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해방(5) >
“헤헤, 오퍼가 들어왔다구요. 그것도 무려 승, 급, 샷!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티켓이요!”
“오퍼가 벌써 들어왔습니까?”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의아했다.
‘리그를 정상화하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텐데.’
플레이어의 절반 가량이 죽으며 거의 초토화 직전까지 갔던 상위 리그가, 당장 저번 주부터 다시 열리기 시작한 상황.
처리할 일이 제법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내 승급전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연락을 받고 저도 좀 의외였어요. 당분간은 산적해 있을 중간계 미션 위주로 뿌릴 것 같았거든요.”
아세리안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날짜는 언제입니까?”
“하이블러드나이트143. 딱 한 달 남았어요.”
‘한 달이라······.’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승급전 오퍼치고 준비 기간이 짧은 편.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새롭게 의지를 다진 이후, 언제든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야 좋지.’
지금 당장 출전하라고 해도 문제 없이 수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미카엘이 일을 잘하네.’
1급 치천사 미카엘.
네 명밖에 없는 사대 천사 중 한 명이자, 열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
나는 그녀에게 새삼 감탄했다.
내 독주를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도 성계 대항전을 잘 마무리했으며, 그걸 발판 삼아 단숨에 상위 리그를 재오픈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일찍 내 승급전을 연다는 건?
‘정상 궤도로 올릴 추진력을 만들겠다는 뜻이겠지.’
현시점에서 티켓 파워가 가장 센 건, 바로 나일 테니까.
“게임 유형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에도 단독 미션이에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요즘 삼지옥이 잠잠해서, 안우진 님을 위한 경기를 만들기가 까다로울 테니까요.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격차도 심하구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리그 문턱에 있다 보니, 리그의 미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충 감이 오는 상태였다.
중간계, 그리고 무스펠하임과 니플헤임, 헬하임으로 이어지는 삼지옥에서 마계의 준동을 막는 것.
그게 플레이어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수락한다고 회신할까요?”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아세리안.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답을 정해놓은 채로 물어보고 있는 거였으니까.
‘승급전······.’
상위 리그에서의 마지막 경기.
과거의 나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거대한 벽을 두드릴 기회.
1회차와 2회차, 그 모든 걸 가를 전환점.
“네. 참가하겠습니다.”
전력으로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그 기로 앞에 서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세리안.
“······안우진님이랑 제가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요. 고위 리그.”
그녀는 과거를 상기하듯,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이 목소리가 제법 촉촉해져 있었다.
‘감회가 남다르겠지.’
고위 플레이어를 배출하는 순간, 그녀의 위상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질 테니까.
그런 아세리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내가 묵례하자, 똑같이 고개를 숙이는 아세리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훈훈하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
“······?”
그때, 아세리안이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아, 참. 이번 경기는 특히 어려울 테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그랬어요.”
“어려울 거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 메이커가 난이도에 대해서 미리 얘기해준다는 게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미션이 나오길래? 라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특히 어려울 테니까, 라······.’
잠시 상념에 잠겼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고위 리그로 올라가는 길이 쉽다면, 오히려 과거의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테니까.
어떤 미션이 나오든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승리로서 증명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각오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머리가 핑 돌면서 주변 사물이 여러 줄기의 선으로 갈라져 보였다.
“쿨럭, 쿨럭!”
입에선 끝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항복이에요.”
당소소의 차분한 목소리.
띠링!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백독불침百毒不侵>을 각성하셨습니다.]
‘하······. 백독불침이라.’
눈앞에 뜬 알림창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피를 게워 냈더니 로브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거기다 무슨 독을 썼는지 피부 가죽도 벗겨지고 있고, 온몸엔 붉은 반점이 오돌토돌 돋아났다.
완전 걸레짝이 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누가 이긴 건지 모르겠군.’
반면에 당소소는 무척 멀쩡한 모습이었다.
녹색 무복에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달까.
“오늘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는 당소소.
‘독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나는 그녀에게 치를 떨었다.
지그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독 가루가 흩날리고, 암기가 쇄도한다.
