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로세움의 회귀자-166화 (166/205)

< 166화. 절망의 편린(5) >

[<72>가 <창>으로 <44>를 처치했습니다.]

[경기 진행 시간 : 04:42:31]

[현재 생존자 수 : 333명]

푸슈우우우욱―

심장에 박힌 창을 뽑아내자,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죽은 44번을 내려다보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1회차 시절, 내게 절망을 안겨주었던 부채 여인, 주소월.

이번에는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내 손에 죽은 것이다.

100퍼센트 제 실력을 발휘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피의 강화 특전이랑 뇌신 강림까지 켰으면 아예 상대도 안 되겠는데.’

무림의 네임드, 최상위 랭커.

1회차 땐 고위 리그까지 올라갔던 플레이어.

이번 생에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날 뛰어넘을 순 없을 것이다.

‘후우.’

나는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등을 돌렸다.

‘이걸로 빚은 갚았어.’

사실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

1회차 때 그녀의 손에 죽긴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그때 그녀를 만나서 지금의 상황이 펼쳐진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꼭 한번 다시 만나길 염원했던 건.

‘1회차의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지.’

나 이렇게 변했다고.

이만큼 강해졌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주소월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1회차와 2회차를 가르는 경계선이 바로 주소월이었으니까.

‘정말 많이 강해졌어.’

문득 1회차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재능이라곤 쥐뿔도 없었기에, 독기 하나만 가지고 아득바득 버텼고.

‘정말 청승맞은 삶이었지.’

포식자의 눈을 피해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 없어.’

1회차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1회차의 나한테 얽매이지 말자.’

과거에 꼬인 매듭은 청산했다.

이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초월 리그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전에는 그저 막연히 높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본 초월 플레이어는 아예 격이 달랐다.

지금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래도 1회차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그때는 무슨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띠링!

[지금부터 1시간 후 새로운 데스 라인이 펼쳐집니다.]

[모든 플레이어분들은 지도를 확인해 주세요.]

알림창을 본 나는 지도를 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외곽 지역 16곳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었다.

총 49개 구역 중 남은 건 이제 9구역뿐.

‘슬슬 스포트라이트를 가져와 볼까.’

나는 중심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72번 뭐냐? 쟤, 렌 아님? 주소월을 그냥 가지고 노네 ㄷㄷ

└ㄷㄷㄷㄷㄷㄷㄷ 나 지금까지 주소월 경기 쭉 챙겨봤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거 첨봄 ㄷㄷ

└애초에 주소월이 죽은 거 자체가 처음 아니냐? ㅋㅋㅋㅋ

└주소월 거품설 ㅎ2

└아 씨발 저거 렌이 스킬 업그레이드 특전 받아서 그런 거잖아ㅡㅡ 개사기 아님? 애초에 개인전에서 저런 특전 준다는 거 자체가 대놓고 지구 밀어주겠다는 뜻 아니냐고ㅡㅡ

└ㅋㅋㅋㅋ 진정해 형ㅋ 여기서 렌이 최상위 랭커 중에 한 명인 거 모르는 신이 어딨어 ㅋㅋ 그 상태로 특전 받은 거 다 알고 있는데도 1.8% 나온 거 아냐? ㅋㅋ

└ㅇㅇ 개인전이라곤 해도 다른 성계는 100명인데, 지구는 렌 죽으면 끝임 ㅋㅋ 다른 애들이 렌 집중적으로 견제하면 지구 1승 하기도 힘들걸?

└맞지 맞지. 관건은 렌이 견제를 받고도 씹어먹냐 못 먹냐의 문제임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소월한테 특전 3개 주는 대신, 무림에서 혼자 출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ㅋㅋㅋㅋ 그럼 무림 찍을 흑우 업제?

└근데 저 정도로 쉽게 죽인 거면, 애초에 업그레이드 안 받아도 주소월 가지고 노는 거 아님? ㅋㅋㅋㅋ

└ㅇㅈㅇㅈ 지금 보니까 렌이 원래부터 주소월보다 강했을듯ㅋㅋ

중심부 쪽으로 향하자, 드문드문 보이던 플레이어의 숫자가 확 늘어나기 시작했다.

