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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회귀자-160화 (160/205)

< 160화. 격변의 물결(8) >

‘좋지 않은데.’

나는 티 나지 않도록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왜 성계 대항전을 열고자 하는 지, 그 취지와 이유는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성계 대항전에 대한 이해득실 계산을 모두 끝낸 상황.

‘그때도 간신히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이걸 승낙할 이유가 없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미카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먼 길 와주셨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숙일 땐 확실하게 숙여야 한다.

어차피 협상은 이걸로 끝.

더 이상 무의미하게 기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최대한 좋게 거절해서 미카엘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지금은 부드럽게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라파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물론 이제는 내 인지도가 어마어마하게 오르면서 오퍼를 가지고 장난을 치진 못하겠지만, 고위 리그로 승급하는 걸 최대한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국 피해를 입게 되는 건 내가 될 테고.

‘그럼에도 시비를 건다면, 상대해 주겠지만.’

그러자 내가 판을 엎었다는 걸 눈치챈 아세리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쿠키가 입에 안 맞으신가 보네요. 제가 다른 쿠키를 준비해 드릴게요. 방금 전에 인사 나눈 4급 주천사 포르도엘이 쿠키를 굉장히 잘 굽거든요.”

이 상태로 계속되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식당 메뉴에 없는 걸 주문할 때는 음식 가격이 비싸지기 마련이죠. 그러니 없는 메뉴라고 손님을 쫓아내는 것보단, 적어도 가격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미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흠.’

순간 아세리안이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미카엘님은 언제나 정면 돌파를 하시는 분이에요. 절대 잔꾀를 부리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계속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는 점에서 무척 무서운 분이랄까요?

‘이런 뜻이었군.’

한마디로 내가 혹할 만한 조건을 준비해 왔으니, 일단 들어나 보라는 뜻.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밑지는 게 많은 장사라, 가격도 듣기 전에 제가 우는소리를 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아마 미카엘도 내가 이전에 냈던 성명서를 확인했을 것이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선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부담을 느끼고, 무엇 때문에 불참을 선언했는지에 대해 체크하는 게 필수였으니까.

‘그러면 들어볼 가치가 있지.’

나는 차분하게 앉아, 이어질 미카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손가락 세 개를 펼치는 미카엘.

그녀가 곧장 한 개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지구 성계의 우승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지구 성계에 한하여 새로운 특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지금 가지고 있는 최강의 성계 특전을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습니다.”

말을 마친 미카엘이 또 한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기존에 성계 대항전을 기획하던 라파엘 팀과 얘기가 됐던 대로, 플레이어 렌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세 개를 성계 대항전에서만 일시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습니다. 이건 플레이어 렌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며, 다른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손가락을 접었다.

“성계 대항전에서 펼쳐질 다섯 개의 경기 중, 집단전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없음을, 제 신성을 걸고 약속합니다.”

말을 마친 미카엘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

순간 무거운 침묵이 접객실을 눌렀다.

‘자신감이 넘친 이유가 있었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계 대항전을 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파격적인 조건에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일단 차분하게 정리해 보자.’

잠시 뜸을 들인 나는 미카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님을 앞두고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혹시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미카엘이 아세리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향이 무척 좋군요. 저는 티타임을 즐기지 않지만, 이렇게 좋은 차라면 충분히 시간을 내서 즐길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입에 맞으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혹여나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다고 얘기가 날까 염려스러웠답니다. 아, 참. 중간계 관리 위원회도 그대로 관리하신다고 들었어요. 요즘 무척 바쁘실 텐데······.”

‘나이스, 아세리안.’

때마침 아세리안이 화제를 전환하며 미카엘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번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굴렸다.

내가 성계 대항전을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수적 열세를 딛고 우승할 확률이 무척 낮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설사 그 확률을 뚫고 우승한다고 해도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

그런데 미카엘은 지금, 그 두 개를 모두 없애주겠다고 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 세 개, 그리고 집단전 없음.

이 두 가지 조건이 지구의 우승 확률을 대폭 늘려주었다.

지금도 최상위 랭커 중 한 명인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 세 개가 추가된다?

‘상위 리그에서 내 창을 받아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아예 내 기량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누구도 쉽게 날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된다면 성계 단위로 부딪히는 경우가 없다는 가정하에, 내가 꿀릴 이유가 없었다.

‘최강의 성계 특전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도 마찬가지지.’

하위 리그처럼 도박사들이 예측한 비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거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확률도 제법 되니까 충분히 시도해볼 만 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여유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쉽지 않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차를 음미 중인 미카엘.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노회한 정치인 같군.’

미카엘은 내가 받아들일 것임을 확신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성계 대항전의 향방이 걸린 자리에서 저렇게 여유로울 리 없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조건이 한 개만 더 추가된다면 당장이라도 계산서에 올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내 말에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파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조건만 해도 과한데, 내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를 홀짝였다.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에 용기를 얻은 내가 입을 열었다.

“만약 지구가 우승하고, 제가 MVP를 따내면 승급샷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접객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거칠어진 파사엘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반면에 입가의 미소가 더 진해진 미카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쯧. 무리였나.’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탁―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카엘이 차를 모두 비운 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세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팀을 창립한 지 얼마나 되셨죠?”