비극심우선과 차폐의 면사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 그녀에게서 독공을 막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 탓에 나는 매일같이 걸레짝이 되고 있었고.
[정신 : 94]
‘만능 해독제만 없으면 진짜 무시무시할 텐데.’
그래서 무척 아쉬웠다.
콜로세움은 잘린 팔도 다시 붙여주는, 엘릭서라는 전설의 물약도 존재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만능 해독제 같은 물약도 있었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적어도 상위 리그까진 그녀의 상대를 찾기 힘들었으리라.
뭐, 전투 중에 해독제를 마실 수는 없겠지만.
“수고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보죠.”
“네. 감사합니다. 휴우, 저도 이만 독을 만들러 가봐야겠네요.”
조막만 한 주먹으로 어깨를 톡, 톡 치는 당소소.
나는 그녀와 함께 대련실을 빠져나갔다.
“으으······.”
“아직도 어지러운 것 같아······.”
“우웩!”
공터로 나오자, 비척비척거리며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 하나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없을 정도였다.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사람, 눈이 퀭해서 넋을 놓고 돌아다니는 사람.
“우웩!”
그리고 간간이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까지.
‘좀비가 따로 없군.’
“안우진 님!”
그런 그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외침.
안색이 하얗게 질린 카이로시아가 나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당소소를 찌릿! 하고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안우진 님이 건의해서 만들어진 훈련이라면서요?”
“맞아.”
“그럴 줄 알았어. 어휴, 이렇게 정신 나간 훈련을 안우진님이 아니면 또 누가 생각하겠어요?”
투덜대는 카이로시아를 뒤로하고, 나는 플레잉코치 시스템으로 그녀의 스텟을 확인했다.
기존에 카이로시아의 정신 스텟은 91.
그런데 지금 보니 MAX 스텟인 99까지 상승해 있다.
‘나쁘지 않네.’
그 모습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정신 스텟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을 줄이야.’
내 건의로 인해 최근, <독 원샷하기> <독 샤워하기> <독 찍어 먹기> 같은 훈련 커리큘럼이 추가된 상황.
덕분에 카이로시아뿐만 아니라, 팀 투지에 소속된 모든 팀원들이 정신 스텟에서 급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파급력은 굉장했다.
‘대박이야.’
체력 30% 미만 구간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근민체도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로 가면, 초반의 나와 비슷한 속도로 스텟을 올릴 수 있는 팀원도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스텟이 전체적으로 훨씬 상승했다는 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더 늘어나겠는데?’
플레잉코치 시스템을 통해 들어올 포인트의 양도 훨씬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아세리안의 표정이 안 좋던데.’
독이 생각보다 엄청 비싸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독의 재료가 고가라는 데에 있었다.
팀 투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2만 명에 가까워진 상황.
그에 따라 커리큘럼 운영에 들어가는 금액이 어마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부활 가능한 대련장을 하나 더 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꼭 지어야 할까요?
―독의 치사율이 너무 높아서요. 수련 중에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휴우······.
그에 따라 최근 낭비되는 골드가 없도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아세리안.
대련장을 새로 지어달라고 했을 땐 기겁을 할 정도였다.
―안 지어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정말요? 다른 방법이 있어요?
―죽으면 그냥 운 나빴구나 생각하는 거죠, 뭐.
―······지어드릴게요.
나중에는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신 스텟 훈련의 효율이 너무 좋아,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찌릿! 하고 나를 째려보긴 했지만.
“당소소 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모두들 방독면이랑 위생용 장갑까지 꼈나요?”
“네!”
“알겠어요. 안우진 님, 아세리안 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용인의 부름에 총총 걸어가는 당소소.
그러자 100명의 사용인이 그녀를 호위하듯 따라붙기 시작했다.
‘돈 들어갈 곳이 많긴 하겠군.’
모두 당소소를 위해 고용된 사용인들이었다.
현재 팀 투지에서 독을 제조할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
그런데 2만 명 분량의 독을 제조해야 한다.
혼자서 그 모든 걸 만들려면 24시간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뭐, 서로 윈윈이지.’
