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옥한 천재마법사 - 얼음커피 >
#001화. 입소 (1)
“─────!”
“───?”
주위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돌아올수록 몸의 감각이 선명해진다.
기울어진 세상.
뺨에 닿은 콘크리트 바닥.
온몸을 때려 대고 있는 굵은 빗방울.
퍽!
“컥!”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배 쪽에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나는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퍽퍽!
등, 허벅지, 어깨.
몸 곳곳에 발길질이 떨어졌다.
대체 몇 명이 둘러싸고 있는 걸까.
3명? 4명?
“우리가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블루서펜트 간부 배때지를 이렇게 차 보겠어?”
“죄목이 살인죄라며. 그것도 같은 조직원을 죽였다고. 배신자가 목숨 성히 감옥 끌려 들어 온 게 기적이지.”
“나와 봐. 난 이 녀석한테 밖에서 당한 게 있으니까.”
조직. 간부. 배신. 살인. 감옥.
나는 대화를 통해 최대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들이 쓰는 건 한국어가 아니었다.
생전 들어 보지 못한 언어.
그런데도 나는 대화를 아무 문제 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 주변을 살폈다.
내게 린치를 가하고 있는 녀석들은 4명.
제각각의 머리 색과 서구적인 외양.
녹색 옷과 바지. 가슴팍에 박음질 된 번호표.
‘난 분명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는데.’
내가 쓰러져 있는 장소 역시,
어떤 건물의 뒤편으로 보였다.
‘그래, 백진우 그 녀석과 함께, 그 씹어 먹을…….’
띵.
분노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카인 리베르’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현 동기화율 - 65.0%]
[과업 및 특성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작은 불꽃이 타오르며 네모난 창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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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업 - 증오의 불길]
목표: 배신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십시오. (0/3)명
획득 스킬: 과감성, 불굴의 의지, 냉철함
보상: 현실 세계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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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성]
분류: 과업 - 패시브
효과: 결단 후 행동에 거침이 없어집니다.
[불굴의 의지]
분류: 과업 - 패시브
효과: 투지가 꺾이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 간섭에 면역이 생깁니다.
[냉철함]
분류: 과업 - 패시브
효과: 어떤 상황에서도 높은 판단력과 냉혹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순간 흥분이 가라앉았다.
빠른 속도로 머리가 차분해졌다.
손끝에 돌멩이 하나가 만져졌다.
몰래 손안에 감싸 쥔 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녀석들 중 하나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끄, 끄아아아악!”
발길질의 수는 줄었지만, 강도가 높아졌다.
흔들리는 시야 멀리, 이쪽을 지켜 보고 있는 교도관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린치는 그 뒤로 몇 분이 더 지나서야 멈췄다.
“이 정도면 됐겠지!”
“어차피 우리 말고도 벼르고 있는 놈들이 많을 거라고.”
남자들은 교도관에게 다가가 뭔가를 건넸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폐처럼 보였다.
“뒷정리는 내가 하지. 입소 절차가 늦어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으니까.”
이쪽으로 다가오는 교도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의식을 잃었다.
* * *
다시 눈을 뜨자 침대 위였다.
몸 곳곳에서 연고 냄새가 났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 욱신거리며 올라오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튼이 둘러쳐진 침대.
탁상 위의 약상자. 그 외 구급 용품.
풍경으로 보아 어딘가의 의무실 같았다.
사람은 나 외에 없는 듯 사방이 조용했다.
“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엔 감각이 너무도 생생했다.
탁상 위의 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흑발에 푸른 눈동자.
목덜미에 새겨진 푸른 뱀 문신.
낯선 외모의 청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직. 간부. 배신. 살인. 감옥.
블루서펜트. 카인 리베르.
머릿속 퍼즐 하나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달력을 본 순간 퍼즐은 완전한 그림이 되었다.
제국력 1072년. 4월 13일.
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1화의 날짜.
여긴 한국이 아니다.
나는 내가 쓴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
다만 주인공이 아닌, 언젠가 써먹으리라 설정만 짜 두었던 조연이 되어서 말이다.
“하.”
헛웃음이 나왔지만 당황스럽진 않았다.
「냉철함」 특성 덕인지도 몰랐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철조망이 둘린 감옥 벽 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얇은 선이 보였다.
거리가 까마득히 멀어 선으로 보이지만, 저건 벽이다. 이 소설의 주 무대인 제국의 수도를 둥글게 둘러싼 성벽.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아 대륙 어디에서나 ‘벽’을 볼 수 있다.
