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증명의 서(5) >
“1구역이 비었다. 어서 악마를 소환해!”
“맵 로딩이 안 되는데? 4경기 맵 담당자가 누구야!”
“미르엘 님! 여기, 요청하신 서류입니다!”
성계 대항전 진행으로 분주한 미카엘의 집무실.
‘휴우, 도대체 왜 맨날 이런 순간에만 찾아오는 거지?’
파사엘은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한 손님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덟 쌍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기분 나쁠 때 보이는 버릇.
“고생이 많다, 미카엘. 밸런스 문제로 방금 전까지 시끄러웠는데, 금세 잠재웠더군. 한낱 플레이어가 그런 결정을 했을 리 없을 터. 아마 그대의 숨은 노고 덕분이겠지?”
“아닙니다, 오딘 님.”
불청객, 오딘의 말에 미카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상위 리그의 재도약은 시간 문제더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수고 많았다.”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등을 기대는 오딘.
파사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욱! 하고 올라왔다.
순간 불경한 생각이 들 정도.
‘참자, 참자.’
이런 초대형 이벤트가 진행될 때는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총책임자를 붙잡아 놓고 저런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후우.’
참자.
“아, 이번 성계 대항전을 개최하기 위해 팀 투지의 팜에 직접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예,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직접 나와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때 렌도 직접 만났겠지?”
오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미카엘.
그 모습에 파사엘은 의아했다.
정말 궁금한 일이 생겼을 때, 미카엘은 몸짓을 보이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뒤에 나올 이야기를 기다릴 뿐.
그런데도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렌이 언급되는 걸 불편해하시는 건가?’
항상 곁에서 미카엘을 보좌하는 파사엘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미카엘은, 렌에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걸.
“예, 직접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미카엘이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집무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
바쁘니 용건을 얘기하고 얼른 가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여유롭게 홀짝였다.
“렌을 직접 봤을 때 감상을 물어도 되겠나?”
“음······. 크게 기억나는 건 없었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나쁘지 않다?
파사엘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1급 치천사, 미카엘.
그리고 2급 지천사 파사엘.
천계 전체로 보자면 대단한 존재는 아니지만, 일개 플레이어에겐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지고지순한 존재들.
‘그런데도 렌은 전혀 위축된 것 같지 않았어.’
처음 만났을 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성계 대항전이 언급되자마자 공손한 모습으로 돌변하고.
이후 조건을 듣더니, 또다시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기다 추가 조건을 언급할 때의 배짱이란.
‘인생 2회차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 모습이 파사엘에겐 무척 인상 깊었다.
그리고 미카엘 또한 비슷한 감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얘기한다는 건.
‘오딘 님을 경계 중이신 건가, 미카엘 님이? 도대체 왜?’
파사엘은 바쁜 상황이 끝나면 그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라······.”
길게 흘러내린 수염을 쓸어내리며 읊조리는 오딘.
모두가 입을 닫자, 미카엘과 파사엘, 오딘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어어! 3구역 악마의 숫자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여유 악마는 몇 마리 남았지?”
“이제 만 마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더 찍어 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악마가 끊겨선 안 돼!”
그 탓에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천사들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한동안 말문을 아끼던 오딘이 다시 입을 연 건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가면.”
“······.”
“그 가면에선 무언가 느껴지는 게 없던가.”
“없었습니다.”
오딘의 물음에 즉답하는 미카엘.
그러자 오딘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음, 심판자의 눈을 가지고 있는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아, 참. 이번 성계 대항전이 끝나고, MVP는 그냥 발표만으로 끝난다지? 그러지 말고, MVP에 한해선 주신들이 직접 수여하는 게 어떻겠는가?”
“주신님들이 직접?”
미카엘의 물음에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도약을 위한 초대형 이벤트. 이럴 때 주신들이 직접 MVP를 수여한다면, 분위기를 크게 바꿀 수 있을 테지.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
오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미카엘.
