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로세움의 회귀자-200화 (200/205)

< 200화. 새로운 시야(5) >

“크윽, 제길!”

평범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한 20대 후반의 남자.

‘뭐지?’

느릿느릿한 검, 거친 호흡, 바닥에 딱 달라붙듯 움직이는 다리.

한 눈에 보기에도 스텟이 엄청나게 낮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인데.’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나는, 플레잉코치 시스템을 열었다.

[이름 : 오현석(닉네임 : 오현석)]

[근력 : 28] [민첩 : 31] [체력 : 30]

[정신 : 48] [지력 : 19] [마력 : 0]

[아세리안 코멘트 : 안우진 님과 같은 지구의 대한민국 출신.]

[피넛엘 코멘트 : 전직 군인. 특별한 것 없음.]

[포르도엘 코멘트 : 대화 나눠봤는데 재미없음.]

역시나 별다를 게 없는 상태창.

‘뭐였더라.’

나는 존재감을 숨긴 채, 조금씩 고도를 낮춰 오현석이라는 남자에게 가까이 갔다.

이질적인 기운을 더 자세히 느끼기 위해선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느끼게 된.

‘아!’

익숙한 자연의 향기.

‘정령이었군.’

어디서 만나본 익숙한 기운인가 했더니, 과거 아르웬에서나 느껴지던 자연의 기운이 오현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오현석이라는 남자에게 향했다.

“헉, 안우진 님이다!”

“고위 리그······. 나도 언젠가는 꼭.”

“우와, 날개 진짜 멋있어.”

오현석과 30미터를 남겨놓고 부드럽게 착지하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대련하던 플레이어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오현석 씨?”

“······!”

“오현석 씨!”

“예, 옛!”

짧게 끊어지는 호흡,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몸.

‘완전히 긴장했군.’

내가 본인의 이름을 부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오현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에 오현석 씨가 또 있습니까?”

내 물음에 동공이 흔들리는 오현석.

“갑시다.”

나는 오현석을 이끌고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섰다.

그리고 가는 길에 마주친 이세연에게, 간단한 다과와 차, 그리고 포르도엘을 호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긴······?”

“제 집무실입니다. 편하게 앉으시죠.”

5평 정도 크기의 방.

집무실 의자에 앉은 나는 오현석에게 자리를 권하며, 인벤토리에서 블라디미르 가면을 꺼냈다.

그리고는 악마의 눈으로 오현석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과연······.’

“······!”

가면을 쓰고 바라보자, 흠칫하는 오현석.

왜 불렀냐고 묻지도 못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단 포르도엘이 와야 하는데.’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셔도 됩니다.”

이세연이나 포르도엘, 둘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네에, 실례할게요. 어머, 웬일로 가면을······. 앗, 손님이 와 계셨네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는 예상 바깥의 인물이었다.

“아세리안 님?”

가슴깨까지 내려온 백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세리안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오현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6기수 이후로는 팀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면서, 아세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플레이어의 숫자도 줄어들었기 때문.

요새는 극소수의 몇몇만이 아세리안과 독대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 가장 빈번한 건 나였고.

“아, 당직 오퍼가 정식으로 들어와서요. 바쁘시면 조금 이따 다시 올게요.”

“아뇨, 지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현석을 힐끗 살핀 나는, 아세리안을 보며 자리를 권했다.

포르도엘이 오지 않는 이상 딱히 나눌 대화도 없었기 때문.

“그럼 얼른 말씀드리고 갈게요. 6주 뒤에 당직이 있구요,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불참이 가능해요. 대신 그게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주신회에 안건을 올려서 기본급 삭감이라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어요.”

“6인이 한 조로 움직인다길래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가 보군요.”

“네, 맞아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첫 당직 정도는 제가 타당한 사유를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지.’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잘하면 시간만 때우다 오는 걸로 포인트를 벌 수 있으니, 오히려 당직의 주기가 더 짧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뇨, 참가하겠습니다.”

“네, 그럼 오퍼 수락할게요. 그럼 전 이······.”

철컥!

“안우진 님, 저 찾으셨다면서요? 어! 다시 가면 쓰기로 하신 거예요?”

“······?”

“어? 언니, 아니 아세리안 님? 그리고 이분은······ 오현석 님! 맞죠?”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선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포르도엘.

