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해방(4) >
‘후우, 정말 다행이군.’
커뮤니티를 살피던 미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게시글을 뒤져봐도, 누군가가 타락했다는 소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렌의 타락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
진정한 의미에서 초대형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정말 수고 많았다.”
미카엘이 성계 대항전 준비와 진행을 맡은 천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미카엘 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휴우, 드디어 끝났네요.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더니 죽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엔 좀 불안하긴 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군요.”
그러자 미소 띤 얼굴로 우는소리를 하는 휘하 천사들.
그 모습이 마치 ‘저 이만큼 고생했으니 더 칭찬해 주세요!’라고 어리광 부리는 아이들 같아, 미카엘은 쿡 하고 웃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긴 했지.”
“미카엘 님이 냉정하게 판단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마기 폭주 이슈로 척살조를 보냈다면, 성계 대항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위 리그 운영에도 큰 차질이 있었을 거구요.”
2급 지천사 파사엘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계 대항전을 발판 삼아, 상위 리그의 정상화를 노리고 있던 상황.
그런데 여기서 타락 이슈가 터졌다면, 상위 리그의 정상화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리그의 중단이 치천사의 타락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였으니까.
리그 재오픈에 대한 우려가 훨씬 심해졌겠지.
“그런데 괜찮을까요? 완전한 타락화는 아니지만, 오염이 꽤 많이 진행된 것 같던데······.”
그때, 곁에 있던 3급 좌천사 카서디엘이 우려를 표했다.
한번 오염이 진행되면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야 타락화를 피할 수 없기에, 그녀의 걱정은 당연했다.
“걱정 말거라. 아리엘, 아니 아세리안 님이 팀 투지의 주인이니 지금쯤 정화가 모두 끝났을 것이다.”
“아······!”
미카엘의 말에 탄성을 지르는 천사들.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플레이어 렌에겐 천운이 따랐군요!”
‘천운이라······.’
이어지는 그녀들의 말에 미카엘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행운이 따른 건지, 아니면 예견되어 있던 일인지는 나중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짝!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예정했던 대로 당장 다음 주부터 상위 리그를 오픈한다.”
“알겠습니다.”
“성계 대항전 진행으로 모두들 피곤하겠지만, 조금 더 힘 내주길 바란다. 정상 궤도에 오르면 지금보단 훨씬 편해질 것이다.”
“예!”
“파사엘만 남고 모두 업무에 복귀하도록.”
미카엘의 말에, 천사들이 업무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남게 된 두 존재.
“따로 지시하실 게 있으십니까?”
“그대는 렌의 승급전을 준비해 줄 수 있겠나?”
“렌의 승급전······.”
파사엘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렵겠나?”
“당장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요즘 마계 쪽이 너무 조용해서요. 그렇다고 중간계로 보내자니, 렌 수준과 너무 안 맞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파사엘.
미카엘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플레이어라고 하기엔 렌의 수준이 너무 높았으니까.
상위 리그라는 틀 안에서 경기를 만들어야 할 게임 메이커에게,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이 또 없었다.
“혹시 그냥 승급시키는 건 안 되겠습니까? 모두들 렌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파사엘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승급전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건 지금까지의 전통과 관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음······. 중간계 쪽에 수상한 정황이 없는지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면 지구 성계로 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쪽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구······?”
파사엘이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미카엘이 씨익 웃었다.
“전에 보고 받기로, 성계의 안위를 위협할 만한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환경이 타 성계와 완전히 달라, 마땅히 보낼 만한 플레이어가 없었죠.”
지구의 경우, 냉병기 시대가 끝난 지 오래.
칼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국가 단위의 추격을 받는 곳이다.
타 성계의 플레이어가 잘못 들어갔다간, 미션 자체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마침 잘 됐군. 렌이 지구 출신이라지? 그라면 충분히 미션을 수행할 수 있겠어.”
미카엘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구는 더 말이 안 됩니다.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수행이 어렵다는 것뿐, 사실 무력 면에선 타 성계와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한 곳 아닙니까? 렌한텐 너무 쉬울텐데요.”
“그거야 게임을 만드는 우리가 조절하면 될 일. 렌을 지구로 보내는 걸로 하지.”
파사엘의 설득에도 의지를 꺾지 않은 미카엘.