아세리안은 중개 거래소에서 보기 힘든 독을 구해서 좋고, 당소소는 아세리안의 돈을 이용해, 다른 성계에서 나오는 각종 재료들로 독을 제조해볼 수 있어서 좋고.
서로가 원하는 걸 하나씩 주고받았다고나 할까.
“참나, 별꼴이야. 그냥 제조법만 알려주면 될 걸.”
그 모습을 보던 카이로시아가 투덜댔다.
그녀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배어 나왔다.
이전에 팀 투지에서 전속 사용인이 붙은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별걸 다 부러워하는군.’
그런데 당소소에게 전속 사용인이 붙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독은 가문의 비기秘技.
누군가에게 공유할 수 없으니, 직접 통제해서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팀 내에서 당소소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불가한 인재가 되었으니까.
“흥! 저도 효율적인 훈련법을 만들어 내고 말겠어요.”
“효율적인 훈련법?”
그런 당소소에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카이로시아.
“네! 안우진 님이 깜짝 놀랄 만한 걸로요.”
그녀는 호언장담을 하며, 배정된 연구실로 향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훈련을 하지.’
멀어지는 카이로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고위 플레이어의 탄생. 플레이어 렌, 다가오는 하이블러드나이트143에서 승급전을 치른다.
‘드디어 내일이군.’
통유리로 된 천장에서 달빛이 쏟아진다.
침대에 누워서 달빛을 맞던 나는, 커뮤니티를 보며 피식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개노잼이 예상되는 승급전은 처음이네ㅋㅋㅋ
└인정 ㅋㅋㅋ 솔직히 렌이 너무 강함 ㅎㄷㄷ 어떤 미션이 나오든 다 개박살 낼 듯 ㅎ
└이거 그냥 눈 가리고 아웅 아니냐? 걍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거잖아 ㅡㅡ
└차라리 그냥 고위 리그로 올려보내면 좋겠음. 틀 안에 가둬놓기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함.
└심지어 중간계에서 펼쳐진다고?ㅋㅋㅋㅋㅋ 아이고 배야 ㅋㅋㅋ 그냥 조금 더 뒤로 늦췄다가 수준에 맞는 미션 나오면 진행하지 뭐가 급하다고 ㅋㅋㅋ
커뮤니티에 달린 승급전의 반응이 무척 미지근했기 때문.
성계 대항전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탓에, 내 승급전에 대해서 신들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저 반응은 내가 경기장에 들어가는 순간 180도 달라지겠지.
‘더 어려울 거라고?’
중간계에서 어려움을 느낄 만한 난이도라고 그랬으니까.
‘슬슬 잘 준비해야겠군.’
커뮤니티를 닫은 나는 <시스템 상점>에 접속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0,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0,000 P를 소모하셨······.]
[정신 : 99]
그리고는 정신 스텟을 한계까지 맞췄다.
이걸로 경기 출전 준비는 끝.
‘마지막 경기.’
두근― 두근―
심장이 쿵쾅거렸다.
승급전.
고위 리그로 올라갈 마지막 계단.
그 모든 게 내일이면 결정 날 것이다.
띠링!
[<달빛 게이지>가 1% 상승합니다. (100/100)]
[<달빛 게이지>가 가득찼습니다.]
[<달빛의 가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 남은 건, 단 한 번의 승리뿐.
‘이만 자 볼까.’
아세리안에게 부탁해, 천장을 통유리로 개조한 숙소.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여긴······!’
경기장으로 들어온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텁텁하고 탁한 공기가 폐를 찌르고, 깜깜한 밤하늘 위 보름달이 나를 반겨준다.
주변엔 온통 초록빛의 나무들로 가득하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야산과 다를 바 없는 풍경.
띠링!
[경기 : 상위 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43의 8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척살(개인 PvP)]
[게임명 : 영리한 여우]
[맵 : 서울(대)]
[관객 수 : 4,901,084 명]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들 너머로, 촘촘한 빛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린다.
빵― 빵―
그 사이사이로 익숙한 자동차의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색하면서 동시에 낯이 익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울······?’
이번 단독 미션이 펼쳐지는 곳은 지구 성계였던 것이다.
< 186화. 해방(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