그 모습에 오딘과 파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는 네 존재밖에 없는 1급 치천사.
그 사대천사의 수장, 미카엘.
그래서 주신급 예우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게 실제로 주신들과 동급이란 소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미카엘이 보이는 반응은 파사엘의 입장에선 무척 의외였다.
‘오늘따라 왜 그러시지?’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례하신 분은 아닌데.
하나 남은 오딘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이유는?”
오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거운 존재감이 집무실 안을 찍어 눌렀다.
그럼에도 미카엘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지시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
“······!”
미카엘의 말에 오딘과 파사엘이 흠칫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초월자.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
그분의 지시라면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아선 안 된다.
“······그렇군. 바쁜데 시간을 오래 뺏어서 미안하구나.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지금까지 여유로움 속에 속내를 숨기고 있던 오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외의 대답에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원래는 배웅해 드려야 마땅하나, 상황이 허락해 주지 않음을 용서하시길.”
미카엘이 주변을 눈짓하며 말하자, 오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길 바라겠노라.”
그리고는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휴우.”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파사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킬 수 순위]
[1위. <17> ― 154킬]
[2위. <196> ― 153킬]
[3위. <444> ― 153킬]
[4위. <1,101> ― 151킬]
[5위. <99> ― 149킬]
.
.
[109위. <1> ― 100킬]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잘게 깨진 마력의 빛무리가 흩날리며 사방을 비췄다.
쇳소리, 서로에게 내뿜는 살기, 비명, 찢겨나간 살점들, 마법이 터지며 울리는 굉음.
그 모든 게 버무려지며 거대한 광기를 만들어냈다.
살육이 만들어낸 지옥도.
‘이번엔 뭐가 각성될까.’
그 속에서 나는 다음에 나올 상태창을 기다렸다.
띠링!
[<피의 각성>이 <섬전>을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섬전> 능력의 쿨타임이 90% 감소합니다.]
이번에 각성된 능력은 섬······전······?
‘뭐야?’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가면에 딸린 능력만 업그레이드 되는 게 아니었어?’
나는 서둘러 <피의 각성> 설명창을 열었다.
[<피의 각성> ―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 강화 수치는 랜덤이다.(발동 조건이 존재합니다.)]
[<피의 각성> 발동 조건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1포인트씩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포인트 상승이 초기화된다. 100포인트를 채울 경우 <피의 각성>이 발동되며, 유지 시간은 24시간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발동이 종료된 이후부터 재사용 대기 시간이 계산된다.)}]
[<피의 각성>은 발동시킬수록 각성의 효과가 점점 커집니다.]
설명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
그 어디에도 가면의 능력 중에서라고 쓰여 있는 곳이 없었다.
‘미친.’
순간 소름이 돋았다.
가면의 능력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면,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해질 테니까.
가장 대표적으로.
‘벽력이 강화될 수도 있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능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벽력이다.
벽력의 발동 확률은 0.5%.
뇌신강림까지 활성화하면 1%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뇌신강림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벽력이 강화된다면?
‘폭뢰보다 더 사기겠는데?’
벽력이 발동되면 근력 혹은 민첩 스텟이 50% 상승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인 폭뢰보다 더 사기라고 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긴박하게 흘러가는 전장 속에서,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피의 각성에 대한 고찰은 이걸로 끝.
이제 남은 건, 부작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체크할 시간이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여전히 들리는 가면의 목소리.
‘소리가 많이 작아졌어.’
다만 이전과 달리,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손발을 움직여봐도 크게 걸리는 게 없고, 정신도 멀쩡하다.
그 외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딱 한 가지.
“크하하하하하! 제법 잘 버티는구나!”
“흥! 구현된 존재 주제에, 재수 없게 말하는 건 여전하네!”
주변에서 싸우는 플레이어와 악마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저 목에 창날을 박아넣고 싶다.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을 내지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살인 충동에, 손발이 움찔움찔거렸다.
