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격변의 물결(3) >
“가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아세리안에게 가면에 대해서 다 털어놨다.
“팀 투지에 들어온 첫날 밤, 중개 거래소에서 이 가면을 구입했습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이 가면을 구하게 되었고.
“빛의 이면전, 중개 거래소, 에덴, 록탄 성에서 조각을 얻을 수 있었죠.”
일반 등급이었던 가면을 어떻게 신화 등급까지 올렸으며.
“피의 회복, 피의 흡수, 피의 강화, 악마의 눈, 피의 각성. 이렇게 다섯 가지 능력이 존재합니다.”
가면에 무슨 옵션이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화 등급으로 상승한 뒤로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게다가 이성을 잃고 두 차례나 폭주했습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꼼꼼히.
아세리안은 옵션을 들을 땐 놀라워했다가, 부작용 부분을 들을 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후우. 과연 마계 칠 군주가 쓰던 가면이라고 할 만 하네요. 옵션이 다섯 개나 달려 있는데, 하나하나가 웬만한 전설 등급 아이템 못지않군요.”
설명을 끝까지 들은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제발.’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렸다.
부디, 해결 방법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한동안 고민하던 아세리안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저기······.”
“예.”
“그 정도의 아이템을 두고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그 가면을 더 이상 안 쓰실 순 없는 거죠?”
‘젠장.’
그녀의 말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감이 산산조각났다.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가면의 성능을 얘기했던 건, 이만큼 좋은 아이템이니까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뜻에서였다.
그걸 아세리안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면을 사용하지 마라’는 것.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아무래도 그녀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중개 거래소에서 정신 계열과 관련된 스킬을 찾아보는 수밖에.
“물론 쉽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그 가면을 계속 사용하다간 안우진님이 타락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세리안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타락이요?”
플레이어들도 타락을 할 수가 있나?
‘그런 얘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안우진님은 지금 마기에 오염되신 상태예요. 무려 마계 칠 군주가 사용하던 아이템이잖아요. 거기다 신화 등급이고. 이대로 계속되면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플레이어도 타락합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그럼요. 전에 발리노르 성계의 에덴이었나? 거기서 라키아라는 흑기사를 다시 만나셨죠?”
라키아는 내가 빛의 이면에서 만났던 흑기사의 이름이다.
게빈의 모습을 하고 나를 끝까지 괴롭혔던.
“예. 악마가 되어 있더군요.”
“마기에 오염된 사람들이 죽으면 보통 마계로 가요. 물론 콜로세움에 있는 플레이어들이라고 해서 마계에 가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천사들도 오염돼서 타락하는 마당에.”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너무 고정 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천사들도 타락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아무래도 이곳이 사후 세계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한 번 들어오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플레이어가 타락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곧장 무스펠하임 어딘가로 쫓겨날 거예요. 천계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신성력은 타락한 자를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곧장 추격대가 편성되겠죠.”
그녀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 말은 즉, 만약 타락했다면 내가 죽였던 타락 천사들처럼, 나도 플레이어들을 피해 마계로 도망쳐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큰일 날 뻔했어.’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아세리안이 마기에 오염됐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가면을 사용했겠지.’
그랬다면 나는 초월 리그에 가보지도 못한 채, 추격대에게 쫓겨 죽을 뻔한 것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아세리안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플레이어들도 타락이 가능하다는 것.
그나저나.
“제가 마기에 오염됐다고요?”
“네. 심한 건 아니고, 10프로 정도요.”
“그게 보이십니까?”
“네. 코드 제로 경기를 전후로 안우진님의 피부 색깔이 약간 까맣게 변했거든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로브 아래로 드러난 맨피부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피부 색깔이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픽- 하고 웃었다.
“저는 권능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악마의 눈 덕분에 거짓말을 하면 빨간빛이 흘러나온다고 하셨죠? 제가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돼요.”
한마디로 권능을 가지고 있어야만 볼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오염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천사들은 왜 타락하는 거지?’
그런 증세가 있는 천사들을 미리 걸러내면 긴급 미션이 발동될 이유가 없지 않나?
