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증명의 서(9) >
띠링!
[<창:벽력섬전>을 집어넣었습니다.]
[<채찍:통한의 가시>를 꺼냈습니다.]
창을 집어넣고 꺼내 든 것은 채찍.
내가 나름대로 자신 있어 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사슬낫이랑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졌지만, 무게 중심이 다르다는 것 하나 때문에 아예 다른 활용도를 보여주는 무기랄까.
‘이 맵이랑 상성도 좋지.’
“드디어 만나게 됐군. 내 이름은 엔키두. 바빌론 출신이다.”
쏴아아아아아― 찰랑― 찰랑―
100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판자 위.
엔키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 성계 대항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오랜만에 피가 끓는 기분이란 말이지.”
“······.”
녀석이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야생미 가득한 몸매도 그렇고,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초리, 거기다 말하는 것까지.
‘한 마리 야수를 보는 느낌이네.’
엔키두는 투박하지만, 굉장히 강렬해 보이는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엔키두]
[성향 : 야성]
[근력 : 268(+?)] [민첩 : 250(+?)] [체력 : 261(+?)]
[정신 : 122(+?)] [지력 : 3(+?)] [마력 : 258(+?)]
[각성 능력 : <사냥본능> <강철육체> <특급살기> <특급마나운용> <하급치료술>]
[업적 특전 : 야성의 포효]
‘치고받기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본데.’
전체적으로 스텟도 무척 준수하고, 능력도 좋다.
주먹과 발을 주로 사용하는 플레이어답게, 내구 관련 능력도 존재하는 데다가, 호인족에게나 볼 수 있는 사냥본능도 가지고 있었다.
하위 리그에서, 유일하게 벽력을 피했던 소호가 가지고 있던 능력.
아마 육감 쪽으로도 뛰어날 것이다.
“그럼, 한번 치고받고 싸워 보자고!”
팟! 파밧! 파밧!
상태창을 체크하는 사이, 엔키두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과 다르게, 그가 밟고 지나간 나무판자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육체 감각이 뛰어나다는 뜻.
‘이런 녀석들에겐 채찍이 딱이지.’
날아드는 주먹을 피한 나는 근처에 있는 나무판자로 이동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짝! 콰지직!
“크읏! 뭐, 뭐냐!”
그러자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이 경직되는 엔키두.
뇌전 특성의 스킬은 제법 희귀한 편이라,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봤을 것이다.
‘일단 좀 맞자.’
“흥! 얌생이같은 기술을 쓰는군. 네놈이 남자라면 제대로 한 번 붙어 보자!”
짝! 콰직!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것이냐!”
짝! 콰직!
“현 상위 리그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녀석이 이렇게 겁쟁이였을 줄이야······.”
짜아아아악! 콰지직!
판자와 판자 사이를 넘나들며 채찍을 휘두르길 한참.
“크아아아! 이 비겁한 놈!”
일방적인 구타에 엔키두가 야수처럼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며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무척 열받은 모습이었다.
반면에 때리기 바빴던 난.
‘진짜 단단하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아무리 날붙이가 붙어있지 않다고 해도, 채찍은 무시무시한 속도를 가지고 있는 무기.
거기다 내 스텟까지 더해지니까, 마치 한줄기 섬광이 뿜어져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런 공격을 수차례 얻어맞았는데도 저렇게 멀쩡하다고?’
물론 데미지는 쌓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피부가 단단하다고 해도, 장기까지 그러진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잡히면 가만 두지 않겠다!”
‘뭐지?’
마치 자석에 끌려오는 것처럼, 녀석의 속도가 급상승했다.
녀석과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놈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하나인 모양.
‘때리는 것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지.’
나는 이동하던 자세 그대로 크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지막에 팔목을 살짝 꺾자, 채찍이 엔키두의 왼팔을 둘둘 감는 게 느껴졌다.
‘따라오기 쉽지 않을거야.’
채찍을 힘껏 잡아당긴 나는 엔키두가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흔들었다.
나무판자를 뛰어넘으며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기에, 어지간한 플레이어가 아니면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까짓 것 쯤이야아아아아악!”
콰지지지지직!
그러자 채찍을 풀려고 하는 엔키두.
그 상태 그대로 뇌전을 불어넣자, 녀석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엄청난 데미지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악! 하악! 이 개같은 자식이!”
가까스로 풀어낸 엔키두가 채찍을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채찍을 뺏어서, 상황을 타파하려는 모양인데.
‘마음처럼은 안 될 걸.’
보기와 달리, 내 근력 스텟이 훨씬 높은 상황.
나는 계속해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며, 녀석을 괴롭혔다.
