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절망의 편린(1) >
5평 크기의 대기실.
텅 빈 방 한쪽에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혼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대기실은 변한 게 없네.’
하위 리그 때와 똑같은 모습.
대기실을 한번 둘러본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띠링!
[플레이어 ‘렌’ 님께 <성계 대항전 특전>이 도착했습니다.]
[<성계 대항전 특전>]
[성계 대항전 진행 중에 한해서, 플레이어 ‘렌’이 보유 중인 스킬 중 세 개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킵니다.]
[특전을 적용시킬 스킬을 선택해주세요.]
[1. 마력 상쇄]
[2. 명경지수]
[3. 뇌신雷身]
그와 동시에 등장한 알림창.
그걸 보자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기다리던 특전이었는데, 입장하자마자 바로 나온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알림창을 한번 슥- 훑은 나는 1, 2, 3번을 차례로 눌렀다.
어차피 선택지랄 게 존재하지 않기에, 내 손길엔 아무런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스킬:마력 상쇄>가 <스킬:마력 갑옷>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명경지수>가 <스킬:열반>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뇌신>이 <스킬:뇌정>으로 강화되었습니다.]
‘후우. 플래티넘 등급만 여섯 개라니.’
묘한 희열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뇌룡의 포효와 그림자 표식, 천뢰십보 모두 어마어마한 옵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킬들은 얼마나 대단할까?
얼마나 기상천외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을까?
부푼 마음을 안고, 서둘러 옵션들을 체크했다.
[<스킬:마력 갑옷>]
[패시브]
[자신의 마력 수치에 비례하여 마력이 깃든 공격을 방어합니다.]
[마력 10 스텟 당 5%의 마력 방어]
[최대 50%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다.]
[방어한 마력의 10%는 상대방에게 ‘반사’합니다.]
스킬 설명을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마력 갑옷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달린 옵션은 딱 하나 뿐.
하지만 그 하나가 너무 대단했다.
‘데미지를 반사시킨다고?’
주창범과의 대련에서 나를 쩔쩔매게 한 능력이 있다면 단연 반사 데미지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녀석이 뿜어대는 한기와, 내가 가지고 있는 뇌전이 동시에 나한테 향할 때의 그 기분이란.
‘굉장히 찌릿찌릿했지.’
주창범이 가지고 있던 반사 데미지는 고작 1%.
그런데 마력 갑옷은 무려 10%나 반사한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무조건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어.’
그 효용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스킬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스킬:열반>]
[패시브]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스킬입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자신의 정신 수치에 비례하여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기운을 상쇄 시킵니다.]
[정신 10 스텟 당 9%의 기운 상쇄]
[최대 90%까지 상쇄 시킵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열반 스킬은 마력 갑옷처럼 특별한 옵션이 추가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존에 10% 상승이었던 정신이 30%로 더 올랐고, 영향을 미치는 기운의 상쇄도 30%에서 90%로 상승했다.
한마디로, 마기의 오염이 10분의 1로 감소한다는 것.
말이 90%지, 뇌신 강림을 썼을 때 내가 체력에 허덕이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옵션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볼 만 하겠는데?’
가면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킬:뇌정雷精>]
[패시브]
[마력에 아주 강한 뇌전의 기운이 흐릅니다.]
[뇌전의 힘은 상대에게 파고들어 조금씩 상처를 남깁니다.]
“······?”
앞선 두 개의 스킬과 다르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고작 이게 끝이라고?
정말?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업그레이드된 뇌정에서 달라진 건 딱 하나.
뇌전의 기운에서 아주 강한 뇌전의 기운으로.
딱 네 글자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뭔가 숨겨진 게 더 있나?’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후우. 일단 판단 보류.’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상태창을 닫았다.
아무래도 직접 경기에 들어가서 사용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띠링!
[예측한 우승 확률을 공개합니다.]