‘골치 아프네.’
뭔가 아세리안과 얘기를 나눌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까놓고 물어봐야겠군.’
이번 기회에 마기의 오염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근데 오염되는 게 보이면 천사들 타락도 막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볼 수 있는 존재가 거의 없어요. 저는 아버지께 치유에 관한 권능을 부여받아서 볼 수 있는 거구요. 아버지와 저를 제외하고 천계에서 그걸 볼 수 있는 분은 아마 미카엘님 밖에 안 계실 거예요.”
“······왜 팀을 운영하십니까?”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세리안을 타락 천사 거르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거지?’
천계 전체에서 마기를 볼 수 있는 존재가 단 세 명 뿐이다.
그중에 한 명은 초월자고, 다른 한 명은 이젠 네 명밖에 남지 않은 대천사.
고위 존재들인 그 둘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세리안이 남는다.
그렇다면 아세리안이 돌아다니며 마기에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기만 해도, 천계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왜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지 않냐는 거죠?”
“예.”
아세리안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백금발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천사 시절에만 해도 제가 담당하던 업무는 마기로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는 일이었거든요.”
“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제게 하급신으로의 승급과, 팀 창단을 권유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당시 제 직속상관이었던 라파엘님도 어리둥절해하셨죠.”
“반발하는 신들은 없었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버지는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이에요. 그분의 결정엔 항상 무언가 이유가 있죠. 그래서 신이나 천사들은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요.”
그녀에게서 초월자에 대한 뿌리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흠.’
그녀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세리안을 풀어줬을까?
누가 봐도 그녀가 타락 천사를 거르는 게 천계에 유리한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세리안이 활짝 웃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프리로 놔주신 덕분에, 저는 이렇게 안우진님과 만날 수 있었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그 아버지란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군요.”
덕분에 그녀를 만났으니까.
앞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타락할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
아세리안과 만나지 않았다면,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오염됐다는 마기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방긋 웃었다.
“에헴! 제가 이래 봬도 치유와 새로운 시작을 관장하던 천사였거든요? 안우진님께 오염된 마기쯤이야 얼마든지 제가 없애 드릴 수 있어요.”
어깨를 으쓱하는 아세리안.
‘다행이야.’
단언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럼 가면에 있는 마기도 정화시키실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애초에 마기 덕분에 그런 옵션이 유지되는 걸 텐데, 정화하면 옵션이 모두 다 사라지지 않을까요?”
“음. 그렇군요.”
‘이건 뭐, 가면을 쓰지 말라는 거나 다름이 없군.’
아무래도 블라디미르 가면을 팔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리스크를 짊어진 채, 계속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지막에 얻은 조각만 아니었으면.’
계속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이어지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떤?”
“피의 각성을 쓰면 정신 스텟이 깎인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럼 정신과 관련해서 가면이 무언가 영향을 끼친다는 거예요. 그니까 정신 스텟을 계속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부작용 없이 사용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정신 스텟을 계속 올리다 보면이라······.’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정신력이 강해지면 이성을 잃을 확률도 낮아질 거고.
다만.
‘문제가 있지.’
“정신 스텟은 99포인트 이상 안 오르던데요?”
정신 스텟이 99포인트를 찍은 뒤로는 오르지 않는다는 것.
포인트 상점에 들어갔더니, 정신 스텟을 구입할 수 있는 버튼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정신 영역이 차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래요. 고위 리그로 올라가시면 정신 스텟의 리미트가 풀릴 거예요.”
‘고위 리그라······.’
한마디로 고위 리그에 올라갈 때까진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뜻이었다.
‘결국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은 없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가면을 벗어야 하나.
“음, 혹시 이 방법은 어때요?”
“어떤······?”
“지금까지 부작용은 피의 각성이 발동될 때만 있으셨던 거죠?”
“예.”
“3분 동안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포인트가 초기화되구요.”
“맞습니다.”
“그럼 피의 각성이 발동되지 않도록 100포인트가 되기 전에 계속해서 초기화시키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턱을 문질렀다.
‘흠.’