“이게 무슨 상황이져?”

집무실 안에 있는 인물들을 싹 스캔한 그녀가 눈을 굴린다.

예상하지 못한 조합을 보고 조금은 당황한 모양.

갑작스러운 포르도엘의 등장에, 아세리안이 내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마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일단 앉으시죠.”

이제는 거의 각 잡고 앉아 있는 오현석을 뒤로하고, 나는 포르도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아뇨, 다름이 아니라 포르도엘 님이 정령술에도 조예가 깊으시다고 해서 말이죠.”

“한때 정령술이 신기해서 깊게 파고든 적은 있어요.”

“엘프 말고도 정령술을 쓸 수 있습니까?”

오현석을 보고 난 뒤,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콜로세움 내부에서 지금껏 만났던 정령술사는 모두 엘프였기 때문.

그러자 포르도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령원소석인가? 뭐 특별한 아이템이 있으면 정령력 각성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령원소석이라······.’

특별한 능력을 각성시켜 주는 각성석의 한 종류인 모양.

‘어쨌든 가능하긴 하다는 거군.’

포르도엘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이 정령술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은데, 포르도엘 님이 전담으로 케어 좀 해 주시죠.”

“······네?”

내 부탁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포르도엘.

곁에서 잠자코 있던 아세리안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 팀 내부에 엘프 몇 명 있지 않아요? 차라리 걔네를 키우는 건 어때요?”

그녀의 말대로, 이미 정령력을 다룰 줄 아는 엘프들을 키우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현석에게 권속 계약을 걸었다.

[<권속천사眷屬天使>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 ‘오현석’을 권속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한 번 적용 시 해제할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등록된 권속(10/10)]

[플레이어 ‘주창범’]

[플레이어 ‘모용악’]

[플레이어 ······.]

“어······ 권속, 계약?”

그러자 지금껏 얼어있던 오현석이 작게 읊조렸다.

“에에에에? 설마 이분께 권속 계약을 거신 거예요?”

그 혼잣말을 들은 포르도엘이 경악했다.

아세리안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 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볼 정도.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반응 속에서, 나는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

처음부터 권속 계약을 맺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호기심일 뿐.

근데 블라디미르 가면을 통해 보게 된 상태창이 모든 걸 바꾸었다.

[이름 : 오현석]

[성향 : 열정]

[근력 : 28] [민첩 : 31] [체력 : 30]

[정신 : 48] [지력 : 19] [마력 : 0]

[각성 능력 : <정령왕> <원소통달> <마력관통> <물아일체物我一體> <하급검술> <하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미친 각성 능력이군.’

하위 리그에서 내게 죽었던, 아르웬을 통해 정령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그녀가 가지고 있던 각성 능력은 특급 정령술.

하지만 오현석은 이미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저, 정령력을 각성하지 못해서 지금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을 뿐.

‘무시무시한 괴물로 키워주겠어.’

스텟이 좀 낮지만, 그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느덧 피넛엘이 팀 투지에 들어온 지 2년째.

그녀에게 부탁하면 제대로 굴려줄 것이다.

‘이걸로 권속 설정은 끝났고.’

“······?”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현석을 뒤로하고,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상위 리그에서도 돌풍을 이어 나가는 팀 ‘투지’. 하이블러드나이트143에서 146까지, 네 경기 연속 승리를 챙겨 가다!

―플레이어 고건하, 승급 성공! 이걸로 팀 투지엔 상위 플레이어만 일곱 명째.

―뇌전 스킬로 무장한 팀 투지. 피라미드 구조에서 나오는 포인트로 일부 몇 명의 플레이어들에게 지원 집중?

―상위 게임 메이커 “우리는 지금, 위대한 팀의 태동을 지켜보는 중일 수도 있다.”

└와 씨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고건하도 뇌전 스킬 들고 있더라? 걔네는 돈이 썩어 나나?

└딱 보면 모름? 밑에서 번 포인트로 위에 몰빵 중인 거지 뭘 ㅋㅋ 저런 구조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음 ㅅㄱ 유망주도 잘 키워야지.