[무림 : 10.8%] [미드가르드 : 10.5%] [졸본 : 10.3%] [나카츠쿠니 : 9.5%]
[알프헤임 : 9.2%] [웨스테로스 : 8.9%] [바빌론 : 8.6%] [발리노르 : 8.2%]
[하이퍼보리아 : 7.7%] [티르너노그 : 7.3%] [탐리엘 : 7.2%] [지구 : 1.8%]
[지구의 경우 확률이 1.8%로, 우승 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차원 특전이 모든 스텟 +17%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우승 성계와 상관없이,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한 명의 MVP 에게는 고유 스킬 1개가 랜덤으로 주어집니다.]
메시지를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 시 모든 스텟 +17%.
한마디로, 지구에 걸린 보상은 모든 스텟 +7%.
전체적으로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딱 한 가지.
‘이번에는 우승 성계에 상관없이 MVP를 뽑네.’
보상만 보자면 차원 특전보다 MVP로 받는 스킬이 훨씬 크다.
그렇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MVP만을 노리는 플레이어들도 꽤 존재할 것 같았다.
‘나야 더 좋지.’
우승에 관심 없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질수록, 지구가 우승할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지구에 배팅한 신들이 많은 모양인데?’
지구의 우승을 찍은 관객의 숫자는 1.8%.
물론 여전히 다른 성계들보다 한참 낮은 수치지만, 0.1%였던 하위 리그 때와 비교하자면, 18배나 높아진 셈이었다.
지구엔 고작 세 명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값이 많이 오른 모양이군.’
주창범이나 룬이라는 플레이어는 상위 리그의 신입생들.
결국 나 하나만 바라보고 지구에 베팅한 신들이 제법 많다는 뜻이었다.
띠링!
[성계 대항전 경기 일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경기. 흑막의 미로(개인 PvP)]
[2경기. 공성전(단체 PvP)]
[3경기. 악마 사냥(개인 PvM)]
[4경기. 상위 리그 최강자(개인 PvP)]
[5경기. 황혼의 깃발 쟁탈전(개인 PvP)]
[잠시 후 1경기, 흑막의 미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알림창과 함께 대기실 한쪽 벽에 하얗게 빛나는 문이 생겼다.
‘후우. 시작해볼까.’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숨을 내쉰 후, 대기실을 나섰다.
띠링!
[지금부터 1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경기 :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흑막의 미로]
[맵 : 적벽의 미로(중)]
[관객 수 : 8,794,177 명]
[승리 조건 : 최후의 1인 생존자]
[붉은 결계를 넘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탈락 처리됩니다.]
[해당 경기에는 룰이 숨겨져 있습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103 명]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니, 온 사방에 넝쿨로 치렁치렁 뒤덮인 붉은 돌담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5미터 정도.
뻥 뚫린 회색빛 하늘 사이에 붉은 막 같은 게 느껴졌다.
‘데스 라인인가 본데.’
아무래도 이 정도 높이의 벽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설 수 있다 보니, 그걸 방지하기 위한 모양.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Tip. 이번 경기에서는 <지도>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들자 내 머리 위에 <72> 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지?’
하위 리그에선 어느 성계인지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숫자만 덜렁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미세한 막도 느껴졌다.
몸을 움직여 보니, 따로 내 움직임을 제약하진 않았다.
그저 내 몸을 감싸고만 있을 뿐.
‘뭔가 되게 복잡한데?’
평범한 서바이벌 전투인 줄 알았는데, 숨겨진 룰들이 제법 많은 것 같았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Tip. 시간이 지날수록 데스 라인이 좁아집니다. 틈틈이 <지도>를 잘 확인하세요.]
나는 돌담으로 다가가 손으로 툭툭 쳐 보았다.
‘여기도 결계가 처져있는 것 같은데.’
건드릴 때마다 미세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벽을 뚫고 그 너머로 이동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결계 같았다.
[경기 시작!]
파바바바바밧! 스르릉! 찰그락―
시작 콜과 동시에 벽 너머에서 무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맵을 볼 수 있다고 그랬지?
나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대신, 가장 먼저 맵부터 활성화 시켰다.
그러자 정사각형 모양의 미로 위로 어지럽게 꼬여있는 길들과, 색깔 별로 나눠져 있는 49개 구역이 보였다.
‘미로는 그냥 맵의 일환일 뿐인가 보네.’