“이제 2년 조금 넘었습니다.”

“2년이라······. 팀 투지는 고작 2년 만에 고위 플레이어를 품게 되겠군요.”

“······!”

미카엘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상 승낙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대답이었으니까.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해주고, 콜로세움을 운영하는 많은 분들이 저희 팀을 예쁘게 봐주신 덕분이죠.”

미카엘의 말에 아세리안이 겸양을 떨며 말했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수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미카엘이 많이 양보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세 개만 해도, 남들이 들으면 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미카엘이 기분 상해 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덕분에 이 협상이 성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야말로. 메뉴에 없는 걸 계산서에 올려줘서 고맙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미카엘.

나는 그녀의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차갑고, 딱딱하다.

무인武人의 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성계 대항전에 대한 출전이 확정되었다.

―빅 뉴스!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이 다시 열린다!

―공식 오피셜 등장! 열두 성계가 모두 참가하는 성계 대항전!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 “성계 대항전을 시작으로 상위 리그 정상화”

―2주 후에 열리는 상위 성계 대항전. 모두들 축제를 즐길 준비 되었는가?

└상위 리그 재오픈까지 시간 좀 걸릴 거라고 했는데 ㄷㄷ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열리는 거 아님? 운영이 될려나?

└와ㅋㅋㅋㅋ 추진력 미쳤네 ㅋㅋㅋㅋㅋㅋ

└오오 쿠 훌린 vs 렌 다시 기대해도 되는 거야? 응? 응?

└공식 오피셜 떴음. 렌 참가 확정! 이번에야말로 진짜 성계 대항전 열듯 ㅋㅋㅋ

└안 그래도 수준 떨어지는 하위 리그만 보느라 지루했는데 개이득!

└이번에도 같잖은 이유로 물거품 되면 진짜 불 지르러 간다 ㅡㅡ

공식 오피셜이 등장하자마자 커뮤니티가 들끓었다.

상위 리그부터 초월 리그까지 운영이 멈춘 상태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하위 리그를 보던 신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또다시 플레이어 분석부터 시작해서 어느 성계가 우승할 것인지에 관한 게시글들로 도배되었다.

“형. 이번에는 저도 같이 참가하네요, 헤헤.”

오피셜을 보고 집무실로 찾아온 주창범이 활짝 웃었다.

하위 리그 때는 상위 천 명 안에 들지 못해서 참가하지 못했었던 주창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경기를 뛰겠군요.”

“맞아요. 여왕개미 잡을 때죠?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래서 그런가 성계 대항전이 너무 기대돼요.”

주창범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네.’

회귀한 이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우. 감상에 빠질 필요 없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성계 대항전은 2주 뒤에 열린다.

이번에도 내 목표는 우승.

‘반드시 해내야 해.’

특전 뿐만 아니라 고위 리그 승급까지 걸려 있다 보니,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참. 이거 받으세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서적 한 권을 꺼내 주창범에게 건넸다.

“이건······?”

이전에 마교의 서고에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 극한심결이었다.

“주창범씨한테 주려고 구해둔 스킬인데, 주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성계 대항전에서도 잘해봅시다.”

사실은 내가 사용하려고 했던 스킬이었다.

플래티넘 등급이 애 이름도 아니고, 누군가한테 줄 만큼 내가 널널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주창범에게 준 이유는 하나였다.

‘미카엘에게 받은 어드밴티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1티어 등급 스킬을 익혀야 해.’

세 개의 스킬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내게 존재하는 1티어 등급의 스킬은 단 두 개.

마침 얼마 전에 몽환의 달빛을 얻으며 스킬 슬롯을 추가로 얻었으니, 거기에는 정신 계통의 스킬을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가면 때문에 더 이상 이성을 잃을 순 없었으니까.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라면 구하기 어려울 테지만, 1티어 등급 정도라면 잘 맞는 스킬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랑 궁합이 안 맞는 스킬이기도 하고.’

내가 사용하는 것보다, 얼음 속성 위주로 가지고 있는 주창범에게 더 잘 맞을 거다.

“헉. 형, 이거 스킬 옵션이 왜 이래요?”

스킬의 정보를 확인한 주창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겠지.’

그림자 표식을 처음 받을 때 내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지금 갖고 있는 1티어 스킬들보다 더 고위 스킬이거든요.”

내 말에 주창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중개 거래소에선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하위 리그나 상위 리그 수준에선 보기 어려운 스킬입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5천만 골드 정도 할 테니까요.”

“헉! 형, 그렇게 비싼 스킬을······ 제게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숨을 들이켜는 주창범.

말끝이 떨리는 게,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누구보다, 주창범씨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상위 리그에서 만족하실 건 아니겠죠.”

“아······ 물론이죠. 전 어떻게든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고 말 거예요.”

굳게 다짐하듯 말하는 주창범.

나는 녀석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같이 갑시다. 고위 리그까지.”

건물을 높게 쌓기 위해선 기둥이 튼튼해야 한다.

지금 내가 투자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

‘어떻게든 초월 리그로 올라가고 말겠어.’

단단한 기둥이 되어 나를 받쳐줄 것이다.

“네, 형. 악착같이 올라갈게요.”

주창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 160화. 격변의 물결(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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