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해방(1) >
“NFS. 판매 불가 통보가 왔어요.”
‘후우.’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뜸들이는 그녀의 반응에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팀의 핵심 플레이어를 쉽게 내줄 리가 없지.’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얘기하시죠.”
“아, 그게······.”
“괜찮습니다. 아직 좀 피곤해서요.”
피곤하다기 보단, 아직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컸다.
지금 상태라면, 또 욱! 하고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푹 쉬세요.”
내 대답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휴식의 방을 나서는 아세리안.
그녀의 뒤를 이어 나도 숙소로 향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잠부터 잘 것이다.
형을 만나고부터,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었으니까.
‘일단 감정을 추슬러야 해.’
감정에 휘둘려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특히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붙는 콜로세움에서는 더욱 더.
‘엄마······. 형······.’
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금세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시각을 확인하니, 오후 한 시였다.
전날 저녁 6시쯤부터 잤으니까 무려 열아홉 시간가량을 잔 셈.
“좋은 아침입니다, 안우진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숙소를 나서자 플레이어들, 그리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모두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준 나는 곧장 명상실부터 찾았다.
생각이 복잡할 땐 명상만 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후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으로 얀 무드라 자세를 취한 나는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시작했다.
‘집중하자.’
끊임없이 상념이 날아들었다.
언제나 날 가장 먼저 생각해 준 엄마.
당신의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홀몸으로 두 형제를 키워 낸.
그리고 그 고생의 대가를 갚을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우리 엄마.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흐트러지지 말자.’
항상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고, 힘이 되어 준 우리 형.
때론 아버지가 되어 꾸짖고, 힘들 땐 형으로서 조언을 해 주고.
외로워할 때면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우리 형.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할 수 있어.’
가족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초월 리그의 챔피언.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줄, 그래서 내 과오를 바로잡게 해 줄 유일한 방법.
‘흔들리지 말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쉬운 길로 가려 한 것에 대해서 반성했다.
형의 얼굴을 마주한다고 해서 내 원죄를 씻어낼 수 있을까?
그럼 어머니는?
‘다른 방법은 없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 원죄를 씻어낼 방법은 딱 하나뿐.
그 길은 한눈 따위를 팔아도 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후우.’
눈을 뜨자,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평소의 내 모습.
‘경기에 대한 정리를 좀 해볼까.’
명상을 끝낸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종이를 펼쳐 들고 성계 대항전의 득실을 계산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얻은 건 총 네 개.
고위 리그에 대한 승급샷, 성계 대항전 특전으로 인한 모든 스텟 +7%.
그리고 고결한 수정 한 개, 마지막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MVP 보상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스킬 업그레이드부터 해야겠군.’
띠링!
고결한 수정을 먹자, 상태창이 나타난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스킬을 선택했다.
[<스킬:명경지수>를 강화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스킬:명경지수>가 <스킬:열반>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번 경기를 통해 한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기반이 안정화돼야 해.’
건물을 높게 쌓으려면 튼튼한 기둥을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강함만 추구하니, 조그만한 충격에도 자꾸 흔들린 것.
하지만 이제부턴 다를 것이다.
‘편한 길은 버린다.’
내게 존재하는 리스크를 모두 털어내고 새 출발 할 생각이었으니까.
이걸로 고결한 수정 포상은 끝.
그다음 해야 할 건.
‘이건 도대체 뭐지?’
MVP를 통해 얻은 보상이었다.
[<보석:시간의 각성>]
[태초에 만들어진 바위가, 억겁의 시간 동안 부스러지며 모습을 드러낸 보석.]
[장비에 시간이 쌓이며 새겨진, 잠자는 성흔聖痕을 각성시킬 수 있다.]
[등급 : 신화]
“······.”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뭐라는 거야?’
시간이 쌓이며 새겨진······ 잠자는 성흔을 각성시킬 수 있다고?
‘어렵게도 써놨군.’
한숨을 내쉰 나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이럴 땐 사용해 보는 것이 가장 직관적일 것이다.
띠링!
[<보석:시간의 각성>을 사용했습니다.]
[성흔이 잠자고 있는 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
[2. <창:벽력섬전>]
[3. <목걸이:몽환의 달빛>]
[장비를 선택하면 숨겨진 성능을 각성시킵니다.]
숨겨진 성능을 각성시킨다.
‘이런 뜻이었군.’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써놓을 것이지.’
잠자는 성흔은 봉인된 능력을 말하는 모양.
그걸 깨워준다는 거니, 한마디로 장비를 한 등급 업그레이드 시켜준다는 뜻이었다.
‘일단 하나는 제외.’
통제가 불가능한 힘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블라디미르 가면을 고려 대상에서 빼버렸다.
이제 남은 건 창과 목걸이뿐.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은 전설 등급이고, 목걸이는 준신화 등급이었으니까.
[<목걸이:몽환의 달빛>을 각성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목걸이:몽환의 달빛>이 <목걸이:영롱한 달빛>으로 각성하였습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
[영면에 빠진 달의 여신이 착용하던 목걸이. 달빛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
[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최대 30%]
[달이 뜨면 1분당 체력이 5%씩 회복된다.]
[달이 뜨면 1분당 마력이 5%씩 회복된다.]
[착용 시 스킬 슬롯이 한 개 추가된다. 단, 달이 떴을 때만 추가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달빛의 가호>를 받게 된다.]
[<달빛의 가호>]
[달빛을 1시간 받을 때마다 1%의 게이지가 차게 됩니다.]
[100%까지 채울 경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시 체력, 마력을 100% 회복시킵니다.]
[착용 시 <복수의 칼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복수의 칼날> ― 단일 대상 설정 후, 대상을 만나면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재사용 대기 시간 : 30일)]
[등급 : 신화]
‘어?’