‘벽 바깥은 완전한 무법지대. 분명 그렇게 설정해 두었었지.’
마법과 과학이 맞물려 발달하고 있는 근대.
벽 안쪽은 풍요롭지만, 바깥은 그렇지 못하다.
황량한 토지와 부족한 자원.
실리 챙기기 바쁜 기업들과 곳곳에 뿌리내린 범죄 조직.
가장 규모가 큰 3대 조직 중 하나가 카인 리베르가 간부로 있던 블루서펜트였다.
‘과업이라고 했었지.’
내 생각에 반응해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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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업 - 증오의 불길]
목표: 배신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십시오. (0/3)명
획득 스킬: 과감성, 불굴의 의지. 냉철함.
보상: 현실 세계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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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큽, 크크…….”
상황이 얄궂었다.
세간엔 카인이 조직을 배신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다.
카인은 배신당했다.
같은 간부였던, 믿었던 동료들에게.
“나와 처지가 같구나.”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아직 100화가량밖에 쓰지 않았었지만, 소설의 플롯은 이미 완결까지 모두 구상해 둔 상태였다.
줄거리는 간단했다.
주인공이 게임 캐릭터에 빙의하고, 수도에서 마법사로서 성장한다.
과업을 따라 ‘벽’을 무너트리고, 대륙의 가난을 몰아낸 뒤 그 끝에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현실로의 귀환. 내게 주어진 과업의 보상도 주인공의 것과 같았다.
이곳이 정말 내 소설 속이라면, 과업을 따라가는 게 옳다. 적어도 정보가 부족한 지금 당장은.
그리고 현실로 돌아간다면.
“……백진우.”
아득.
“팔다리를 잘라 들개 밥으로 던져줘도 시원찮을 새끼.”
순간 자연스레 흘러나온 카인의 말투에, 나는 놀라서 잠시 굳어 버렸다.
[‘카인 리베르’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현 동기화율 - 65.5%]
퍼센트가 올랐다.
그와 동시에 카인의 기억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카인의 삶 그 자체라 해도 좋을 만한, 아주 세세한 기억들.
한순간 받아들이기엔 턱없이 많은 정보량에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비어있던 설정은 알아서 짜여 진 건가.’
나는 소설의 설정을 과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짜 두었다.
피드백 받을 때 너무 설정에 집착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설정을 세밀하게 짜도 빈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그 빈 부분이 차곡차곡 채워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인물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 성격에 동화된다. 이 역시 내가 짜놓았던 설정.’
카인은 조직의 말단에서 간부까지 순수 제 실력으로 올라갔다.
무수한 경쟁자 사이, 얕보이지 않기 위해 위압적이고 날 선 태도를 고수했고, 그것이 그의 성격이 되었다.
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일단은 이 감옥을 벗어나는 게 먼저겠지.’
내가 짠 설정이 이 세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면, 이용할 수 있는 요소가 굉장히 많다는 얘기가 된다.
신처럼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는 건 아닐지라도, 온갖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카인 리베르’의 설정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에 짜두었던 내용이, 당장 어제 보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특성 창을 열어 스크롤을 가장 위로 올렸다.
[기억력]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해력]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현상과 사물을 이해합니다.
「기억력」 특성은 현실 세계의 기억에도 적용되는 듯 보였다.
나는 후에 카인을 주인공의 동료로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조직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략가’ 포지션으로.
따라서 소설을 통틀어 하나뿐인 특성들을 몇 몰아줬었다.
끼익-
내가 ‘카인 리베르’라는 인물을 파악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일어났네요?”
흰 가운에 금발.
입에 문 담배.
나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의 외모.
또각또각-
그녀는 침대 옆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내 시선은 그녀의 명찰로 향했다.
─ 켄트락 교도소 담당 의무관.
─ 에스텔 엘류이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다.
교단에서 파견된 수녀.
소설 후반부 등장 예정이던 조연.
“몸은 좀 괜찮아요? 많이 두들겨 맞았던데.”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맥박을 재고, 상처를 살피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담배 연기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픽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이걸 안 피우면 불안 증세가 와서. 뭐 상태는 괜찮네요.”
“…….”
뻔뻔하지만 매력적인 미소였다.
“당신 밖에서 꽤 유명했다면서요?”
“…….”
“죄수들이 한동안 시끄러웠어요.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 경찰이 블루서펜트 간부를 잡았다는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제 할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일어났다.
빛무리가 내 몸을 감싸자 기운이 북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빛은 사라졌다.
