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증명의 서(3) >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중급 악마들이 끊임없이 날아든다.
“오늘 네 놈들을 제물 삼아 이곳에 지옥도를 펼쳐주겠노라!”
“진정한 마계의 저력을 보여주지!”
검을 쥐고 있는 악마,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는 악마, 거대한 사신의 낫을 들고 있는 악마 등등.
중급 악마의 검은 날개로 하늘이 까맣게 메워질 정도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몸에서 흘러나온 뇌전의 스파크가 창날에 모이며,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기에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 재수 없는 가면을 박살 내 주지!”
몰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창을 내리쳤다.
‘잘 가라.’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아니,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려치기 하나면 충분했다.
“······!”
“······!”
굉음과 동시에 강렬한 빛이 번쩍! 하자, 내게 덤벼들던 중급 악마들의 몸이 잘게 터져 나갔다.
후두두두두둑―
찢기거나 조각난 살점들, 그리고 핏물로 이루어진 소나기가 내 몸을 두들겼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
무시무시한 위력.
‘미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다이아 등급 스킬······.’
희열감에, 온몸이 잘게 떨릴 정도.
그 압도적인 위용에 대규모로 밀려 들어오던 악마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으으······!”
“괴, 괴물이다······!”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됐는데, 벌써부터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내 시선을 받은 녀석들이 벌벌 떨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말도 안 돼!”
“미, 미친!”
“중급 악마들을 저렇게 간단히 죽인다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후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 전부 <코드 제로>를 경험한 상태.
당시 중급 악마들을 상대하며 치를 떨던 플레이어가 많았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
격렬한 전투가 펼쳐져야 할 전장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틈에 나는 곧바로 스킬창을 열었다.
[<스킬:폭뢰(爆雷)>]
[패시브]
[마력에 벼락의 기운이 깃듭니다.]
[벼락의 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관통합니다.]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마력에 벼락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
‘미쳤네.’
스킬을 사용해 보기 전이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대단한 스킬을 얻었어.’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휘두르는 모든 공격에 벽력이 발동한다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설마 성장형 스킬일 줄이야.’
사실 뇌정雷精을 얻었을 때만 해도, 플래티넘 등급치고는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뇌신 강림이라는 2차 연계 스킬이 가능한 뇌룡의 포효.
다양한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유틸리티 스킬인 그림자 표식.
내 테크닉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준 천뢰십보까지.
모두 플래티넘 등급에 걸맞은 효과들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와 반면에 뇌정은.
‘스텟을 올려주는 것도, 휘하 옵션도 없었지.’
아주 강한 뇌전의 힘이 깃든다는 것뿐.
딱 한 줄 쓰여있는 걸 보고서 힘이 빠질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건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스킬이었을 줄이야.
‘4중첩된 뇌전이 업그레이드 커트라인을 건드린 모양이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뇌전은 네 개다.
첫 번째는 지금 들고 있는 창, 벽력섬전에 깃든 뇌전.
두 번째는 천뢰십보에 들어있는 뇌전.
그리고 뇌신 강림을 발동시켰을 때 발동되는 ‘강한’ 뇌전.
마지막으로, 뇌정이 가지고 있는 ‘아주 강한’ 뇌전까지.
‘왜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가 싶었는데.’
숨겨진 히든 옵션이 존재했던 것이다.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1,808,700점]
[2위. ‘졸본’ 1,794,100점]
[3위. ‘미드가르드’ 1,786,800점]
[4위. ‘발리노르’ 1,770,900점]
[5위. ‘웨스테로스’ 1,759,400점]
[6위. ‘알프하임’ 1,748,600점]
[12위. ‘지구’ 51,6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822명]
현재 공헌도 순위는 지구가 꼴찌.
다른 성계처럼 점수를 계산하면 공헌도 172만 점을 획득했다.
1위인 탐리엘의 180만 점에 비하면 8만 점이나 부족한 상황.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우승 경쟁이 무의미하게 됐어.’
이미 이번 경기의 승패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차피 2차전 승리는 지구가 가져가게 될 것이다.
‘제대로 놀아볼까.’
꽈광!
섬전을 사용하자, 한줄기 벼락과 함께 내 몸이 중급 악마들 사이로 순간 이동했다.
