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해방(7) >
율재 컨설팅 사무실.
아니, 사채업자의 소굴을 빠져나온 나는 스타벅스에 들렸다가, 택시를 타고 동대문에 도착했다.
‘저 사람이 좋겠군.’
띠링!
[지구인 ‘송윤일’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길거리를 지나가던 한 학생의 그림자를 밟은 후, PC방으로 향했다.
혹시 경찰이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뒤쫓기게 될 경우 탈출하기 위한 용도였다.
신고하면 죽이겠다고 살기를 뿌려대며 협박했지만, 앞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비회원 후불 카드 하나 주세요.”
“저희는 후불 개념 없어요. 자리에 앉아서 회원 가입하고 키오스크에서 충전하셔야 해요.”
“비회원 선불도 안 됩니까?”
“되긴 하는데 그럼 1시간에 1,500원인데요.”
“그럼 비회원으로 만 원치 해주세요.”
“네에, 네에.”
몇 년 만에 PC방을 와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말 많이 변했군.’
귀찮음이 한가득 배어 나오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뒤로한 채, 주변을 살펴본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데스크 위에 써 있는 볶음밥, 피자, 만두, 커피 등등 엄청나게 다양한 메뉴들.
여기가 식당인지, 카페인지, 아니면 PC방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요.”
알바생이 내미는 카드를 챙긴 나는 내부를 스캔했다.
출구는 두 개.
내가 방금 들어온 곳의 반대편에 또 다른 문이 있다.
‘후문으로 나가는 길이 있나 본데.’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가니 보이는 좁은 계단.
계단을 타고 1층으로 올라가자, 건물의 주차장 쪽으로 나가는 출구가 존재했다.
‘이쪽으로 나가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겠어.’
주변 지형을 눈에 담은 나는 다시 PC방으로 돌아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정문과 후문의 딱 중간 지점이었다.
└와 ㅋㅋㅋㅋ 여기 진짜 많이 발전한 성계인데?
└깜놀;; 지구 성계 처음 봄 ㄷㄷ
└자동차도 그렇고, 컴퓨터라는 것도 그렇고 신기한 게 진짜 많네.
컴퓨터를 켠 나는 곧바로 검색 사이트에 접속했다.
지금부터 내가 조사할 것은 두 개.
첫 번째는 북한 독재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북한에 침투할 방법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까다롭네.’
검색창에 등장한 정보들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재자의 위치가 명확하게 나와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을뿐더러, 예상되는 은신처만 해도 십수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또한 매일같이 은신처를 돌아다니며, 지하에는 따로 탈출 루트도 있고, 경호 인력도 굉장히 많은 모양.
보안과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식 행사에 나왔을 때 죽이는 게 베스트이긴 한데.’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 난이도가 수직 하락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제한 시간 : 719:58:12]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어.’
이번 미션엔 제한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
그냥 죽이러 가도 30일이란 시간은 빠듯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직접 침투해서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
└쟤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독재자임?
└와 ㅋㅋㅋ 일국의 왕이 저렇게 볼품없어 보이는 건 처음인데 ㅋㅋㅋ
└ㅋㅋㅋㅋㅋ기다려 보셈 내가 겁나 웃긴 서브 미션 걸어보겠음.
은신처 위치와 관저, 자주 다닌다는 지역들을 체크한 나는, 그다음부터 침투 경로를 물색했다.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비무장 지대를 지나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북한 주민들의 탈북 루트를 거꾸로 오르는 방법이다.
‘비무장 지대는 쉽지 않겠어.’
비밀스럽게 철책을 넘어, 주변을 수색할 군인들 몰래 침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비무장 지대 곳곳에 박혀 있을 지뢰.
그것만큼은 초감각으로도 찾는 게 불가능했다.
초감각은 미세한 움직임, 작은 소리, 그리고 초음파처럼 퍼져 나가는 마력장을 통해 공간을 읽어내는 능력이었으니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으며, 땅속에 박혀 마력장으로 읽을 수도 없는 지뢰는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때부터 나는 밤새도록 침투 경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띠링!
[대신 ‘로키’ 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타깃 죽일 때,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어? 얘가 아니네? 미안, 잘못 찾아왔어.’라고 귀에 속삭이기.
