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후폭풍(4) >
집무실로 들어서니, 방긋 웃고 있는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룬이라는 플레이어 때문에 날 부른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날 급하게 호출할 이유가 없을 텐데.
“찾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안우진님. 혹시 소식 들으셨나요?”
“지구에서 두 번째 상위 플레이어가 나왔다는 소식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확 강해져서 곧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하위 게임 메이커가 이렇게 금방 승급시킬 줄은 몰랐네요.”
‘역시 룬 때문에 부른 게 맞았군.’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세리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변수가 생겼다는 거군요.”
“네. 아무래도 유일한 지구 플레이어라는 메리트가 깨졌으니, 이대로라면 안우진님이 없어도 성계 대항전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잖아요.”
아세리안이 양손을 깍지 낀채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이론적으로, 열두 성계 모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성계 대항전이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곧 올라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세리안님. 제가 하위 리그 뛸 때 어땠죠?”
“말할 필요도 없죠. 이견이 없는 최강자. 그때 당시 G. O. A. T를 논했을 정도니, 아무리 못 해도 역대 하위 리그 임팩트 중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비슷했다.
‘커뮤니티에 내 게시글로 도배되고, 이례적으로 상위 리그에도 내 닉네임이 알려졌을 정도니.’
그때의 난, 하위 리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 플레이어였다.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데 제가 상위 리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어땠습니까. 절 아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였죠. 대부분은 아, 좀 유명한 애가 올라왔구나, 하고 넘기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세리안의 모습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볼 것도 없습니다. 신입생 때의 제 처우를 생각해 보면, 저 대신 룬이라는 플레이어 혼자 지구 성계 대항전에 참가한다? 관객들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지구 플레이어가 등장했음에도 내가 자신만만한 이유가 이거였다.
라파엘은 지금껏 나와 쿠 훌린, 두 사람의 대결을 가지고 계속해서 성계 대항전을 홍보해 왔다.
‘지구에선 고작 한 명 밖에 안 나오는데? 라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직전에 내가 빠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와 쿠 훌린을 가지고 홍보해왔던 성계 대항전의 이미지가 시작부터 박살 날 것이다.
거기다 지구에서 한 명밖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이슈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고.
“제 생각도 안우진님과 같아요. 룬이라는 플레이어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죠. 안우진님은 하위 리그도 초토화 시키고 올라오신 데다가, 긴급 미션에서 중급 악마를 일대일로 상대하셨고, 심지어 상위 리그 최초로 단독 미션까지 수행하신 분인데요. 그것도 극악의 난이도를.”
무척 뿌듯해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오히려 머쓱했다.
바로 면전에 대고 내 칭찬을 들으려니, 뭔가 낯간지러웠달까.
하지만 아세리안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성계 대항전은 아마 그대로 열릴 거예요. 거기에 들어간 포인트가 있으니, 그걸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으려 하진 않을 거거든요.”
“관객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말씀이십니까?”
“네. 보통 하이블러드나이트 경기를 준비하는데 어느 정도의 포인트가 필요한지 아시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평균적으로 천만 포인트 정도가 필요해요.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할 기본급이나 보너스를 제외하고, 그냥 경기를 준비하는 데에만요.”
“······!”
뭐라고?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천만 포인트?
‘도대체 뭐 하는데 그렇게 많은 포인트가 들어가는 거지?’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할 포인트 말고 또 쓸 게 있나?
“안우진님이 경기장에 들어갈 때 열리는 게이트 있죠? 그걸 비프로스트라고 불러요.”
“아, 네.”
“근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세요? 안우진님은 죽었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세상으로 가시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법도 있고, 신도 있고, 천사도 있는 세계.
그러니까 망자亡者인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엄연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사는 세상은 달라요. 근데 그걸 강제로 잇다 보니,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 거거든요. 아무튼, 일반 경기를 개최하는데도 천만 포인트가 넘게 들어요. 근데 초대형 이벤트인 성계 대항전? 아무리 못해도 10억 포인트 이상이 필요할 거예요. 최소한으로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감도 오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포인트.
그녀의 말대로라면, 관객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성계 대항전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엄청난 포인트를 버릴 수야 없을 테니까.
‘곤란하게 됐군.’
내 목적은 성계 대항전이 열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른 성계에서 차원 특전을 얻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후폭풍 또한 라파엘에게 뒤집어씌울 예정이었고.
‘라파엘에게 뒤통수를 후려 쳐 주는 건 덤이었지.’
그런데 이대로라면 결국 성계 대항전이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아세리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있어요.”
“어떤······?”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눈웃음을 쳤다.
“단순해요. 룬이라는 플레이어도 불참하게 만들면 되죠.”
룬을 참가하지 못하게 만든다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다른 팀 소속인 룬을 도대체 어떻게 참가하지 못하게 만들 것인가.
내 말에 아세리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팀 불굴 소속이에요. 불굴의 주인, 중급신 루디악은 커뮤니티에서도 소문 난 안우진님 광팬이구요. 오죽했으면 팀원들 전체를 다 지구인으로 꾸려서, 안우진님 코스프레까지 시키겠어요?”
“······아, 네.”
“제가 루디악님과 한번 만나볼게요. 안 그래도 우리 팀 육성법이 궁금하다며 여러 차례 저한테 문의가 왔었거든요. 제가 만나자고 하면 당장에라도 시간을 내줄 거예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진짜 많이 성장했네.’
현재로선 이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아세리안이 제법 든든하게 보일 정도.
“물론 육성법을 공유해주긴 해야 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유니콘의 뿔 사용 방법을 알려주려구요. 팀 불굴 소속 플레이어들 보니까, 마력 스텟이 전체적으로 낮은 것 같더라구요.”