“헉!”
“조, 조심······!”
그리고는 적들 사이를 파고들며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
떨어져 나온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내 몸을 적셨다.
창은 베거나 찌르는 무기.
그럼에도 적들을 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으아아악!”
“살려 줘어어!”
거의 녹아내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재밌어.’
이게 바로 초월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등급의 스킬.
나는 피의 각성이 발동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가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ㄷㄷㄷㄷㄷㄷ 뭐임? 지금까지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번호인데, 갑자기 지랄발광이네;;
└아 씨발 장난하냐? 이딴 걸 성계 대항전이라고 내놓은거임? ㅈ같네 진짜;
└도대체 무슨 스킬을 업그레이드해 준 거냐? 1경기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진짜 선 넘었잖아ㅡㅡ
└내가 봤을 땐 이거 후폭풍이 심할듯. 게임 메이커가 자기도 지구에 베팅하고 경기 조작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임.
└갑자기 ㅈㄴ 허탈하다.. 진짜 많이 기대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킬 업그레이드가 다이아몬드 등급까지 가능한 거였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진짜 개빡치네
└더 이상 안 본다. 걍 때려 쳐라 ㅅㅂ
└《운영자》 상위 리그 관리 위원회 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플레이어 ‘렌’ 에게 <1티어 스킬 → 플래티넘 스킬> 업그레이드권 3개를 제공했습니다.
└《운영자》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 업그레이드>는 사실이 아님을, 주최 측 책임자의 신성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시청해 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야, 저게 다이아 등급이 아니라고?
└플래 등급 세 개인데 어떻게 저런 화력이 나옴? 말이 안 되는데?
└왜 말이 안 됨? 그냥 지금까지 렌이 실력을 숨겨온 걸 수도 있지 ㅋㅋ
└《운영자》 3경기부턴 밸런스 조정을 약속드리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 메이커도 당황한 거 봨ㅋㅋㅋ 저렇게 많이 올리는 거 처음 봄 ㅋㅋㅋㅋ
꽈아아아아아앙!
악마들을 도륙하고 다니길 한참.
“모두 흩어져! 녀석을 맞상대하지 마라!”
“주변의 다른 녀석들부터 정리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악마들이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한 번의 공격을 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다 보니, 무의미한 싸움이라는 걸 깨닫고 전략을 변경한 것이다.
‘나야 좋지.’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89/100)]
피의 각성 스텍이 벌써 89 포인트까지 차오른 상황.
나는 근처에서 불을 뿜는 마기포탑을 향해 내달렸다.
시가지까지 침투한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첨탑 근처에 세워져 있는 포탑이었다.
‘생명체만 아니면 된다는 거지?’
마기포탑 바로 앞에 도착한 나는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렬한 빛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창을 휘두를 때마다 뇌전 플라즈마가 사방을 휩쓸었다.
‘생각보다 단단하네.’
폭뢰 스킬을 활성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기포탑은 멀쩡했다.
아래가 조금 찌그러졌을 뿐.
‘뭐, 상관없지.’
한 번으로 안 부서진다? 그럼 부서질 때까지 두들기면 된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어차피 마기포탑은 근접 사격이 불가능하니까.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띠링!
[<5>가 <마기포탑>을 파괴했습니다.]
[공헌도 50,000점을 획득했습니다.]
“포, 포탑이 고작 여섯 번 만에······!”
“씨발! 도대체 저런 새끼를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이대로 아타신 거점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바알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지?”
“일단 모두 뒤로······끄아아악!”
주위를 둘러보자, 시가지의 악마들이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전히 격전을 치르고 있어야 했지만, 내가 돌아다니면서 중급 악마들을 집중적으로 죽여놨기 때문이었다.
‘이젠 경기가 무의미해졌는데?’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3,617,400점]
[2위. ‘졸본’ 3,588,200점]
[3위. ‘미드가르드’ 3,593,600점]
[4위. ‘발리노르’ 3,564,800점]
[5위. ‘무림’ 3,518,800점]
[6위. ‘알프하임’ 3,509,400점]
[12위. ‘지구’ 567,6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697명]
순위창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현재 12위.