각성한 몽환의 달빛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기존에 있던 옵션의 효율이 대폭 상승한 것은 물론, 새로운 옵션이 두 개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엄청 좋아졌는데?’
기존에 있던 것들만 보자면, 달빛 아래에만 있어야 하던 체마 상승과 추가 슬롯 옵션이, 달만 뜨면 활성화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체마 1% 상승이 5%로 5배나 올랐다.
‘체력이랑 마력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달빛의 가호, 복수의 칼날.
두 옵션 모두 사기급으로 좋은 능력이었다.
전투 시 다양한 효율을 보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제법 많이 얻었군.’
다섯 경기나 치르긴 했지만 스킬, 장비, 특전을 하나씩, 그리고 승급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엄청 큰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로 얻은 건 끝.’
이제는 손해 본 걸 계산할 때였다.
[정신 : 39]
‘미친······.’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기 전보다 무려 60포인트 하락한 상태였다.
고작 한 번 사용한 것 치고는 손실이 너무 컸다.
환산하면 무려 444,000포인트.
‘이미 지나간 일이야.’
무척 뼈아픈 일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삭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
‘두 번 다신······.’
이걸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 상태에서 형은 내게 역린이자, 약점이나 마찬가지.
‘분명 또 흔들리고 말 거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무리해서 형을 팀 투지로 데려와봤자, 초월 리그로 올라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형이 오면 팜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어.’
형을 다시 보는 게 내 소원인가?
아니, 내 잘못을 바로잡는 게 소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냉정해야 한다.
형이 곁에 있으면 걱정 반 기쁨 반 상태가 되어, 콜로세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이걸로 득실 계산은 끝.’
나는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 애써 미련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성공적으로 끝난 성계 대항전! 하지만 처음의 취지와 무색하게, 새로운 고위 플레이어의 탄생을 엿보는 자리가 됐다.
―쿠 훌린 “단 한 명이 상위 리그를 쥐고 흔들었다. 우린 그걸 무력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렌에게 경의를 표해!
―스킬 슬롯은 다섯 개뿐. 하지만 렌의 스킬은 몇 개? 매 경기 다른 스타일로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다.
―싸움꾼의 피를 타고난 형제. 플레이어 렌, 그리고 룬! 두 사람은 과연 같은 팜에 소속될 수 있을 것인가.
예상대로 커뮤니티는 성계 대항전에 대한 후기로 들끓고 있었다.
초월 리그와 고위 리그는 아직 오픈되지 않은 데다가, 성계 대항전이 끝난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 당연한 거였다.
‘별말이 없어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으로 게시글 하나를 들어간 나는 댓글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신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군.’
5경기에서 온갖 학살과 고문을 자행한 것.
그에 대해 대다수의 신들은 가족을 만났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때였다.
똑― 똑―
“안우진 님, 아세리안이에요.”
“아, 들어오셔도 됩니다.”
내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세리안.
그녀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후우, 죄송해요. 팀 불굴에 정말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해 봤는데······. 영입에 실패했어요.”
아세리안이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룬은 팀의 핵심 플레이어일 테니까요. 판매할 리가 없죠.”
“아······.”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슬쩍 내 눈치를 보는 아세리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예.”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고위 리그에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할 생각이거든요.”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블라디미르 가면을 벗었다.
‘더 이상 한눈 팔지 않겠어.’
“······!”
‘여긴 정말 오랜만이네.’
아세리안과 헤어진 나는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안으로 들어서자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그리고 익숙한 땀냄새.
내 스텟이 마의 구간에 돌입한 이후, 체력 단련실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는 팜의 관리나, 테크닉에만 신경 써왔으니까.
‘오랜만에 땀 좀 흘려 볼까.’
단련실 한쪽 빈 공간으로 향한 나는 바벨 바에 원판을 조립하며 운동할 준비를 했다.
“······?”
“······?”
그러자 내게 쏠리는 시선들.
단련실 내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운동하다 말고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려 1톤 가까이 끼워 넣고 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팀 투지에서 이 정도 무게를 들 수 있는 플레이어는 몇 없을 테니까.
“스읍, 후우. 스읍, 후우.”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스쿼트를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10분간 쉬지 않고 계속.
‘힘들군.’
고작 한 세트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벨을 내려놓고 싶었다.
오랜만에 해서 더 괴로운 느낌.
하지만 당분간은 이 감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스텟이 오르는 일은 없겠지만, 내가 다시 단련을 시작한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하락한 정신 스텟을 올려야 했으니까.
정신은 명상뿐만 아니라, 초고강도 단련을 해도 상승한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후우.”
그렇게 무려 30분간 쉬지 않고 진행된 스쿼트.
바벨을 내려놓은 나는 입과 코로 최대한 산소를 들이마셨다.
이렇게 앞으로 9세트를 더 진행할 계획이어서, 빠른 회복은 필수였다.
“저기······.”
“······?”
그때, 곁에서 운동하던 플레이어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
5기수에 들어온 플레이어, 양홍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누구신지······.”
양홍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로브, 가죽 갑옷, 목걸이 등등 항상 같은 장비들을 착용하고 다니기에, 당연히 날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찰력이 떨어지면 모를 수도 있지.’
“안우진입니다.”
그래서 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헉!”
그러자 체력 단련실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팀원들.
“그······ 렌으로 활동 중인 안우진 님······?”
“예.”
“······!”
파이팅으로 넘쳐야 할 단련실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나를 바라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후우.’
그 과도한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을 착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것 또한 익숙해져야 한다.
어차피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라서, 모두들 금방 적응할 것이다.
그때였다.
“안우진님······?”
단련실 한쪽에서 장애물 트랙을 돌고 있던 당소소.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 182화. 해방(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