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증명의 서(8) >
깡! 깡!
“첫 상대부터 운이 좋지 않군. 내 이름은 막시무스. 멋진 싸움이 되길 바라오.”
거리를 좁히자, 발리노르 성계의 막시무스가 방패에 검신을 두들기며 가볍게 눈인사했다.
가면 덕분에 날 알아본 모양.
앞선 경기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던 것 때문인지, 그의 눈에선 숨길 수 없는 경외심이 흘러나왔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막시무스 데메테르 마뉴스]
[성향 : 중용]
[근력 : 207(+?)] [민첩 : 194(+?)] [체력 : 198(+?)]
[정신 : 104(+?)] [지력 : 59(+?)] [마력 : 190(+?)]
[각성 능력 : <특급검방술> <고급검술> <특급방패술> <고급마나운용> <고급박투술> <중급치료술>]
[업적 특전 : 역전의 명장]
제법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그럼에도 나는 인벤토리에 창을 집어넣고, 막시무스와 똑같이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상대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일명 미러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평범하게 해서는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없어.’
이 경기를 보고 있는 모든 신들은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상태에서 내가 막시무스를 죽여봤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길 사람이 이겼구나, 그 정도의 반응 뿐.
그래서는 곤란하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해.’
단순히 승패를 떠나서, 왜 이 경기를 봐야 하는지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내 경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상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기로 쓰러트리는 거지.’
매 경기 내가 미러전을 펼친다면?
검객을 검으로 쓰러트리고, 궁수의 머리에 화살을 박아 넣는다면?
‘제법 흥미를 끌 수 있을 거야.’
그것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날 상대하는 막시무스의 입장은 다를 테지만.
“······뭐 하는 거지?”
검과 방패를 꺼내 들자, 예상대로 막시무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내가 녀석을 무시한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사의 긍지를 존중해 줄 줄 모르는 미개한 놈이었군.”
“······.”
“비록 지금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지만, 그따위 행실로는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창을 들어라.”
내게 검을 겨누며 으르렁거리는 막시무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막시무스의 마음에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절실함이 부족한 모양인데.’
나보다 강한 상대가 날 얕잡아 본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난 상대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것이다.
아니, 발을 핥을 수도 있다.
그 방심 덕분에 내가 죽을 확률이 아주 조금이라도 낮아질 테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다.
“흥, 지금 그 선택. 후회하도록 만들어주지!”
내가 검과 방패를 든 채 가만히 바라보자, 막시무스가 고함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방패로 차징한 후에 검으로 빈틈을 찌르려는 모양세.
나는 방패를 내밀어, 가볍게 녀석을 밀어냈다.
챙! 콰직!
“헛!”
그러자 주춤하는 막시무스.
뇌전의 데미지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한 것이다.
‘쉽게 끝나겠는데?’
나는 곧바로 녀석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캉! 콰지직!
방패로 크게 쳐내자, 방패를 든 막시무스의 왼 팔이 크게 꺾여나간다.
녀석의 경동맥, 왼쪽 어깨, 명치와 심장 등등 방패에 가려져 있던 급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근력 스텟에서 차이가 제법 심하다 보니, 허무하게 빈틈을 노출시킨 것.
“어딜!”
하지만 내 생각처럼 쉽게 끝나진 않았다.
오히려 뒷걸음질 치며 검을 쳐낸 막시무스가, 이를 앙다문 채 방패를 휘두르며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콰직! 콰지직!
검, 그리고 방패가 부딪힐 때마다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인내심이 제법이군.’
자기가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녀석은 뇌전 데미지를 무시한 채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펼쳐진 검과 방패의 초근거리 전투.
챙! 콰직! 챙! 카강! 콰지지직!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히며 뇌전의 스파크가 터지고, 검이 서로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쉽지 않네.’
무기를 다루는 기교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특급 검방술을 가지고 있는 막시무스.
반면에 내 경지는 최상급 검방술이다.
그럼에도 내가 밀리지 않은 채 공방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스텟과 스킬의 우위, 그리고 초감각 덕분이었다.