‘잘하면 피의 강화 특전을 발동시킬 수 있겠는데?’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높게 쌓은 스텍은 8 포인트.

맵이 워낙 넓은데다가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높다 보니, 30 포인트까지 쌓기가 무척 어려웠다.

3분 이내에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중심부는 인구 밀도가 좀 더 높겠지.’

지금은 맵의 크기가 처음보다 82%나 줄어든 상황.

아직 300명이나 남아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 개 같은 새끼가 감히 킬딸을!”

“하, 뺏기는 놈이 등신이지.”

“죽여버리겠다!”

캉! 카강! 챙! 서걱! 서걱! 챙! 카강!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꽈과과과과광!

미로의 귀퉁이를 돌자, 난전을 펼치고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그리고 바로 벽 너머로, 또 다른 무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헉, 72번이다!”

“랭커!”

내 등장에 뒤엉켜 있던 플레이어들이 떨어졌다.

딱 서로를 견제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힘을 합쳐 내게 협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

경험에 의해, 날 먼저 상대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시작해 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창을 고쳐 잡은 나는 곧장 세 명의 플레이어에게 돌진했다.

세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여섯 개의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떠나서.

서걱! 서걱! 서걱!

[<72>가 <창>으로 <402>를 처치했습니다.]

[<72>가 <창>으로 <894>를 처치했습니다.]

[<72>가 <창>으로 <516>을 처치했습니다.]

스텟 차이가 너무 극심했으니까.

지금 상태로는 고위 플레이어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3 포인트.’

세 명의 플레이어를 모두 죽인 나는 곧장 귀퉁이를 돌며 ‘ㄹ’자 형태의 미로를 주파했다.

“헉!”

“무슨!”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정신없이 싸우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일곱 명의 플레이어들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 창을 받아내는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14/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4/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체력 : 68%]

수직상승하는 피의 강화 스텍.

‘이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현재 내 근력과 민첩의 기초 스텟 합계는 357포인트.

한 명을 죽일 때마다 1%씩 상승하니, 3.5포인트가 오르는 셈이었다.

“씨발, 저런 새끼를 어떻게 상대하라고······.”

“미친! 점점 빨라지고 있잖아!”

“탑 랭커랑 격차가 이렇게 많이 난다니······.”

그 어마어마한 상승률에, 나를 상대하던 플레이어들이 경악했다.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일단 피의 강화 특전은 켜졌고.’

알림창을 힐끗 본 나는 바쁘게 미로를 돌아다녔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 쪽으로 길을 잡았다.

‘100포인트까지 어떻게든 채워야 하는데.’

예상보다 스킬 추가 슬롯을 활성화하는데 제약이 많은 상황.

이번 경기에 피의 각성까지 발동시켜 볼 생각이었다.

새로 얻은 열반 스킬을 시험해 봐야 했으니까.

초반에 랭커들이 많이 죽으면서 날 위협할 만한 존재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성계 대항전에선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피의 각성을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띠링!

[3분이 지나, 피의 각성 포인트가 초기화됩니다.]

‘쯧.’

하지만 이내 피의 각성 스텍이 초기화됐다.

한참을 달리며 사냥감을 찾았지만, 뭉쳐 있던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고 난 뒤로 더 이상 플레이어를 마주치지 못한 것이다.

남은 생존자는 200명뿐인데 아홉 구역에 나눠져 있다 보니, 생각보다 스텍 쌓기가 쉽지 않았다.

‘아까운데.’

저 멀리서 대규모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스텍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이번 경기에서 피의 각성을 발동시키는 건 보류.

여전히 200명이 남아있지만, 실시간으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나 혼자 절반을 죽이면 충분히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이 경기가 서로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이라는 것.

이번 경기에서는 1승을 챙겨오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가 중심부.’

되도록 플레이어가 많이 몰린 곳으로 이동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25구역에 도달했다.

1경기, 흑막의 미로 최중심부.