└윗 댓 / 눈이 삐었나 ㅋㅋㅋㅋ 팀 투지가 유망주 홀대한다고? 그런 팀이 역대급 생존율이랑 승률을 찍고 있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최근 몇 경기 보면 피라미드 몰빵 중인 게 맞긴 한데ㅎ 거기가 팀 투지라면 얘기가 다르지 ㅎㅎ;

└ㅇㅇ 최근에 급성장한 거 치고는 뎁스가 굉장히 두꺼운 느낌임. 저런 팀은 무너지기가 쉽지 않지.

└근데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몇 개 있다? 팀 투지 애들 보면 스텟도 평타 이상, 템이랑 스킬도 잘 갖춰져 있고, 기본기도 확실함. 이게 한두 명이 아니라, 소속된 팀원 전체가 다 이럼 ㅇㅇ 이게 가능한 건가?

권속 설정을 완료하고 4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폭루유성爆淚流星!】

‘열두 시에 27. 그다음 일곱 시에 19.’

위에서 흩뿌려지는 거대한 유성들.

공간을 읽은 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유유히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펄럭! 펄럭!

“어딜!”

그러자 근처를 배회하다가, 순간적으로 쇄도해 검을 휘두르는 피넛엘.

‘네 시 방향 13.’

앞뒤 좌우로만 피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허공은 위아래도 존재했다.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가 몇십 배 이상 늘어났다.

공간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내게 있어서, 하늘이라는 전장은.

“크윽, 도대체 잡을 수가 없군.”

오히려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

아래로 활강하다가, 날개를 튼 나는 가볍게 피넛엘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젠 내 몸의 일부 같아.’

어깨에 달린 두 개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진다.

날개의 가동 범위, 내가 원하는 움직임을 위한 적절한 힘,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식으로 통제하는 것까지.

이 모든 감각이 익숙해지자, 포르도엘과 피넛엘은 더 이상 내게 유효타를 넣지 못했다.

“이익! 이대로 포기 못 해!”

내가 모든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포르도엘이 이를 악물고 주문을 영창했다.

‘애쓰는군.’

【싸늘한 혹한의 창!】

격렬하게 들끓던 공기 중의 마나가, 이내 수천수만 개의 얼음으로 된 창을 만들어 낸다.

그러더니 64방위를 점한 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건 쉽지 않겠는데?’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곧장 날개를 접으며 급하강했다.

날아드는 얼음 창들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춰야 했으니까.

‘세 시 방향 17로.’

펄럭! 펄럭!

‘이쪽 공간이 비는 군.’

그러고는 한 번씩 날갯짓으로 방향을 조금씩 바꾸며, 그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말도 안 돼! 저걸 피했다고?”

지상을 폭격한 마법들이 먼지구름을 만들어 내고, 그 사이에서 유유히 날갯짓한 나는 포르도엘에게 다가갔다.

직전의 마법을 끝으로, 60분의 제한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가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와······ 저 살면서 이렇게 날개를 빨리 다루시는 분은 처음 봐요.”

펄럭! 펄럭!

마치 허공에서 정지한 듯, 제자리를 유지한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포르도엘.

곁에 있던 피넛엘 또한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진심으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두 분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흠, 듣기 민망하구나. 그대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깨쳤을 것이다.”

“피넛엘의 말이 맞아요. 고작 6주 만에 이 정도의 비행이 가능할 줄이야······.”

두 사람의 감탄에,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안정화시켰다.

1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피해다니기만 하는 건, 체력 소모가 제법 심한 일이었다.

“내일도 훈련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당연하죠!”

지금까지 나는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훈련했다.

기본기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다간 안 좋은 습관이 들 수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오늘부로 그것도 끝.

“그럼 내일부터는 저도 공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비행 자체는 마스터한 것 같거든요.”

‘이젠 싸움에 익숙해져야지.’

“안 그래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든지 도와주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피넛엘.

“어······. 저는 좀 바빠질 거라······.”

하지만 포르도엘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 6주간 신나게 공격을 퍼부으며 나를 약 올렸던 포르도엘.

내심 그녀에게 작은 복수를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차리고 저러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아세리안 님께 미리 허락을 구해놨습니다. 하루 종일 저를 도와주셔도 괜찮다더군요.”

“아······.”

“그럼, 내일 뵙죠.”

나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일부러, 환하게.

‘내일부턴 고생 좀 하게 될 거야.’

물론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러자 내 미소를 본 포르도엘이 울상을 지었다.

“큰일나따······.”

< 200화. 새로운 시야(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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