결국 파사엘은 미카엘의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파사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홀로그램에 나와 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앞으로 한 달 후. 하이블러드나이트143. 그때가 좋겠군.”
그렇게 해서 렌의 승급전이 확정되었다.
* * *
당소소와 첫 대련을 한 이후, 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
오전에는 명상과 근력 단련을 하고, 오후에는 당소소의 독공 연마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독공 연마를 도와주다 보니, 생각 외의 장점이 있었다.
[정신 : 73]
‘이렇게 빨리 올릴 수가 있다고······?’
무수히 많은 독에 중독되는 과정에서, 정신 스텟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 덕분에 정신 스텟이 벌써 마의 구간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한 달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사실 독의 증상을 생각해 보자면, 정신 훈련에 특화되어 있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내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 툭하면 나타나는 환각, 게다가 다양한 욕망을 억누르는 것까지.
모두 정신력이 좋아야 버틸 수 있는 것 뿐이었다.
“이후 정신 스텟 단련으로, 독을 먹이는 커리큘럼을 추가해야겠군.”
작게 읊조린 혼잣말.
“······!”
그러자 집무실 한쪽 옆에 서 있던 클로에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나는 클로에를 올려다 보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세워 뒀군요.”
“아, 아니에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저보다 훨씬 바쁘시잖아요.”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을 짓는 클로에.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찾고 있는 스킬이 있어서요.”
“네, 말씀해 주시면 바로 찾아 드리겠습니다.”
“혹시 중개 거래소에 어둠 속성 스킬이 있습니까?”
이번에 내가 찾는 속성은 어둠.
물론 내가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당소소한텐 어둠이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녀가 다루는 무기는 독毒, 암기, 그리고 연검.
가루, 얇은 바늘, 그리고 연검은 모두 시각視覺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공격들이다.
어둠 속성으로 그 부분을 조금 덜어주면, 훨씬 위협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음······. 빛 속성은 많은데, 어둠 속성은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긴 했지.’
아무래도 어둠 속성이 타락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로 마계의 악마들이 많이 사용하는 속성이었으니까.
중개 거래소엔 타락과 관련된 아이템을 올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있긴 있다는 거죠?”
“네. 지금까지 두 개에서 세 개 정도가 올라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팔려서 없구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는 어둠 속성 스킬도 같이 체크해 주세요.”
“네, 어둠 속성 스킬이 올라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혹시 독과 관련된 아이템도 있습니까?”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스텟은 아직 부족하지만, 당소소는 그걸 넘어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
조금만 더 보완이 되면 충분히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없으면 뭐, 자기 복이지.’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진 않았다.
독이라는 게 사용하기 까다로운 만큼, 그와 관련된 아이템의 숫자도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클로에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있습니다.”
“······있다고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에.
“독 자체는 없지만, 그걸 보조해 줄 만한 아이템은 있습니다.”
비극심우선, 차폐의 면사.
클로에가 추천해 준 아이템은 두 개였다.
[<부채:비극심우선秘棘沈雨扇>]
[무림팔선 ‘하선고’가 사용하던 접부채.]
[착용 시 마나에 바람의 힘이 깃든다.]
[착용 시 <아공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아공간> ― 부채의 접히는 부분에 아이템을 넣을 수 있는 가상 공간이 존재합니다. 물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템을 꺼낼 수 있습니다.]
[Tip : 부채를 휘두를 때 사용하면 물체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등급 : 전설]
[판매가 : 3,800,000 G]
‘흠······.’
아이템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독과 관련된 아이템이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
비극심우선의 옵션은 두 개.
마나에 바람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과,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설마 저 아공간이라는 능력 때문에 독과 관련된 아이템이라고 생각한 건가?’
아공간이라······.
검지로 책상을 톡, 톡 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기로 독을 사용한다면······ 어?’
당소소가 사용했을 때의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리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휘두를 때 사용하면 물체가 날아가기도 한다는 것.
그 말은 즉, 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암기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진짜 대박인데?’
암기가 아니라 가루 형태의 독을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당소소도 함께 중독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두 번째 아이템을 확인했다.
[<면사:차폐의 면사>]
[특별한 영기를 지닌 누에, 천잠天蠶의 실로 만든 면사.]