‘이래서 대규모 전투가 계속 이뤄졌던 거군.’

25구역은 다른 구역과 달리,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거기다 중심부엔 높이 1미터 정도의 커다란 단상이 존재했다.

마치 하나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법 잘 만들었는데?’

내심 감탄했다.

MVP를 따로 뽑겠다는 부분에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연출적으로도 이렇게 준비해놓았을 줄이야.

‘랭커들이 중심부에서 미쳐 날뛸 만했네.’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이제부턴.

‘내 자리가 되겠지만.’

“씨발, 도대체가 끝이 없네!”

“72번이면 44번 죽인 녀석이잖아?”

앞을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단상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달빛에 반사된 창날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두세 명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72>가 <창>으로 <1,101>을 처치했습니다.]

[<72>가 <창>으로 <980>을 처치했습니다.]

[<72>가 <창>으로 <1,039>를 처치했습니다.]

현재 단상 위에서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여덟 명.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녀석은 56번이었다.

“자격이 없는 자들은 내려가라.”

“흥! 누구의 검이 더 날카로운지는 대봐야 아는 법!”

“자고로 분수를 모르는 놈들 치고 장수하는 놈을 본 적이 없지.”

녀석이 반달처럼 휜 곡도를 휘두를 때마다 주변 플레이어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스텟이 제법 높아 보이는데.’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시르카 게일코타 프라사드]

[성향 : 냉혹]

[근력 : 257(+?)] [민첩 : 249(+?)] [체력 : 240(+?)]

[정신 : 136(+?)] [지력 : 84(+?)] [마력 : 244(+?)]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제법 좋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발리노르 성계의 랭커였던 것이다.

주변 플레이어들의 스텟까지 모조리 체크한 나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두르며,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헉, 미친!”

“새로운 랭커······ 커헉!”

서걱! 서걱! 서걱!

시르카와 주변 플레이어들 간의 팽팽하던 싸움이 내 등장으로 인해 단숨에 무너졌다.

흑막이 벗겨진 채 바닥에 쓰러진 일곱 시체.

단상 위에 남은 존재는 단 둘뿐.

[경기 진행 시간 : 05:00:01]

[현재 생존자 수 : 154명]

[지금부터 1시간 후 새로운 데스 라인이 펼쳐집니다.]

[모든 플레이어분들은 지도를 확인해 주세요.]

“······44번의 킬 로그를 봤을 때부터 알긴 했지만, 정말 제법이군.”

시르카의 호흡이 짧게 끊어졌다.

이전과 달리 무척 긴장한 것 같았다.

반면에 난.

‘섬전.’

꽈광! 챙! 콰지지지지직!

“······!”

녀석의 코앞으로 순간 이동해 창을 내리치자, 시르카가 움찔 떨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시르카보다 주소월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별거 아니군.’

더욱이 난 주소월을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압도했다.

시르카 쯤이야.

서걱!

가볍게 찍어 누를 수 있었다.

[<72>가 <창>으로 <56>을 처치했습니다.]

‘슬슬 경기가 끝나겠는데.’

지도를 힐끗 살피자, 25구역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붉게 칠해져 있었다.

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149명.

구역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탓인지 생존자의 숫자가 실시간으로 쭉쭉 낮아졌다.

생존해 있는 녀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올 테니, 이제 피날레를 장식할 때였다.

“젠장! 일단 저 녀석부터 먼저 죽이고 승부를 봅시다! 지금 상태로는 저 녀석이 승리를 챙길 거요!”

“찬성.”

“나도 찬성!”

근처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학살을 하고 다니자, 남은 생존자들이 똘똘 뭉쳐 대항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쓸데없는 짓이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뇌전을 뿌려대며 한 명씩 죽여나갔다.

그리고.

“큭······ 겨우겨우 지금까지 버텼는데······.”

띠링!

[경기 진행 시간 : 06:28:56]

[현재 생존자 수 : 1명]

[1경기 <흑막의 미로>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지구’ 승리!]

[1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에 단 한 명만이 남았다.

< 166화. 절망의 편린(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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