“흐읍!”
방패로 내 시야를 가리면서, 사각으로 검이 쇄도한다.
초감각이 없었다면 막아내기 어려운 부위.
나는 스텝을 밟아, 뒤로 빠져나가며 녀석의 공격을 가볍게 무마했다.
그리고는 역으로 막시무스의 허벅지를 노리며 검을 뻗었다.
카아앙!
‘방어를 뚫기가 쉽지 않겠군.’
방패 활용도가 뛰어나다 보니, 막시무스에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주창범의 상위 호환 버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까가가가강―!
“······!”
빈틈이 없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만들면 그만이지.’
방패로 녀석의 방패를 치워낸 나는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흥!”
그러자 검을 방패처럼 사용하며 내 공격을 막아내는 막시무스.
방패를 검처럼 쓰고, 검을 방패처럼 쓴다.
한 손을 무력화시켜도, 다른 손이 유기적으로 빈틈을 메운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유효타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갉아먹어야겠군.’
검과 방패의 미러전.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관건은 누가 더 많은 데미지를 쌓느냐.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작부터 유리한 싸움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챙! 콰지직!
뇌전이 내부로 파고들어, 계속해서 데미지를 입힐 테니까.
“크윽.”
내 예상대로 공방이 길어지자, 막시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교가 떨어지는데도, 내가 생각보다 잘 막아내고 있어서 당황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배울 게 많은데?’
공세로 전환한 막시무스의 실력은 무척 훌륭했다.
녀석은 공격할 때도 검보다 방패를 더 많이 활용하는 스타일.
만약 방패 하나만 있었어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나중에 주창범한테 알려줘야겠어.’
방패로 쉴 새 없이 압박해 들어오고, 검은 최소한의 상황에서만 사용한다.
마치 카운터를 꽂아 넣는 느낌.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숨겨둔 한 방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도 쉽게 공격을 넣을 수가 없었달까.
‘그래 봤자야.’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젠장!”
막시무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마 미칠 지경일 것이다.
기교가 떨어지는 탓에 나는 주로 방어를, 그리고 막시무스는 어떻게든 그걸 뚫어내기 위해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무스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든 내 방어를 뚫어내는 것뿐이다.
조금 더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플레이해야 한달까.
하지만 녀석은 그게 되지 않았다.
띠링!
[<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간간이 터지는 벽력에 간담이 서늘할 테니까.
언제 이 무시무시한 스킬이 발동할지를 알 수가 없으니, 대담하게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크윽······ 제기랄!”
결국 뇌전의 데미지가 많이 쌓이면서 막시무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슬슬 끝내야겠군.’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판단을 내린 나는 뇌신 강림을 발동시키며, 막시무스를 몰아붙였다.
한쪽은 필승 전략이 있고, 한쪽은 없는 상황.
이미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4경기 5라운드]
[생존자 : 69명(부전승 1명)]
[맵 : 아베플라토 대밀림(중)]
[렌 vs 오클리]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
곳곳에서 벌레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습한 공기로 인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후우.’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 한가운데에 몸을 숨긴 나는, 신경을 곤두 세운 채 활대를 만지작거렸다.
쐐애애애액!
잠시 후 들려오는 옅은 파공음.
핑-! 핑-! 핑-! 핑-!
곧바로 대응 사격한 나는, 재빨리 뒤로 빠져 나갔다.
‘이쯤이면 됐어.’
한동안 달려,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풀숲 사이로 숨어들었다.
5라운드의 상대는 궁수.
은·엄폐가 용이한 맵에서 싸우게 되다 보니, 몸을 숨긴 채 저격하는 식으로 싸움이 흘러갔다.
지금까지 서로가 주고받은 화살의 숫자는 100발 가량.
‘이번 상대가 제일 까다롭네.’
2경기는 검객이었고, 3경기는 암살자, 4경기는 마법사였다.
검은 제법 잘 다루는 편이라 2경기는 쉽게 이겼고, 은신을 사용하는 암살자 역시 마찬가지.
초감각 앞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다.