말이야 쉽지, 전장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한 게 유일한 방법이란 것도 분명한 사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정신 스텟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유하고 있는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 정신 스텟을 99포인트까지 상승시켰다.
‘일단은 고위 리그로 올라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는 수밖에.’
정신력에 걸린 리미트가 해제되면 가면의 부작용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팀 투지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당소소, 앤드류, 에드워드, 새뮤얼, 추이봉. 잘 다녀오거라. 건투를 빌겠다.”
“다녀오겠습니다, 피넛엘님.”
“멋진 활약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코드 제로 이후 정지되어있던 하위 리그가 정상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이 경기장을 들락거렸다.
‘상위 리그가 개박살 난 것 때문이겠지.’
코드 제로에서 너무나 많은 상위 플레이어들이 죽은 상황.
그 탓에 상위 리그는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기가 기약 없이 밀리고 있었다.
현재로선 상위 리그를 살릴 수 있는 해결 방법은 딱 하나였다.
‘제법 많은 숫자의 하위 플레이어들이 승급하겠군.’
하위 리그의 플레이어들로 상위 리그를 채우는 것.
‘타이밍이 너무 좋은데?’
죽은 상위 플레이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승급할 플레이어들의 숫자도 무척 많을 것이다.
당장 우리 팀만 해도 주창범과 4인방, 모용악, 고건하까지 6명이나 됐으니까.
아니.
‘잘하면 그 밑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승급할 수 있어.’
진입 장벽이 얼마나 낮춰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3기수에서 승급하는 플레이어들도 제법 나올 수도 있었다.
당소소나, 수호같이 새로 들어온 준네임드 급 이상 플레이어들도 가능성 있고.
“바로 다음 차례 준비한다! 수호, 프랑수아, 피에르, 사쿠라, 홍진위!”
“준비 됐다······습니다.”
“저도 준비 완료했습니다.”
팀 투지는 하위 리그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팀.
그로 인해 오퍼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좋아.’
덕분에 아세리안과 피넛엘, 포르도엘은 요즘 오퍼 정리하랴, 팀원들 관리하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들 깜짝 놀랄걸?’
직접 출전하는 경기가 아닌데도, 무척 기대됐다.
드디어 스킬북을 뿌린 결실을 맺게 될 테니까.
‘무려 10억 골드.’
장담하건대, 하위 리그가 격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 *
“후우. 겨우 도착했군요.”
거대한 대문 앞에 도착한 열 명의 플레이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 조건 : 천마신교를 재건하려는 마교의 소교주를 처치하라.]
[게임명 : 삭초제근削草除根]
[남은 소교주 수 : 2 명]
[Tip!]
[맵이 제공되지 않으니, 정파 무림인들과 협력해서 소교주를 추살하세요.]
“정말 불친절한 성계네요. 말만 걸려고 해도 칼부터 꺼내 드니.”
한 플레이어가 투덜거렸다.
이런 초대형 성계를 수색하려면, 각 성계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필수.
하지만 지금껏 마주친 무림인들은 말을 걸어도 일단 경계부터 하기 일쑤였다.
“팀 운도 완전 꽝이에요. 어떻게 우리 중에 무림인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죠?”
“무림인이 한 명만 있었더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러자 파티장이 나서서 파티원들을 진정시켰다.
“일단 침착하시죠. 그래도 결국 정파 무림인들의 본거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도 문제예요. 문 두드리면 일단 칼부터 뽑아 들겠죠.”
“제게 방법이 있으니, 일단 진정하세요.”
“앗, 파티장님. 방법이 있으세요?”
“예. 저희 팀에 대단한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파티장이 활을 고쳐 멘 채 무림맹의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무림인이 검 자루를 쥐고선 파티장을 경계했다.
“저는 무림맹 수문 무사 곽준입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수문 무사의 물음에 파티장이 어색하게나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청룡문에서 온 고건하라고 합니다.”
―모두들 잘 들으세요. 만약 무림 성계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면 청룡문에서 나왔다고 소개하세요. 그럼 경계를 풀 겁니다.
고건하는 안우진이 말한 대로, 청룡문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 155화. 격변의 물결(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