마법사가 많아, 1위를 하고 있는 탐리엘과는 300만 점 이상 벌어져 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공헌도 / n으로 순위를 정하는 방식.
다른 성계처럼 점수를 계산하면?
1위. ‘지구’ 18,920,000점
2위. ‘탐리엘’ 3,617,400점
3위. ‘졸본’ 3,588,200점
4위. ‘미드가르드’ 3,593,600점
5위. ‘발리노르’ 3,564,800점
6위. ‘무림’ 3,518,800점
점수를 많이 주는 포탑과 중급 악마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더니, 넘어설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변수는 아예 사라졌어.’
여기서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저 점수 차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우승은 확정이군.’
이걸로 지구는 2승째.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열한 성계가 경쟁을 펼친다는 걸 감안했을 때, 2승 이상 차지하는 성계가 나올 확률은 높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남은 세 경기에서 내가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고.
“어어! 길 막지 마!”
“하, 누가 할 소리를!”
시가지의 악마들이 모두 정리되자, 플레이어들이 중앙의 첨탑을 향해 돌진했다.
어차피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챙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MVP 경쟁이라도 이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마성석을 부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면에선 조금 곤란하네.’
1경기, 그리고 2경기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플레이어를 꼽자면, 단연 내가 선정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선입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스킬 업그레이드 특전을 받은 거 때문에 평가절하당하겠지.’
특히 지금처럼 상식 외의 활약을 벌이면 스킬빨이라는 색안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실로 돌아가면 커뮤니티 반응부터 살펴야겠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99>가 <마성석>을 파괴했습니다.]
[2경기 <불꽃의 나라>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공헌도를 계산합니다.]
[공헌도 순위]
[1위. ‘지구’ 189,233점]
[2위. ‘탐리엘’ 36,174점]
[3위. ‘졸본’ 35,882점]
[4위. ‘미드가르드’ 35,936점]
[5위. ‘발리노르’ 35,648점]
[6위. ‘무림’ 35,188점]
[7위. ‘알프하임’ ······.]
저 멀리, 첨탑 위로 바글바글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잠시 숨 돌리고 있는 사이에 마성석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승리 조건 : <각 성계 공헌도 합계 / n>으로 공헌도가 가장 높은 성계]
[‘지구’ 승리!]
[2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곳곳이 무너져 내려, 흉측한 모습의 건물들.
살점이 찢어져 군데군데 팔다리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시가지.
코끝을 찌르는 혈향과 어마어마한 열기 속에서.
‘돌아가자.’
포근한 빛이 나를 감쌌다.
파바바밧!
[<스킬:뇌신 강림>을 비활성화합니다.]
[<스킬:폭뢰>가 <스킬:뇌정>으로 퇴화됩니다.]
‘후우. 일단 커뮤······어?’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눈을 치켜떴다.
온통 새하얀 6평짜리 작은 방 안.
대기실 한켠에 놓인 소파.
“오랜만이군요.”
그곳에 누군가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순백의 갑옷과, 그 뒤로 펼쳐진 열 쌍의 날개.
위로 땋아 올린 금빛 머리칼.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강인한 눈매.
“안녕하십니까, 미카엘 님.”
나는 무덤덤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반면에 속으로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지?’
다이아몬드급 스킬을 얻었다는 것 때문에 흥분해 있던 마음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녀는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
거기다 현재 진행 중인 성계 대항전을 주최한 존재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가져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설마 특전 때문에 온 건가?’
그게 아니면 이렇게 날 만나러 올 이유가 없었다.
“2경기는 잘 봤습니다. 무척 대단하시더군요. 굳이 특전 같은 건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죠.”
내 예상대로 특전을 꺼내든 미카엘.
‘침착하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내 물음에 미카엘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피식 웃었다.
“오프 더 레코드. 가능할까요?”
여기서 나눈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다.
“예.”
나는 미카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겠습니다. 현재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더군요.”
“그렇습니까.”
“네, 너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셔서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스킬 업그레이드 세 개에서 한 개로 줄이고 싶습니다.”
‘역시.’
내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특전을 자르겠다는 것.
“대신.”
“······?”
“성계 대항전이 끝나고, 원하는 스킬 한 개를 영구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겠습니다.”
“······!”
‘뭐?’
미카엘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169화. 증명의 서(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