‘후우. 제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충동을 억제했다.
이 정도라면 열반이 활성화되어 있을 땐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명경지수 상황에선 쉽지 않겠지만.’
이걸로 피의 각성 테스트는 끝.
‘사냥 시간이군.’
나는 바닥을 박차며, 악마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띠링!
[<섬전>을 사용합니다.]
꽈앙!
벼락이 터지며 악마들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한 나는, 크게 창을 휘둘렀다.
“······!”
“······!”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눈을 치켜뜨는 악마들.
호흡이 짧게 끊어지고, 동공이 확장된다.
손톱, 검, 사신의 낫 등 다양한 무기가 급하게 궤도를 바꾼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 창보다 빠를 수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
단숨에 세 마리의 악마를 처치한 나는 근처의 다른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조심해라! 특이한 능력을 사용······ 끄으윽!”
그러고는 6초가 지나자마자 또다시 섬전을 사용해 순간 이동했다.
서걱! 서걱! 서걱!
순간 이동, 학살, 순간 이동, 학살······.
그렇게 한동안 사냥하다 보니, 킬 수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킬 수 순위]
[1위. <17> ― 596킬]
[2위. <196> ― 584킬]
[3위. <444> ― 583킬]
[4위. <1,101> ― 581킬]
[5위. <99> ― 564킬]
[6위. <1> ― 563킬]
109위였던 순위가 어느새 6위까지 상승해 있었다.
‘미쳤는데?’
피의 각성으로 인해 현재 섬전의 쿨타임은 6초.
1분에 10번을 사용할 수 있고, 한 번 사용하는데 1포인트의 마력이 필요하다.
현재 내 마력 스텟이 279.
몽환의 달빛이 1분에 1%씩 회복시켜준다.
1분 회복량은 2에서 3포인트.
그렇게 단순 계산하면.
‘37분 동안은 마음 놓고 쓸 수 있겠군.’
마력이 다 떨어질 때 쯤엔, 다른 플레이어들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킬 수가 쌓일 것이다.
꽈앙! 서걱! 서걱! 서걱!
“이런 미친!”
“저걸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순간 이동으로 나타날 때마다 악마들이 경악했다.
내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
‘진짜 사기네.’
만약 내가 악마들 입장이어도 미치고 팔짝 뛰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창날이 뻗어온다.
어떻게든 막아내고 공격을 휘두르려고 하면 이미 사라져 있다.
만약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나는 앞뒤 재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도저히 죽일 방법이 없었으니까.
“씨발! 특전 회수한 거 맞아?”
“저런 식으로 블링크를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젠장, 젠장! 이미 상위 리그에서 놀 수준이 아니었어······!”
내가 싸우는 걸 본 플레이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악마들을 휩쓸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이번 경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내 차지였다.
* * *
└미친..
└벼락이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네..ㅎ
└아니 ㅡㅡ 특전 회수한 거 맞음?
└맞을 듯.. 저 스킬 렌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거임..
└와 씨발 그냥 혼자서 가지고 노는구나 ㅋㅋㅋㅋ 이젠 웃음밖에 안 나오네 ㅋㅋㅋㅋㅋㅋ
└이야ㅋㅋㅋ 상위 리그에서 이런 플레이를 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ㅋㅋㅋㅋ 쟨 그냥 고위 리그로 올려보내는 게 맞을 듯 ㅋㅋㅋㅋㅋㅋ
└성계 대항전이라고 쓰고, 렌의 놀이터라고 읽는다.
└하위 리그 본 신들은 다들 지구에 베팅했을 텐데 ㅋㅋㅋㅋㅋㅋ 렌은 하위 리그에서 열린 성계 대항전도 혼자서 싹 쓸고 다녔음 ㅎ
└지금까지 렌 까던 애들 다 대가리 박아라ㅡㅡ
< 171화. 증명의 서(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