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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회귀자-165화 (165/205)

< 165화. 절망의 편린(4) >

머리 위에 <44>란 숫자를 달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주소월.

그녀는 콜로세움이 너무 좋았다.

‘시원해.’

스스로를 바람이라 생각했다.

바람은 자유로워야지, 어딘가에 속박되는 순간 생기를 잃는다.

그렇기에 주소월은 콜로세움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즐겁다고 느꼈다.

답답하던 황궁에 비하면 이곳은 매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땐 정말 따분했지.’

황녀라는 신분은 그녀에게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로이 밖을 돌아다닐 수 없다.

안에서도 누군가 항상 따라붙었다.

자신은 그저, 궁 내부에 핀 아름다운 꽃 한 송이일 뿐.

‘조금 더 돌아다녀 봐야겠네.’

주소월이 익힌 무공은 궁 생활의 지루함에 못 이겨 돌아다니다가, 황궁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청풍백화공.

내공으로 바람을 칼처럼 사용하는 그 신묘함 덕분에,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콜로세움 안에서도 그녀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디 재미있는 상대가 없을까?’

칼끝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긴장감.

온갖 공격들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던 그 짜릿함.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던 고수를 죽이면서 느꼈던 희열감.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주소월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선사했다.

그 기분에 취한 주소월은 장난스레 귀밑머리를 간질이는 한 줄기 산들바람처럼, 플레이어들을 톡, 톡 건드리고 다녔다.

‘흐응, 심심해.’

하지만, 그녀는 근래 다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강해질수록, 그런 느낌을 주는 고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니까.

후욱! 쐐애애애액!

부채를 휘두르자, 내공이 깃든 바람의 칼날이 사방을 휘저었다.

“커헉······!”

“젠장······. 이런 개사기 기술이······.”

[<44>가 <부채>로 <908>을 처치했습니다.]

[<44>가 <부채>로 <497>을 처치했습니다.]

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난도질 되어 허물어 내렸다.

이제는 그저 무의미한 학살일 뿐.

‘좀 강한 녀석 어디 없을까?’

자신을 긴장하게 하는 강자.

그런 존재와 다시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가령, 긴급 미션 당시 마주쳤던 쿠 훌린이라든가, 현재 상위 리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몽연, 을지문덕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챙! 채챙! 챙! 챙! 챙!

‘여기 제법 많네?’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주소월은 곧장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다섯.

검, 일본도, 단검, 창 등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재밌겠는데?’

보이는 거라곤 머리 위에 있는 숫자, 들고 있는 무기 뿐.

그러나 주소월은 설레는 마음으로 플레이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숫자가 제법 되는 만큼, 이들 중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해줄 플레이어가 존재할지도 몰랐으니까.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네요?”

그녀의 등장에 난전을 펼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44번이면······.”

“젠장, 랭커잖아!”

익명성이 보장된 경기지만, 간혹 그녀를 알아보는 녀석들이 있었다.

킬 로그도 나오는 데다가, 그녀처럼 특이한 무기를 사용할 경우엔 몇 번이 누구인지 대략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삐―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겠죠?”

주소월이 활짝 웃으며 부채를 휘둘렀다.

닉네임을 언급하면 삐― 처리가 되지만,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다.

쐐애애애애액! 콰과과과과과광!

주소월이 춤을 출 때마다, 사방으로 바람의 칼날이 뻗어나갔다.

“오러······?”

“강기!”

각 성계 상위 100명만 모아둔 경기답게, 플레이어들은 여유롭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걸 피하다니 제법이군요. 모두들 수준이 높아서 놀아볼 만 하겠어요, 후후.”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그러나 주소월은 기대를 잃지 않았다.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젠장! 괴물 같은 자식!”

“어어어! 잠깐 타임! 타임! 일단 저년부터 죽이고 싸웁시다!”

“타임은 개뿔! 어차피 개인전인데 한 놈이라도 더 잡아먹고 죽어야지!”