[보상 : 100,000 P]
다음 날 아침.
PC방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정장부터 한 벌 맞췄다.
어느 시간, 어디에 있든 위화감을 가장 적게 주는 복장이기 때문이다.
카페에 있으면 미팅을 위해 누굴 기다리는 것, 사우나에 있으면 일하다 말고 땀 빼러 온 것, PC방에 있으면 일하다 말고 농땡이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슬슬 출발해야겠군.’
동대문에서 나머지 볼일을 처리한 나는, 택시를 타고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앞.
주변에 CCTV가 없는지 체크하는데, 다가온 50대 중반의 여성.
“제일 기획 주창범 대리님?”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맞습니다. 하진화 님?”
“어? 동포셨군요!”
‘뭐야?’
순간 나는 당황했다.
여성이 중국어로 내게 친근함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자동 번역 시스템.’
콜로세움에는 자동 번역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
어느 성계를 가든, 소통이 원활하도록 자동 번역이 되게 해준달까.
덕분에 미션 수행을 할 때 용이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
바로,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
‘쯧, 중국인인 척 해 야겠군.’
한마디로, 중년 여성의 귀엔 내가 지금 능숙한 중국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동포셨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서류 좀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여성에게 미리 준비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길림 연변 국제 호텔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정확히는 호텔과 길림 은행 사이에 있는 골목이요. 진짜 중요한 서류니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뻘뻘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데, 하진화가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불법은 아니죠?”
“물론입니다. 그냥 서류 봉투일 뿐이에요. 만져 보시죠.”
“흠······.”
“비행기 탈 때 소지품을 스캔하는데, 불법적인 거면 이렇게 드리지도 않습니다. 몸 어딘가에 숨기지 않는 이상 들통날 테니까요.”
“그렇긴 하죠.”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진화.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보내요? 팩스로 보내거나 국제 우편으로 보내면 되잖아요.”
“급한 계약 서류라 그렇습니다. 날인 때문에 원본을 보내야 하는 거구요.”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여기, 선금 500만 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하얀 돈 봉투를 건넸다.
5만원권 100장.
“무사히 건네면 천만 원을 더 드릴 겁니다. 여기 보시면 도장 보이죠? 이게 훼손되면 추가금은 드리지 못하니까 주의해 주시구요.”
서류 봉투에는 중세 시대처럼 왁스를 녹여 찍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뜯을 때 굳은 왁스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누군가가 열어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용물은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A4용지였지만.
‘디테일은 완벽해.’
오늘 아침, 동대문에 있는 인장印章 거리에서 급하게 만들어 찍은 것.
이 정도면 하진화 쪽에서도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어요. 제가 잘 전달할게요.”
“내일 저녁까지입니다. 도착 장소에서 가슴 높이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으면 누군가 올 거예요. 10분 전에 저한테 문자 주시구요.”
“네.”
고개를 끄덕이곤, 홍대입구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하진화.
나는 서둘러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띠링!
[지구인 ‘샤젠화夏珍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걸로 여권 문제는 끝.
‘됐어.’
이제 북한에 들어갈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진화와 헤어진 나는 다시 PC방으로 돌아왔다.
‘이쪽 산으로 우회하면 되겠군. 여긴 뭐지? 군부대인가? 그럼 이쪽으로······.’
그리고는 하루 종일 구글 지도를 보며 북한의 지리를 숙지했다.
침투한 뒤에 움직여야 할 방향, 거리, 그리고 타깃이 있는 평양 시내의 구조 등등.
보다 완벽에 가깝게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도 맵을 다 볼 수 있다고? ㅋㅋㅋㅋㅋㅋ 이거 그냥 맵핵 아니냐?
└야, 아그야. 오늘은 ‘짜파게티’라는 걸 한 번 먹어보너라.
└ㅋㅋㅋㅋㅋㅋㅋㅂㅅ 그걸 서브 미션으로 걸어야지, 여기다 대고 쓰면 렌한테 보이겠음?ㅋㅋㅋㅋㅋ
└무슨 한 공간 안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 ㅋㅋㅋㅋㅋㅋ 진짜 개 사기네 ㅋㅋㅋㅋㅋ
└ㄹㅇ ㅋㅋ 맵핵으로 적진 한번 싹 스캔해주고, 가만히 앉아서 정보 얻어내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화장실도 갈 수 있음 ㅋㅋㅋㅋ
‘여긴 변한 게 없네.’
