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격변의 물결(2) >
“좋은 아침.”
“괜찮으세요?”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나서자마자 마주친 카이로시아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냐고?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가 날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나쁘지 않아. 넌?”
“저야 뭐, 푹 쉬었으니까요. 배고프실 텐데 어서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
얼른 식당으로 가라며 등을 미는 카이로시아.
‘언제부터 내 식사를 챙겼다고?’
고개를 갸웃한 나는 카이로시아를 뒤로하고, 숙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건물 입구로 향했다.
“안우진님!”
“아, 이세연님.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 안 하시려구요?”
“예. 아세리안님 먼저 만나 뵙고 먹겠습니다.”
“아······. 그래도 식사부터 하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뭐지?’
오늘따라 다들 이상한데?
카이로시아라면 모를까, 이세연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뭘 하든 그녀가 내게 맞춰줬달까.
그래서 식사부터 하고 가라는 이세연의 권유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3일 만에 깨어나신 거잖아요.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뭐라고?’
“······3일 만에요?”
나는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그러자 오른쪽 하단에 하이블러드나이트 136 ― 4 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콜로세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에겐 달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번째 리그가 열리는지를 기준으로 현재 날짜를 가늠했는데, 하이블러드나이트 136이라면 원래 성계 대항전이 열리기로 했던 날이고, 4라는 글씨는 4일 남았다는 뜻이다.
코드 제로 미션이 하이블러드나이트 136 ― 7이었으니, 한마디로 내가 잠든 지 3일이 지났다는 것.
‘어쩐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상쾌하더라니.’
잠들기 직전 느꼈던 피로감에 비해 몸이 가볍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설마 3일을 내리 잠들었을 줄이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좀 급한 일이라서요. 다녀와서 먹을 테니, 제가 평소 먹던 자리 위에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세연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다시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블라디미르 가면 없이 초월 리그까지 갈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지막에 봤던 초월 리그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현재의 나를 이루는 근간이 블라디미르 가면이었으니까.
스킬, 스타일, 아이템 등등 모든 게 가면을 중심으로 세팅되어 있다.
‘가면을 안 쓰면 사용할 수 없는 스킬들도 존재하지.’
당장 뇌룡의 포효 2차 각성 스킬인 뇌신 강림만 해도 가면이 없으면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체력 소모 10배.
그걸 감당하기 위해선 체력 회복은 필수 조건이었다.
‘가면을 써도 체력이 간당간당한 데.’
1킬당 체력 1퍼센트 회복이라는, 극강의 효율을 자랑하는데도 체력에 허덕일 정도.
다른 스킬 혹은 아이템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의 강화로 인한 스텟 상승도 무시할 수 없지.’
무려 30프로다.
현재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스텟으로 계산했을 때, 피의 강화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스텟의 총합이 무려 251 포인트나 깎여나갔다.
‘피의 흡수를 통해 장기적으로 상승할 스텟도 사라질 테고.’
이번 코드 제로 미션에서 내가 얻은 기초 스텟은 지력을 제외하고, 137포인트.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스텟 상승률이었다.
‘앞으론 악마의 눈으로 스텟을 체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거기다 능력만 봤을 땐, 피의 각성도 빼놓을 수 없다.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랜덤으로 강화시켜 줬으니까.
‘결국 어떻게든 계속 가져가야 해.’
가면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뭐, 내가 가진 유일한 신화 등급 아이템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지도.
‘후우. 아세리안에게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이대로 가면을 계속 사용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거다.
‘정신이 너무 많이 깎였어.’
오늘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고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다.
99스텟이었던 정신이 78포인트까지 하락해 있었던 것이다.
‘골치 아프군.’
거기다 이성을 잃고 날뛴 게 벌써 두 번째다.
록탄 성에서 한번, 그리고 니플헤임의 입구에서 한번.
록탄 성에서야 괜찮았지만, 니플헤임 입구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가슴이 서늘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뻔했을 정도로.
‘뾰족한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만약 아세리안에게 방법이 없다면, 가면을 판매하는 수밖에.
아무리 가면의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똑똑―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아세리안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두드렸다.
“아세리안님, 안우진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을 깍지 낀 채 앉아 있는 아세리안과.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어?’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이 보였다.
* * *
―콜로세움. 이대로 몰락하나? 중추가 되어야 할 상위 플레이어들의 부재.
―경기 한 번에 고위 리그의 20%, 상위 리그의 60%가 사라졌다.
―초월 리그 사망자 0명. 관객들, “자신들의 희생을 피하고자 상위 리그와 고위 리그에 희생을 강요한 것 아닌가.” 초월 리그에 눈총.
―전문가들, “상위 리그 붕괴는 현실화. 당분간 리그 진행은 어려울 것.” 입 모아.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를 확인한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그녀 너머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서디엘, 파사엘.”
“예, 미카엘님.”
미카엘의 부름에, 집무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와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다가왔다.
“오늘부터 내가 상위 리그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럼 중간계 관리 위원회는 다른 치천사님이 맡으시는 겁니까?”
2급 지천사 파사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둘 다 맡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과중한 업무량에 몸이 상하실까 저어됩니다만.”
“날 보좌해줄 그대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앞으로도 날 도와주겠지?”
“물론입니다.”
“네!”
미카엘의 물음에 파사엘과 카서디엘이 고개를 숙였다.
짝!