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한 명의 포식자 앞에서 똘똘 뭉쳐 대항할 거라고 생각했던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물론 그녀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주소월은 아무 감흥 없다는 듯 피할 뿐이었다.

온 힘을 다해 덤벼도 부족할 판에, 등 뒤를 경계하며 휘두르는 공격에 당할 정도로 그녀는 약하지 않았으니까.

‘흐응. 이벤트 전이라 그런가? 다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네.’

주소월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도 그녀를 즐겁게 해줄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

“젠장, 또 한 명이 추가됐군.”

그들이 싸우고 있는 ‘ㄹ’자 형태 미로에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계속해 등장했지만, 그들 또한 이전에 있던 플레이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뿐.

‘재미없어.’

흥미를 잃은 그녀가 부채를 들어, 단숨에 플레이어들을 죽이려 할 때였다.

“72번이면 이런저런 무기 쓰던 녀석인데!”

“혹시 저 녀석도 네임드는 아니겠지?”

저어기, 미로 끝 귀퉁이 한쪽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플레이어의 넘버는 72번.

또다시 추가된 플레이어를 본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주소월은.

‘다 죽이고 중심부 쪽으로 가봐야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모인 잔챙이들과 똑같을 게 분명했······.

‘어?’

순간 주소월은 흠칫했다.

“······!”

“······!”

“······!”

싸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는 72번.

녀석에게서 진득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 미친. 또 랭커인가······!”

“씨발 이런 외곽에 왜 랭커가 두 명이나 있는 건데!”

72번이 발산하는 존재감에 플레이어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주소월은.

‘킥!’

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저렇게 요란하게 등장했는데, 막상 상대해보니 별거 아니면 무척 웃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등장은 합격.’

보통 이런 서바이벌 경기에서는 살기를 뿜어대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모든 플레이어들의 타깃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저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데, 어느 정도는 재밌게 해주지 않을까?

“아주 터프한 분이 오셨군요?”

주소월이 활짝 웃었다.

초점 없던 그녀의 눈에 사르르 생기가 돋았다.

보이는 거라곤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와 손에 든 창 뿐.

‘흐응.’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다.

지루함에 메마른 상태에서, 잠시나마 갈증을 해소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절 진짜 즐겁게 해줘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주소월이 쥐고 있던 부채를 촤라락-! 폈다.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드릴 거니까.”

그리곤 72번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부채를 가볍게 휘둘렀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만약 기대치에 못 미치면 아주 악랄하게 괴롭힐 생각이었기에, 단번에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챙! 콰지지직!

‘나쁘지 않은데?’

기대어린 표정의 주소월이 미소 지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쩔쩔매기 일쑤.

그런데 72번은 강기가 깃든 바람을 찢으며 그녀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 공격 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어.’

주소월이 눈을 빛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그녀의 몸이 얕게 떨렸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 것이다.

후웅! 후웅!

주소월이 부채를 휘두르자 네 개의 초승달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이 정도 공격도 막아······어?’

뭐야?

당연히 막아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움직임이 너무 좋았다.

72번이 주변 플레이어들의 공격까지 피하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섬뜩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72번이 뻗은 창날이 어느새 그녀의 턱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히려 좋아.’

엄습해오는 불안감, 혹시나 하는 초조함.

그 덕분에 지금 순간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놀아볼까?’

의외의 상황에 주소월은 서둘러 강기가 깃든 부채를 휘둘렀다.

창날을 쳐내고, 그대로 파고들어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주면······.

챙! 콰지직!

“악!”

주소월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72번의 창을 막아내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72번의 공격.

‘모, 몸이 말을 안 들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그 순간, 아바마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바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걸 구속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지. 자유롭고 싶느냐? 무엇이든 깨부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주소월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멈출 순 없어.’

그녀의 목을 꿰뚫기 위해 날아드는 창날.