하긴, 이번 경기는 서바이벌.
미로를 탈출할 필요가 없으니, 맵을 제공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맵의 한 구석에 초록색깔 점이 보였다.
딱 하나 뿐이니, 아마 내 현재 위치일 것이다.
‘일단 외곽으로 빠져야겠군.’
현재 내 위치는 30구역.
이런 서바이벌 미션에선 필연적으로 중심부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들이 몰린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선 미로 외곽을 돌아다니는 게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미로를 따라 43구역 방향으로 향했다.
[<666>이 <창>으로 <802>를 처치했습니다.]
[<1>이 <검>으로 <87>을 처치했습니다.]
[<703>이 <마법>으로 <54>를 처치했습니다.]
[<100>이 <검>으로 <982>를 처치······.]
‘이건 또 뭐야?’
상태창 좌측 하단에 처음 보는 알림창이 떴다.
대충 몇 번이 누구를 무엇으로 죽였다는 건데, 그걸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런 시스템을 집어넣은 거지?’
굳이 플레이어의 닉네임이 아닌, 번호로 표현할 필요가 있나?
그런 의문과 함께 43구역으로 향할 때였다.
파바밧―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발소리를 들은 나는 곧장 창을 고쳐잡았다.
미로 형태다 보니, 이곳은 쭉 뻗은 일자 형 통로밖에 없다.
적과 마주치는 순간 따로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미로 어딘가에서 터지는 굉음을 뒤로하고,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ㄱ’자형 코너를 돌며 만나게 된 적.
“······?”
“······?”
서로 죽여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상대와 나, 둘 다 눈을 치켜떴다.
‘뭐야.’
적의 모습이 얼굴, 팔, 다리 할 것 없이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붉은 노을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와 무기 뿐.
마치 추리 만화에서 등장하는 범인처럼 검은 막 같은 게 가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였군.’
잠깐 의아해하던 나는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집단전은 없음을 호언장담하던 미카엘.
성계 대신 쓰여져 있는 숫자.
그리고 눈동자 말고는 새까맣게 보이는 적.
‘아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바이벌을 펼치는 거였어.’
제공된 정보는 딱 세 개 뿐이다.
상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 숫자, 그리고 무기.
팀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제공된 최소한의 정보를 통해, 상대방이 누군지 파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에게 없는 무기가, 나에겐 하나 더 존재했으니까.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루시보덴]
[성향 : 중용]
[근력 : 185(+?)] [민첩 : 191(+?)] [체력 : 171(+?)]
[정신 : 94(+?)] [지력 : 41(+?)] [마력 : 157(+?)]
[각성 능력 : <특급검술> <특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박투술> <상급치료술>]
[업적 특전 : 발리노르의 검귀劍鬼]
바로 악마의 눈이라는 무기가.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만 하겠어.’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 벽력섬전을 집어넣으며, 오랜만에 사슬낫을 꺼내 들었다.
현재 내 근민체는 피의 강화 특전이 발동되지 않았음에도 261, 329, 203.
직전에 펼쳐진 코드 제로에서 스텟이 크게 오른 덕분에, 저 정도 상대 쯤은 스텟만으로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굳이 내가 몇 번인지 알려줄 필요가 없지.’
좌측 하단에서는 끊임없이 킬 로그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선 눈에 띄는 숫자 몇 개가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1번과 666번, 그리고 44번.
아마 녀석들이 상위 리그 최상위 랭커들일 것이다.
‘다른 녀석들도 킬 로그를 계속 체크하고 있을 게 분명해.’
숫자와 무기를 통해 누가 몇 번인지 대충 예상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무기들을 사용함으로서 혼동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오게 되면 곧바로 창을 꺼내 들겠지만.
후욱― 후욱―
나는 사슬낫을 돌리며 눈앞의 적, 루시보덴을 주시했다.
“하. 사슬낫이라······.”
그러자 웃음기 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만난 것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 또한 대충 짐작이 됐다.
‘아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최상위 랭커 중에서 사슬낫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없으니까.
녀석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냥을 시작해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검붉은 뇌전이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 162화. 절망의 편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