신성 마법.
나는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팔각별 문양을 바라보았다. 교단이 사제나 수녀들에게 내린 권능의 표식이었다.
“어쨌든 안에 당신한테 앙심을 품은 사람이 많더라고요. 죄수, 교도관 불문하고.”
“…….”
“벙어리에요? 입은 안 다쳤던 거 같은데.”
“……생각을 좀 하느라.”
“와, 목소리 되게 허스키하다. 듣기 좋네요. 곱상한 얼굴엔 조금 안 어울리지만.”
“…….”
현실로 돌아가면 그녀의 설정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말수가 없는 과묵한 캐릭터로.
“팔 한 번 뻗어 볼래요?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나는 지시에 따랐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두꺼운 책 한 권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팔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푹 꺼졌다.
“처음 치료할 때 혹시나 했는데, 오른쪽 손목 힘줄이 끊겨 있네요. 양 발목도 그럴 거예요.”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놀라진 않았다.
배신자들 역시 모두 간부직.
보스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함정을 파 카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다.
거기에 카인의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모두 끊어 버렸다.
다만 현장에서 급히 이루어진 행동이었고, 타이밍 맞게 도착한 경찰을 피해 녀석들은 달아났다. 그 덕에 왼쪽 손목은 무사했다.
“이거 내 힘으론 치료 못 해요. 차라리 뼈를 붙이거나 그런 건 쉽지. 적어도─.”
“교단 본부에서 축복을 받거나, 신체 개조가 아니면 회복이 안 되겠지.”
“─잘 아네요. 밖에서 당한 것 같은데, 앞으로 의무실에서 당신 얼굴을 자주 볼 것 같네요.”
맞는 말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3대 조직의 간부.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그만큼 매력적인 먹잇감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내겐 ‘배신자’ 낙인이 찍혀있다.
같은 조직원을 살해한 죄는 조직을 불문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곧 교도관이 와서 입소 절차를 밟으러 갈 거예요. 잠시 쉬고 있어요.”
또각또각. 철컥-
그녀가 의무실을 나갔다.
“켄트락 교도소라고 했지.”
대륙 끝 오지, 한쪽 면이 바다에 맞닿아 있는 강력범 수감 시설.
분명 그렇게 설정해 두었었다.
안쪽의 수용 시설은 죄수 유형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아인종이나 마나 유저 같은 괴물들을 일반 죄수들과 함께 가둬 놓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특성 창을 열어 스크롤을 내렸다.
[원소 친화성]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배울 수 있는 마법의 속성 제한이 사라집니다.
[마나 감응]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마나를 느끼고 다루는 능력이 대폭 향상됩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주위를 흐르는 마나가 느껴졌다. 뭐랄까, 따뜻한 물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다.
‘원래대로라면 상급자의 도움을 받아 몇 년 수련을 쌓아야 겨우 느낄 수 있는 게 마나인데, 지금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몸속은 텅 비어있다.
마법 사용이나 ‘기’를 발현키 위한 마나 회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대륙 통틀어 몇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제대로 썩혔군.’
카인이 자신의 재능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마나 유저가 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일반 죄수들이 수용되는 1동으로 분류될 건 확실하고. 일단 내 몸을 지킬 힘이 필요한데.’
나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목의 힘줄이 끊겼음을 재확인했다.
카인은 마나 회로를 구축하는 대신 무도를 익혔다. 그 수준이 상당했으니, 몸이 멀쩡했다면 1동에서 입지를 다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일이다.
‘카인. 네 의지를 거슬러야겠다. 대신 복수는 완벽하게 해줄 테니.’
나는 호흡을 고르고 대기 중의 마나를 몸 안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탈옥을 위해선 반드시 1동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교도 인력 대다수가 2, 3동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에 1동의 감시는 상대적으로 느슨할 수밖에 없다.
느슨한 감시의 이유를 한 가지 더 꼽자면.
“역시 안 되는군.”
성인이 지나면 마나 혈이 굳어 회로를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죄수가 안에서 저 혼자 마나 회로를 구축해 탈옥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방호 슈트와 총으로 무장한 교도관들을 어찌어찌 뚫는다고 해도 그 앞엔 마나 저항 합금으로 된 외벽이 기다리고 있다.
켄트락 교도소에서의 탈옥은 불가능하다.
끼익-
문이 열리고 교도관이 들어왔다.
“가지.”
작가가 짜 놓은 숨겨진 설정을 알고 있기라도 하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