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격변의 물결(7) >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님께 연락이 왔어요.”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오퍼라도 들어온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퍼가 아니고선 게임 메이커에게 연락이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재 상위 리그는 엄청난 피해로 인해 잠정 중단된 상황.
나는 혹시나 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오퍼입니까?”
그러자 내 예상대로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뇨. 오퍼는 아니고, 일정을 조율해 가까운 시일 내에 직접 팜에 방문하시겠다는 연락이었어요. 안우진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
날 만나기 위해······ 팜에 방문을 한다고?
‘게임 메이커가 직접?’
도대체 왜?
“방문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까?”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물어봤죠.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굉장히 당혹스러웠거든요. 주변의 시선 때문에라도, 게임 메이커가 특정 팜에 직접 방문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방문 이유에 대해선 만나서 얘기해주겠다는 말 뿐이었어요.”
“흠.”
나는 의자에 기대앉아서 팔짱을 꼈다.
‘뭔가 찝찝한데.’
사실, 내 입장에선 새로운 게임 메이커와의 만남이 달가울 수가 없었다.
전임자였던 라파엘과 큰 트러블이 있었으니까.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날 안 좋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다른 팜들도 방문했습니까? 새로 취임했으니까 인사차 돌아다니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포르도엘에게 확인해 보니 그런 소식은 없었어요. 걔 인맥이 엄청 넓어서, 그 아이가 확인하면 웬만한 천계 소식을 다 들을 수 있거든요.”
“아하.”
잠시 포르도엘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교와 장난기가 많은 포르도엘의 성격상, 친구가 많을 것 같긴 했다.
다만 아세리안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내 생각보다 그녀의 발이 엄청 넓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천계의 소식 좀 모아달라고 부탁해야겠군.’
그나저나.
‘도대체 왜 온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주변의 눈초리까지 감수해가며 방문하려고 하는 거고.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나 역시 게임 메이커에게 원하는 게 있었다.
언제까지 상위 리그가 중단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고위 리그에 올라가 정신의 리미트를 해제해야 하는 상황.
조건만 잘 맞으면 빠르게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나도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으는 것.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을 거라고 했다.
미리 준비해두면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아도, 카운터를 꽂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오오, 게이트가 열린다!”
“우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공터에 모인 5천 명의 팀원들이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게이트 안에서 세 명의 플레이어가 환하게 웃으며 나오고 있었다.
“상위 리그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올라왔군.’
오늘은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의 승급전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공터에 열린 게이트에서 방금 막 세 명의 플레이어가 빠져나왔다.
세 명 모두 승급에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다섯 명 째.’
나는 고개를 돌려, 공터에 모인 팀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와, 결국 2기수 선배님들 사이에서도 상위 플레이어가 나오다니!”
“심지어 주창범님이나 지그님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처럼 평범한 플레이어였다지?”
“지금처럼만 하면 우리도 언젠가 올라갈 수 있어!”
모두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분위기가 형성됐어.’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팀 투지에서 상위 플레이는 단 두 명.
나랑 카이로시아 뿐이었다.
‘그때는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바라봤지.’
한 명은 혼자서 성계 대항전을 우승시킨 괴물이고, 또 한 명은 애초부터 기초 스텟이 세 자리를 넘는 초대형 네임드.
그러다 보니 상위 리그에 대한 인식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만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부턴 다를 거야.’
하지만 주창범과 지그가 승급을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카이로시아나 모용악과는 달리, 주창범과 지그는 아주 평범한 기초 스텟으로 시작한 플레이어들이다.
팀원들도 그걸 알고 있고.
‘노력하면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어.’
선례는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길을 걷는 것과,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걷는 건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 사소한 인식의 전환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다들 더 열심히 훈련하겠군.’
이젠 오르지 못할 나무가 낮아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여신님. 포르도엘님. 피넛엘님.”
모두에게 축하를 받으며 다가온 세 사람이 아세리안과 두 천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무척 멋있었답니다.”
아세리안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코흘리개들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멋진 플레이어들이 됐네요. 세 분 모두 고생 많았어요!”
포르도엘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수고했다. 경기를 직접 보니, 더 이상 흠잡을 곳이 없더구나.”
피넛엘이 옅은 미소를 피우며 말했다.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은 세 사람이, 이번엔 나한테 다가왔다.
“다녀왔어요, 형!”
“드디어 안우진님이 계신 곳까지 따라왔군요. 금세 또 멀어지겠지만 말입니다.”
“쉽지 않은 경기였는데, 안우진님 얼굴에 먹칠하기 싫어서 이 악물고 뛰고 왔습니다.”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애가 ‘어서 칭찬해 줘!’ 라며 눈을 빛내고 있는 것 같았다.
‘훗.’
세 사람에게 해줄 말이 무척 많았다.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거다.
하위 리그와는 달리 상위 리그엔 괴물들이 우글우글거린다.
마의 구간에 도달하면 더 이상 스텟도 오르지 않는다, 등등.
“고생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가슴속에 담아둔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얘기들은 이후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저들에게 해줄 말은 딱 하나 뿐이었다.
“환영합니다. 초인들의 세계에 온 걸.”
이곳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저들에게 굳이 힘들다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칭찬에 자기들도 모르게 울컥한 것 같았다.
아마 처음 팜에 들어왔을 때부터, 힘든 훈련을 견디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들이 스쳐 지나갔겠지.
1회차의 내가 그랬으니까.