[착용 시 호흡으로 들어오는 모든 기운을 차단한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1,089,999 G]
“······하.”
차폐의 면사를 본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루 형태의 독을 뿌리면 당소소가 중독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와 관련된 아이템이 나온 것.
‘확실히 제법이야.’
내심 클로에에게 감탄했다.
독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정말 적절한 아이템들을 추천해준 것이다.
가루 독을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시전자 본인이 중독되지 않는 것도 무척 중요했으니까.
아마 클로에도 내가 생각한 활용법을 미리 알아차리고 추천한 게 분명했다.
“어떠신가요?”
클로에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제대로 추천해 주셨군요. 딱 제가 원하던 아이템들입니다.”
띠링!
[<부채:비극심우선>을 3,800,000 G에 구입하셨습니다.]
[<면사:차폐의 면사>를 1,089,999 G에 구입하셨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이템들을 구입했다.
부채는 380만 골드, 면사는 109만 골드.
적은 돈은 아니지만, 성능 대비 가격으로 봤을 땐 오히려 싸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공짜로 줄 것도 아니니까.’
내 손바닥 위에 생겨난 부채와 면사.
그걸 보고 클로에가 활짝 웃었다.
“찾으시던 거라서 정말 다행이네요.”
“네, 딱 제가 원하던 거군요. 추천해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어둠 속성 스킬도 나오면 바로 보고드릴게요.”
“네, 부탁합니다.”
내 대답에, 허리를 꾸벅 숙인 클로에가 집무실을 나섰다.
2주일 후.
짧은 시간이었지만, 팀 투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고신高神으로 승격했습니다.]
[팜의 레벨이 4로 상승합니다.]
[플레이어 ‘렌’의 플레잉 코치 정산율이 5% → 7%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에 거액을 베팅한 아세리안.
그녀가 벌어들인 포인트를 사용해, 고신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로 인해 직경 1킬로미터였던 팜의 크기가 5킬로미터까지 넓어졌다.
‘이제는 어지간한 도시들을 압도할 정도군.’
넓이로만 보면 이전보다 25배나 넓어진 셈.
그러다 보니, 각종 건물들로 빼곡하던 팜이 휑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봐! 똑바로 안 따라와? 내가 한눈팔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자칫 잘못하면 길 잃으니까.”
어마어마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건물 여기저기를 오간다.
그들 중 태반은, 처음 보는 얼굴의 신입 플레이어들이었다.
‘이젠 이름 외우는 건 불가능하겠군.’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 플레이어의 숫자는 1만 5천 명.
단일 팜 규모에서는 이례적인 숫자였다.
너무 많아서 관리할 수가 없을 테니까.
“이봐요, 거기! 왜 혼자 있어요? 선임 훈육자 누구예요!”
“아, 7기수의 데니얼 님입니다······.”
“7기수 데니얼? 어휴, 일로 따라와요.”
하지만 우리 팀은 지금까지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키워진 팜.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관리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안우진 님.”
“아, 예.”
그때, 지나가던 한 플레이어가 내게 인사했다.
“모두들 인사하세요. 1기수 안우진님이세요. 팀 최초로 고위 리그를 앞두고 계시죠.”
“우와, 고위 리그······.”
“안녕하십니까? 8기수 단테입니다. 웨스테로스에서 왔고 용병 출신······.”
“8기수 퀘이드입니다! 하이퍼보리아에서······.”
“잠깐! 바쁘신 분이니까 기수, 이름만 딱 얘기하고 끝내!”
그리고 내게 인사하는 신입 플레이어들.
“모두 반갑습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곤, 집무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후우, 돌아다닐 수가 없군.’
어딜 가나 내게 인사로 공격한다.
그 숫자가 백 명도, 천 명도 아닌.
무려 만 오천 명.
하나하나 다 받아주다 보니까, 이젠 진이 빠질 정도였다.
똑― 똑―
그때, 집무실 문 너머로 들리는 노크 소리.
“안우진 님, 아세리안이에요!”
“아, 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축하해요!”
“······?”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축하한다고?
내가 축하받을 일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기억을 돌이키는 순간.
‘혹시?’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리고.
“헤헤, 오퍼가 들어왔다구요. 그것도 무려 승, 급, 샷!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티켓이요!”
아세리안이 설마를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 185화. 해방(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