72번의 주변에 퍼지는 검은 연기.

주변에서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는 플레이어들까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읍!’

혀를 콱! 깨물자,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그제야 움직이는 그녀의 몸.

주소월은 바닥을 박차며 뒤로 빠져나갔다.

서걱!

섬찟한 피륙음과 동시에, 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해.’

띠링!

[<순보>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순보를 이용해, 단숨에 1미터 뒤로 순간 이동한 그녀는 입술을 짓이겼다.

‘너무 얕봤어.’

상대는 주변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진짜 고수였다.

처음부터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견제하며 원거리 전투를 펼쳤어야 했는데, 허무하게 거리를 내주다 보니 이런 상황이 연출됐던 것.

“하아, 하아.”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

너무 놀란 탓에 호흡이 뒤엉켰다.

일단 지금부터라도 상대를 견제해가며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바람을······.’

그런 생각을 하며 부채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꽈광!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던 72번이, 어느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치 내리치는 한줄기 벼락처럼.

“······!”

주소월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 개자식들이!”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냐!”

하지만 이곳엔 그녀와 72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달려들며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챙! 콰지지지직! 서걱! 서걱!

[<72>가 <창>으로 <1,094>를 처치했습니다.]

[<72>가 <창>으로 <683>을 처치했습니다.]

창이 번뜩이자, 두 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순식간에 주변을 도륙하는 창날에 심장이 철렁했다.

‘뭐, 뭐야.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잠깐이나마 시간을 번 덕분에 목이 꿰뚫리는 걸 피한 주소월이, 서둘러 플레이어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 상위 리그에 존재한다고?’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더라도,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뭐, 뭐야! 설마 72번이 쿠 훌······!”

“씨, 씨발······.”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둠이 내려앉은 미로에 한 줄기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72번이 휘두른 단 한 번의 공격에 남아있던 플레이어 세 명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지금 상태론 절대 상대할 수 없어.’

빠르게 판단을 내린 주소월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더는 길을 막아줄 플레이어가 없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뿐이었다.

띠링!

[<스킬:폭풍화우暴風花雨>를 발동합니다.]

바로 그녀의 비기秘技를 사용하는 것.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나들은 뭉실뭉실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주위로 몰려든 바람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강기를 머금은 아홉 줄기의 회오리가 주변을 난도질하며 커져갔다.

‘이 기술이라면.’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래봤자 상위 플레이어.

이 공격이라면 충분히 72번을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훗.”

그때 72번이 실소를 내뱉더니, 그대로 폭풍화우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가가가강!

회오리와 창이 부딪히자 쇠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찢겨져 나가는 회오리들.

그 바람 중 일부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

다리가 풀린 주소월이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움직임이 너무 빨라 거리를 벌릴 수가 없다.

바람처럼 순간 이동하는 스킬을 사용하면, 점멸하는 빛처럼 따라붙는다.

맞상대하면 한줄기 벼락이 그녀의 내부를 난도질하고, 비기마저 가볍게 찢어버린다.

‘뭔가 잘못됐어. 이럴 리가 없는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최상위 랭커를 논할 때 주소월의 닉네임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이렇게까지 압도하는 존재가 있다고?

순간 그녀의 뇌리에 여러 닉네임이 스쳐 지나갔다.

쿠 훌린, 몽연, 을지문덕, 예천화 등등.

하지만 주소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아니야.’

그 누구도 그녀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쿠 훌린과는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지만, 자신보다 조금 더 강할 순 있어도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72번은.

‘절대 이길 수 없어······.’

주소월의 몸이 벌벌 떨렸다.

마음속에서 무력함이 피어올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절망이라는 감정이겠지.

‘아······.’

72번과 시선을 마주친 주소월이 움찔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라는 바람이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자유로이 날갯짓하는 한 줄기 바람이 아니었던가.’

푹!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을 싸늘한 창날이 꿰뚫었다.

< 165화. 절망의 편린(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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