콜로세움에 들어간 이후, 지구엔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북한의 독재자가 도발하고, 남한은 그저 유감만 표명할 뿐.
‘미카엘이 왜 여기로 보냈는지 알 만하군.’
그렇게 생각하자, 왜 지구 성계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중간계, 즉 지구를 위협할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겠지.
[제한 시간 : 675:17:42]
지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렇게 밤을 새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울리는 핸드폰 진동.
이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건 하진화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때가 됐군.’
상태창에 있는 그림자 표식 목록을 확인하니,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 하나가 깜빡거린다.
대략 서울에서 연변까지의 거리.
‘슬슬 움직여 볼까.’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블랙진 청바지,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모자, 그리고 까만 마스크.
이 정도면 어둠 속에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이동.’
[지구인 ‘샤젠화’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간 시야가 반전되며, 가로등 하나가 비추고 있는 깜깜한 골목이 보였다.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나를 등진 채 서 있었다.
“하진화 씨?”
“어맛! 아이고, 깜짝 놀랐잖아요. 주창범 씨한테 서류 받으시는 분이죠?”
“맞소.”
“여기요. 한 번도 안 열어봤어요.”
“음. 물건 잘 수령했소. 천만 원이라고 그랬던가?”
내 물음에 눈을 빛내는 하진화.
진짜로 천만 원을 다 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 맞아요.”
“여기있소. 안전하게 배달해 줘서 고맙군.”
“근데 중국분이 왜 한국 돈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인이 배달올 수도 있다고 그래서 미리 환전해 뒀소. 그럼, 이만.”
“정말 고마워요. 사업 잘되시길 바랄게요!”
몸을 돌려 골목을 나서자, 뒤에서 들려오는 하진화의 외침.
나는 굳이 대답해 주지 않은 채,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야 해.’
내가 향하는 곳은 북한의 남양.
개마고원보다도 위에 있는, 함경북도 최북단 지점이었다.
사실상 평양에서 가장 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압록강을 통해 들어가는 것보다, 무려 3배 가까이 멀다.
‘체력 분배의 싸움이겠군.’
그럼에도 내가 남양을 선택한 건, 단 하나였다.
압록강 쪽으로는 평야밖에 없으니까.
북한은 이동이나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는 나라다.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조차 여행증이나 통행증이 없으면 불가능.
심지어 수도인 평양은 특별한 허가증이 없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된다.
‘정말 개같은 나라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평양까지 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가는 동안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는 것.
그러려면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함경북도에서 이동할 수밖에.
인적이 드문 외곽까지 빠져나온 나는, 인벤토리 안에서 달의 메아리를 꺼내 몸에 둘렀다.
띠링!
[그믐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영롱한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5%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36%]
중천에 뜬 그믐달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미리 음력을 계산해보고 왔기에, 오늘 그믐달이 뜰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연변에서 북한의 국경까지는 26킬로미터.
그 사이를 거대한 장백산맥이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밤 안에 대동강을 건널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황.
‘달빛이 얕을 수록 좋지.’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 리그]
[근력 : 35(+5)(+10)] [민첩 : 41(+5)(+16)] [체력 : 35(+5)(+10)]
[정신 : 49(+5)(+24)] [지력 : 30(+10)] [마력 : 35(+5)(+10)]
[적용 특전]
[역천자 : 모든 스텟 +20%] [최강의 성계 : 모든 스텟 +17%]
[달의 메아리 : 모든 스텟 +1%] [영롱한 달빛 : 모든 스텟 +10%]
[천뢰십보 : 민첩 +30%] [열반 : 정신 +30%] [대천사의 눈물 : 정신 +40%]
이 정도 밝기면 충분히 침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러 가볼까.’
* * *
[대신 ‘로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어? 미안하다. 너가 아니네?’ 미션 안 받을 거냐?
[보상 : 130,000 P]
< 188화. 해방(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