마법은 내가 다룰 줄 모르다 보니, 4경기엔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해서 단숨에 죽여버렸다.
한마디로 무난하게 경기가 흘러갔다고나 할까.
‘맵 상성이라도 좋아서 다행이야.’
반면에 궁수와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만약 탁 트인 곳에서 싸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상대는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만큼, 나보다 명중률이 훨씬 뛰어날 테니까.
반면에 지금처럼 저격 위주로 상대한다?
‘그럼 나한테 더 유리하지.’
저격도 결국 은신해서 상대를 사냥하는 방식.
부족한 궁술을 조금이나마 메꿔줄 수 있다.
활 만으로 상대를 쓰러트리기 충분할 것이다.
숨 죽인 채, 다시 은밀하게 거리를 좁히길 5분 여.
‘찾았다.’
숲 한쪽에서 누군가가 살금살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5라운드 상대, 오클리가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낮은 포복을 유지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뿌드드득―
상대를 겨냥한 채 활시위를 당겼다.
녀석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하고, 은밀하게.
‘더 가까이 와라.’
최대치로 활시위를 당긴 나는,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지금 거리에서도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맞출 자신은 있지만,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녀석이 피할 수도 있으니까.
앞선 저격들 모두 그렇게 해서 실패했고.
‘조금만 더.’
그런데 거리가 줄어들면, 소리를 듣고 피할 시간도 짧아진다.
이번 만큼은 녀석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핑!
녀석이 120미터 안쪽까지 들어온 상황.
한동안 녀석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나는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놨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만약 맞추지 못하면, 다시 은신한 뒤에 녀석을 저격해야 했으니까.
띠링!
[플레이어 ‘오클리’를 처치했습니다.]
[4경기 5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6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됐어!’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들어, 궁수가 있는 곳을 살폈다.
그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마가 꿰뚫려 있는 오클리의 모습이 보였다.
무려 2시간 동안 펼쳐진 저격전.
결국 내가 녀석마저 미러전으로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경기장으로 이동할 게이트를 기다렸다.
‘슬슬 랭커들을 만날 때가 됐는데.’
남은 인원은 35명.
이제부터 본선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띠링!
[4경기 6라운드 부전승 대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잠시 후 7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어?’
부전승?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4경기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1,103명.
2의 제곱수가 아니다 보니, 토너먼트 방식의 대전에선 부전승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경기 손해 봤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승하는 게 목표였다면 무척 반가울 소식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MVP 경쟁을 노리는 입장에서, 신들에게 자주 노출될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쏴아아아아아―
그때, 하얀 빛이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임팩트.
6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끝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신성력을 이용한 시간 왜곡을 한 모양이었다.
하얀빛이 절정에 이르며, 짧은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그리고.
[4경기 7라운드]
[생존자 : 18명(부전승 1명)]
[맵 : 안타레스 해협(중)]
[렌 vs 엔키두]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7라운드 경기장에 입장했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뭐야?’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
저 멀리, 육지가 보인다.
그사이에 펼쳐져 있는, 무수히 많은 나무 판자들과 박살 난 수십 척의 배.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수상전?’
이번 경기는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경기였다.
그것도, 위태위태하게 떠 있는 배의 잔해들을 밟으며 펼쳐지는.
저 멀리, 하얀 장막 안에 갇혀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이제야 랭커를 만났군.’
상반신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야생미 가득한 모습.
그 위에 드러난 우락부락한 몸과, 길게 흘러내린 수염.
손에는 징이 박힌 권갑拳甲을 끼고 있다.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엔키두.’
이번 경기의 상대는 바빌론 출신의 랭커, 엔키두였다.
‘쯧, 미러전은 안 되겠는데.’
최근에 박투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 상황.
엔키두를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가지고 있는 권갑이 없었다.
애초에 중간중간 견제용으로 박투술을 배운 거였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무기를 고를 수 있는 상황.
‘어떤 무기를 꺼낼까.’
최대한 잘 괴롭혀줄 수 있는 무기로 고를 생각이었다.
< 174화. 증명의 서(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