는 그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이름은?”
“…카르토입니다.”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안쪽 구역 태생이 아니라 신분증 같은 건….”
그녀가 검집 끝으로 내 가방을 가져가 살폈다.
총과 탄창을 뒤적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선 뭘 하고 있지?”
“떠돌이입니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아무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총은 제 몸을 지키려 가지고 다닙니다. 이 일대가 워낙 험한 곳이라….”
딱히 총기가 불법이거나 한 건 아니었다.
외곽은 치안이 닿지 않는 만큼, 오히려 자기 무장 차원에서 사용을 장려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은 그저 방치일 뿐이지만.’
그녀는 가방을 뒤지며 계속해 질문을 던졌다.
내 대답에 막힘이 없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이건 뭐지?”
작은 유리병 하나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 나왔다.
어제 제조했던 독약으로 혹시 사용할 일이 있을까 들고 다니는 상태였다.
“약입니다. 제가 지병이 있습니다.”
그녀가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았다.
무색무취.
게다가 세상에 없는 배합식으로 만들었으니, 그녀가 약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 약병을 살폈다.
내 반응을 떠보는 투였지만, 나는 겉으로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약병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마셔 봐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