“제길!”
결국 얼마 못 가 힘으론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엔키두가 채찍을 놨지만.
‘놨으면 또 맞아야지.’
그때부터 일방적으로 후려패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채찍을 막으려고 하면, 팔을 휘감아 뇌전으로 공격하고.
“이런 개같은 상황을 봤나!”
짝! 콰지직!
풀어내면, 구타당한다.
그럼에도 녀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네놈을 어떻게든 찢어 죽이고 말겠다!”
‘근데 좀 멍청하긴 하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녀석은 잔머리를 굴리는 대신, 언제나 일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거리상으론 그게 가장 짧으니 파고들기엔 가장 좋겠지만, 문제는 내 움직임이 더 빠르다는 데 있었다.
들어오는 만큼, 나 또한 좌우로 이동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는 상황.
녀석이 날 잡으려면 조금 더 변칙적이고, 창의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엔키두가 이 맵이랑 상성이 잘 안 맞는 것도 있고.’
싸아아아아― 찰랑― 찰랑―
수상전, 그것도 지금처럼 나무판자 위로만 다닐 수 있는 맵은 근거리 딜러에겐 최악이었다.
채찍보다 주먹이 훨씬 짧으니까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들어와야 하는데, 이동에 제한이 존재하는 맵이었기 때문.
아마 녀석에겐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그때였다.
“크하하하하!”
“······?”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크게 웃는 엔키두.
‘실성했나?’
너무나 뜬금없는 웃음이었기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녀석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더 이상 도망 다니지 못하게 해주마!”
그러고는 다시 무서운 기세로 쇄도해 들어왔다.
녀석의 주먹엔 권강拳罡이 서려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 나는 짧게 점프하며 판자 사이를 이동했다.
쐐애애애애애액!
“······!”
“크하하하! 이러면 도망칠 공간이 없지!”
그러자 내가 향하던 나무판자로 주먹에 응축된 권강을 날리는 엔키두.
쾅! 콰광! 쾅! 찰랑― 찰랑―
권강에 직격한 나무판자가 조각조각 났다.
순식간에 밟을 곳이 없어진 상황.
‘이걸 노렸군.’
나는 재빨리 섬전을 사용하며, 근처에 멀쩡하게 떠 있는 나무판자로 순간 이동했다.
거대한 폭발로 인해 바다가 크게 출렁였지만, 초감각 덕분에 균형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
아무렇지도 않게 위기에서 벗어나자, 멍한 표정을 짓는 엔키두.
아무래도 회심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통하면 계속 맞아야지.’
짝! 콰직!
“이런 제기랄! 이런 개같은 상황이 있나!”
짝! 콰직!
“멋진 대결을 기대했거늘!”
짝! 콰지직!
“제에엔자앙!”
짜아아악! 콰지직!
공기 터지는 소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진짜 단단하네.’
그리고 그 소리는, 50분이 넘도록 계속 이어졌다.
└ㅋㅋㅋㅋㅋㅋㅋ아 씨발 ㅋㅋㅋㅋㅋㅋ ㅈㄴ 웃기넼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배얔ㅋㅋ 아이고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무슨 맹수를 길들이는 사육사 같냐? ㅋㅋㅋ 엔키두 상대로 이런 싸움이 만들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 ㅋㅋㅋㅋㅋ
└저게 말이 됨? 아니 ㅆㅂ 거의 일방적인 구타자나 ㅡㅡ
└ㅋㅋㅋㅋㅋ 맞는 거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함 ㅋㅋㅋㅋ
└무자비한 새끼 ㅠㅠ 우리 엔키두..ㅠ
└ㅎㅎ; 어이가 없네..ㅋ 내가 저런 애 때문에 바빌론에 걸었다니.. 존나 허탈하다ㅎ
└렌 저 새끼가 제일 나빴음 ㅋㅋㅋㅋ 그냥 편하게 보내줄 수도 있는데,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고 마지막까지 이 악물고 채찍 휘두름 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는 좀 지쳐 보이더라 ㅋㅋㅋㅋㅋ 때리다가 체력 다 떨어짐 ㅋㅋㅋㅋㅋㅋ
‘아직도 어깨가 뻐근한 느낌이네.’
나는 어깨를 살살 돌리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7라운드에서 무려 1시간 가까이 일방적으로 구타한 이후, 8라운드에선 알프하임 출신의 랭커 카시아를 상대하게 되었다.
정령사였던 그녀의 무기는······.
‘완드였지.’
그래서 나는 주변에 있던 나무를 잘라, 완드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뭐 이름만 완드고, 사실상 나무 몽둥이랑 다를 바 없었지만.