“자, 이제 모두 파티 준비합시다!”
아세리안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외쳤다.
“넵!”
플레이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공터에다가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위 리그에서의 건승을 위하여!”
또 한 번의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후우.”
공터에 나와 있던 포르도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긴장이 되는지 평소와 달리 안색이 굳어 있었다.
항상 웃는 낯이다 보니, 그 모습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피넛엘.
카리스마 가득한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랄까, 스타를 기다리는 소녀 팬 같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아세리안이 가장 낫군.’
그 둘 사이에서 경건한 얼굴로 서 있는 아세리안.
우리는 현재,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우우우우우우웅―
잔잔한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우리가 서 있는 공터에 열두 개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왔군.’
철그락― 찰그락―
각 게이트에서 일곱 명의 천사들이 빠져나왔다.
무장을 한 그녀들의 갑옷 이음쇠가 부딪치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쌍의 날개부터, 여덟 쌍의 날개까지.
“······?”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아홉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는데,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세리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맞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급 지천사 파사엘입니다.”
“상급신 아세리안이에요.”
“4급 주천사 포르도엘입니다.”
“6급 능천사 피넛엘입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들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곧 도착하실 거니, 예를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지천사 파사엘이, 함께 온 천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황혼에 잠겨, 붉은 피 머리 위로 싸늘한 밤이 내려앉노라】
눈을 감은 채 읊조리는 여든네 명의 천사들.
【울부짖는 악귀들의 비명이 세상을 가득 채우니】
둥그렇게 선 천사들의 중심부에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한 줄기 새벽 소성이 흘러 내려와 】
순간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천사들의 목소리에 맞춰, 공기 중의 마력이 격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가득 채운 비명을 예리한 검으로 가르고】
그와 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따스한 웃음이 부드러이 노래하니】
“······!”
천사들의 영창이 조금씩 커져가고, 그에 맞춰 마법진의 빛이 사방을 잠식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리고.
【수호자의 빛이 세상을 밝게 비추노라】
우우우우우우우웅!
한 줄기 파동이 퍼져나갔다.
생성된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 발을 뻗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아세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섯 대천사 중 가장 고귀한 존재이자.
열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수호자. 그리고.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강해.’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내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가장 날카로운 천계의 검이라고 불려요.
도도한 신성력이 팜을 가득 메웠다.
―대천사 미카엘. 이번에 새로 상위 게임 메이커에 부임하신 분의 존함이에요.
위로 땋아 올린 금빛 머리칼.
순백의 갑옷과, 그 뒤로 펼쳐진 열 쌍의 날개.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강인한 눈매.
‘이 천사가······.’
모든 천사들의 정점.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팜에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카엘님.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입니다.”
“상급신 아세리안을 보좌하는 4급 주천사 포르도엘입니다.”
“6급 능천사 피넛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가 치마 춤을 잡은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미카엘입니다. 환영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화답하듯, 예를 갖춰 인사한 미카엘.
고개를 든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침착하자.’
마치 발가벗겨진 상태로, 맹수의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군요. 플레이어 렌이.”
그때, 미카엘의 입에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존댓말?’
예상외의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존댓말을 한다고 해서, 저자세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날 존중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질 뿐.
“렌입니다.”
나는 미카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간략한 소개에 순간 여든네 쌍의 눈빛이 찌릿! 하며 내게 꽂혀 들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협상의 시작은 기세 싸움이지.’
미카엘도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방문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내게 수 싸움을 벌였다.
다른 천사들처럼 그냥 게이트로 넘어오면 될 걸, 요란하게 영창까지 해가며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기를 죽이고 시작하려는 의도였겠지.’
굳이 저자세를 취해, 상대에게 끌려갈 필요가 없었다.
난 아세리안의 소유니까, 미카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한동안 날 빤히 바라보던 미카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묘한 가면을 쓰고 계시는군요.”
“······가면의 디자인이 제법 멋있긴 하죠. 칭찬 감사합니다.”
내 말에 미카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손님이 오셨는데 제가 계속 세워두고 있었네요. 존귀하신 분께서 방문해 주신다고 하기에, 차와 다과를 준비해 놨습니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공터 한쪽에 지어진 고급스러운 건물을 공손히 가리켰다.
미카엘이 온다고 하기에 이번에 새롭게 지은 접객실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향하게 된 접객실.
내부로 들어온 존재는 딱 네 명 뿐이었다.
아세리안과 나, 미카엘, 그리고 처음에 인사를 나눴던 파사엘이라는 2급 지천사.
아세리안과 내가 앉고, 맞은편에 미카엘과 파사엘이 앉았다.
“무림, 안휘 성에서 구할 수 있는 순향차巡香茶라고 해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요.”
“향기가 굉장히 좋군요.”
접객실에 준비된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미카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돌아가실 때 챙겨 드릴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동안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때였다.
“바쁘실 테니, 이만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플레이어 렌?”
미카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미카엘님.”
“저희는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다시 준비 중에 있습니다.”
미카엘의 말에 순간 흠칫했다.
‘뭐라고?’
성계 대항전?
상위 리그도 열지 못하는 상황인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성계 대항전이라······. 하긴, 초대형 이벤트를 시작으로 다시 상위 리그를 오픈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분위기 반전도 될 테고.’
막상 생각해보니, 미카엘의 입장에선 지금 상황을 타개할 만한 도구로 성계 대항전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젠장.’
물론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 159화. 격변의 물결(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