그 모습에 미카엘이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앞으로 카서디엘이 상위 리그 업무를, 파사엘은 지금처럼 중간계 관리를 맡는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각오하도록.”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전에 체크해야 할 게 있었는데, 카서디엘이 없으니까 제가 좀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파사엘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나자, 미카엘이 카서디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상위 리그는 개박살 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그대가 앞으로 고생 좀 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대신 실무를 처리해 줄 천사들을 더 보충해 주시겠죠?”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아버지께서 300명 가량의 천사들을 추가로 보내주기로 하셨다.”
“그럼 괜찮겠네요.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뭐부터 할까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서디엘.
그녀가 메모할 수첩과 필기구를 꺼내며 물었다.
“목표는 상위 리그 정상화다.”
“그럼 당장 다음 주에 열릴 하이블러드나이트 137부터 정상화하실 계획이십니까?”
카서디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겠지. 리그 소속 플레이어 리스트도 업데이트해야 하고, 경기가 치러질 아레나도 만들어야 하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전 게임 메이커인 라파엘이 진행하던 이벤트부터 시작한다.”
“라파엘님이 진행하던 이벤트······?”
수첩에 미카엘의 말을 받아 적던 카서디엘이 말끝을 흐렸다.
타락한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진행하던 이벤트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카서디엘이 혹시나 하고 되물었지만, 미카엘이 확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씀 중 죄송하지만, 재고해보심이 어떨까요?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열기엔 지금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카서디엘이 강하게 반대했다.
‘쉽진 않겠지.’
미카엘도 카서디엘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다.
오대천사 중 한 명이 타락했고, 결국 척살당했다.
거기다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피를 흘렸고, 그동안 미카엘도 돌아다니며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신들이 천계에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할 정도.
하지만 미카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열어야 한다. 천계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이슈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느냐.”
“······.”
“다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엔 축제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미카엘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아세리안의 집무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아세리안이 내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가면 때문에 오신 거죠?”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몸이 흠칫했다.
‘알고 있었군.’
경기 중에 내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가면 때문이라고 하기엔 유추할 만한 정보가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아세리안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이 가면에 대해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
“이 가면이 뭔지······ 알고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안우진님을 만나고 바로 다음 날이었나? 그때부터 가면을 쓰셨죠?”
“맞습니다.”
“사실 그때도 가면에서 섬뜩한 마기가 조금씩 느껴지길래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랬군.’
―멋진 가면이네요. 새로 장만하신 건가요?
어쩐지 가면을 쓰기 시작한 첫날, 아세리안이 빤히 바라본다 싶더라니.
하지만 그 뒤로 별 얘기 없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세리안이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준 모양이었다.
“후우. 맞습니다. 이 가면 때문인 게.”
“무슨 가면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괜찮을까?’
고위 악마가 쓰던 아이템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한테 솔직하게 얘기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마교의 서고에서, 마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무공 서적들이 스킬북으로 판정받지 못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악마화 때문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고.
‘마교 교주인 천세운이 스스로 악마화가 진행됐다고 그랬으니까.’
거기다 중개 거래소를 아무리 뒤져봐도, 악마가 쓰던 아이템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천계에서 그 부분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뜻.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얘기하는 수밖에 없겠군.’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입을 열었다.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가 사용하던 가면이라고 하더군요.”
“······!”
내 말에 아세리안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게, 엄청나게 놀란 모양.
“그, 그게······ 블라디미르 가면이었나요?”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괜히 얘기했나?’
예상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여신인 그녀가 저렇게 놀랄 정도면, 확실히 평범한 가면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
“세상에······.”
“유명한 악마입니까?”
내 말에 아세리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쟁 때 죽은 마계 칠 군주 중 한 명이에요. 그랬군요······ 블라디미르가 사용하던 가면이라······.”
“마계 칠 군주면 천계로 쳤을 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까?”
“음······. 열두 주신님들과 비슷한 위치일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쓰던 가면이라고?’
아세리안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고위 악마라는 말에서 대충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가 쓰던 가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유명한 존재가 쓰던 가면인데 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겁니까?”
지금껏 이 가면을 알아본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당장 경기만 들어가도, 엄청난 숫자의 신들과 천사들이 관람한다.
바로 이전 경기인 코드 제로만 해도 관객 숫자가 800만에 달했었고.
그렇게 많은 신들이 관람하는데도, 커뮤니티엔 가면을 언급한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가면 자체에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아요. 저도 외관만 봤을 때는 블라디미르가 쓰던 가면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냥 꺼림직한 느낌이 난다는 것 뿐.”
“······.”
“아마 다른 분들이 가면을 직접 본다고 하더라도, 안우진님이 쓰고 계신 게 블라디미르의 가면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거예요.”
‘그나마 다행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세리안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악귀가 그려진 가면을 보고 블라디미르의 가면이라고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마계 칠 군주 중 한 명이 쓰던 가면이었다고?’
어쩐지 효과가 정말 괴랄할 정도다 싶더라니.
‘미친 옵션이 달린 이유가 있었어.’
같은 등급의 아이템이라도 어느 정도의 효과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블라디미르는 동급 아이템 중 최상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장 준신화일 때의 가면과, 이번에 얻은 몽환의 달빛만 비교해봐도 넘어설 수 없는 제법 커다란 벽이 있었으니까.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 154화. 격변의 물결(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