띠링!
[4경기 9라운드]
[생존자 : 5명(부전승 1명)]
[맵 : 팀 ‘성장’ 팜의 공터(소)]
[렌 vs 몽연]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생존자는 5명.
10라운드에 3명이 남고, 한 명이 부전승으로 올라가면 결국 11라운드에서 결승전을 갖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준준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
‘어? 잠깐만.’
맵의 이름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불이 꺼진 각종 건물과, 그 너머로 둘러져 있는 울타리.
하늘 위로 처져 있는 반투명한 파란색 막.
그 모든 게 낯이 익었다.
‘팀 성장?’
이곳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소속되었던 팀 성장의 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건물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낡아 보였다.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은 모습.
그 광경을 보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망했군.’
바로 팀 성장이 파산했다는 것.
‘시노엘이 왜 갑자기 타락해서 내 손에 죽었나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나간 뒤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때 소속된 팀이었지만, 사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몽연이라······.’
지금 내 상대가 쿠 훌린, 을지문덕과 함께 상위 리그 랭커 3강이라고 불리는 몽연이라는 것.
100미터 전방에서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한 도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던 주창범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미남자.
칠흑색 도복을 걸치고 있고, 머리 위에는 관이 씌워져 있다.
‘3강 실력은 어떨지 궁금하군.’
지금까지 내가 싸워본 랭커는 아시카가, 주소월, 엔키두, 카시아 이렇게 네 명 뿐.
네 사람 중 누구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독 미션과 코드 제로에서 내가 갑자기 너무 강해졌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몽연과의 싸움은 기대가 됐다.
‘과연 얼마나 강할까.’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대개 콜로세움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어느 성계든 상관 없이 실용적인 장비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각 성계의 아이덴티티가 희미해지는데, 무림은 이상하게도 성계 특유의 복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몽연만 봐도 무림의 색채가 확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자부심 같은 거겠지.’
몽연은 굳이 머리 위에 <무림>이라고 쓰여있지 않아도, 무림 출신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경기 시작!]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서로의 스타팅 포인트가 1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보니,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올 수도 있었다.
“몽연이라고 하오. 한 수 부탁드리겠소.”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검을 역수로 쥔 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몽연.
녀석은 내가 기습할 거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멍청하거나, 아니면 기습이 들어와도 자신 있거나.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몽연]
[성향 : 중용]
[근력 : 288(+?)] [민첩 : 292(+?)] [체력 : 299(+?)]
[정신 : 122(+?)] [지력 : 87(+?)] [마력 : 288(+?)]
[각성 능력 : <현천칠성검玄天七星劍> <천재> <현천보> <태청강기> <특급살기> <특급박투술> <고급치료술>]
[업적 특전 : 불세출]
몽연의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흠칫했다.
‘제법 강한 녀석이었군.’
지금까지 만나왔던 랭커들과 다르게, 특급 이상으로 가득한 각성 능력.
게다가 준수한 스텟까지 가지고 있다.
이전에 만났던 랭커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
“······.”
“하하, 무기로 나누는 대화를 좋아하시는군요.”
내가 묵묵부답으로 검을 겨누고 있자, 몽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지체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겠소.”
선해 보이던 인상의 미남자는 온데간데없고, 한 명의 살인귀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챙! 콰지직! 챙! 콰직!
‘뭐야?’
몽연과 격돌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뇌전 공격에도 녀석의 표정이 무척 평온했기 때문.
아니, 되려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반격을 펼쳐왔다.
녀석의 무기는 면검緬劍.
검의 탄성이 좋아, 휘두를 때 낭창거린다는 특징이 있다.
‘제법인데?’
그러다 보니 검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여 들어왔는데, 쾌검술을 구사하다 보니 공격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챙! 콰지직! 채챙! 챙! 콰직!
‘이 자식.’
검을 휘두르자, 몽연이 내 공격을 흘려낸다.
그 잠깐의 부딪힘에서, 뇌전이 내 검을 타고 녀석에게 흘러 들어간다.
그 순간 한 가지 이상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뇌전을 흘리고 있어······?’
면검을 타고 들어가던 뇌전이 어느 순간 공기 중으로 흩어진 것이다.
‘저게 가능하다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교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녀석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서 뇌전을 흘려낼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는 모양.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
몽연의 검은 그 이치에 통달해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해 보이시는구료.”
내 모든 공격을 흘려 내던 몽연이 여유롭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 이것 봐라.’
내 공격을 모두 흘려낸다고?
‘누가 더 잘 흘리는지 보자고.’
그럼 나도 모든 공격을 흘려내 줄 생각이었다.
< 175화. 증명의 서(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