“음, 그 정도면 딱 적당하죠.”
유니콘의 뿔 사용법은 아직 커뮤니티에 공개되진 않았지만, 알만한 팀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딱히 우리 팀만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없달까.
그 정도라면 협상테이블에 딱이었다.
“일단 플레이어 룬의 승급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그쪽에 의견을 전달해 놓은 상태예요. 협상이 완료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참. 스킬북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클로에에게 들으니, 30프로 더 비싸게 내놔도 올리는 족족 판매되고 있다더군요.”
아세리안에게 투자를 확정지은 이후, 나는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 뜨나 안 뜨나 체크하기 위해 고용한 사용인, 클로에를 통해 중개 거래소에 스킬북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일 저녁 9시에, 딱 4권만.
“제 말이 맞죠? 서두르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포인트를 벌 수 있다니까요.”
모두들 무림에서 얻은 스킬북들이 풀리길 기다리는 상황.
굳이 급하게 판매하지 말고, 차라리 매일 같은 시각, 똑같은 물량만 올려보라는 게 아세리안의 조언이었다.
―그렇게 하면 경쟁 심리가 붙잖아요. 어? 좀 비싼데? 근데 이거 누가 사가면 어떡하지? 에잇! 내가 그냥 사야겠다! 그러다 보면 금액이 좀 높아도 일단 손이 나가지 않을까요?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다음부턴 40프로 더 비싸게 올려봐야겠어.’
비싼 금액이 무색할 정도로 올리는 족족 팔려나갔으니까.
그로 인해 게시판엔 나에 대한 원성이 잦아졌을 정도였다.
└아 씨팔! 풀 거면 한 번에 다 풀라고, 찔끔찔끔 풀지 말고ㅡㅡ
└무슨 개한테 밥 주듯이 판매를 하냐? 매일 밤마다 중개 거래소에서 죽치고 있네 하;;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는 역대급이더라 ㅋㅋㅋ 4개 올라왔는데 첫 번째꺼 창궁무애.. 읽고 있는데 4개 다 사라짐 ㅋㅋㅋㅋ 이 새끼들 읽지도 않고 일단 구입부터 누르나봨ㅋㅋㅋㅋㅋ
└어휴 ㅉㅉ 그렇게 죽치고 있으니까 저러는 거지 ㅋㅋㅋㅋ 니들 아니었음 이미 다 풀리고도 남았음 ㅎ
└ㅋㅋㅋㅋㅋ 난 그냥 구경만 하는데도 꿀잼이드라 ㅋㅋ 매일 9시가 되면 커뮤에 찡찡이들 모임 소환됨 ㅋㅋㅋㅋ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북이 무림, 딱 한 곳에서만 흘러나온 거다 보니, 판매자가 나라는 것을 신들이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일단 판매된 5천만 골드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1억 5천만 골드도 만들어지는 대로 가져다드릴게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생긋 웃었다.
“천천히 주셔도 돼요. 어차피 중개 거래소에 매물이 없어서 골드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렇긴 하죠.”
“게다가 하위 리그도 요즘 상위 성계 대항전에 이목이 끌려서 관객 수가 저조한 편이더라구요. 그래서 하위 게임 메이커가 최근엔 네임벨류가 낮은 플레이어들에게만 오퍼를 돌리고 있어요. 어차피 수익도 안 나는데, 괜히 이런 경기에서 네임드가 죽기라도 하면 손해니까요.”
‘그래서였군.’
어쩐지, 요즘 팀원들의 출전 빈도가 굉장히 낮아졌다 싶더라니.
하위 리그에서 팀 투지는 최고 명문 팀으로 꼽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입 플레이어라도, 일단 투지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본급이 빠르게 오른달까.
물론 그만큼 생존율도 높고, 좋은 경기력을 펼쳐주는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컨텐더로 오르는 속도가 다른 팀보다 훨씬 빨랐다.
‘상위 리그에서도 명문 팀으로 만들어줘야지.’
다음 목표를 정한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도 고생하세요.”
아세리안의 집무실을 나선 나는 특수 대련장으로 향했다.
플레이어 룬이 승급한 문제는 다행히 아세리안이 해결해줄 것 같고.
이제.
고위 리그로 올라갈 준비를 할 때였다.
‘승급하기 전에 박투술을 특급까지 올려놔야겠어.’
현재 팀 투지에 나와 대련해 줄 녀석은 차고도 넘쳤다.
아세리안의 말대로라면, 녀석들에게 당분간 오퍼가 없을 테니까.
거기다 마침 새로 들어온 수호가 특급 박투술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과 대련하며 움직임을 연구하다 보면, 특급 박투술로 올라갈 실마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형, 제발 창 좀 들어주세요. 제발요! 창은 한 번에 끝나는데 이건 맞아 죽어야······꽥!”
“안우진님, 저는 일격에 부탁드립니다.”
“어어······! 난 왜요! 난 마법사라고요!”
그날부터 나는 한동안 특수 대련장에 살다시피 하며, 오가는 팀원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손맛이 좋은데?’
* * *
“현재 중개 거래소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템들을 쓸어왔습니다.”
마계 최하층.
왕은 왕좌에 앉아 손바닥 위에 있는 두 개의 조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초록빛 조각과.
“그리고 중간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작업 중인 타겟이 50프로 이상 타락화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만큼 까만 조각.
‘친구여······.’
조각을 보고 있는 왕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녀석이 고위 리그로 올라오는 순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한동안 상념에 젖어 있던 왕이 고개를 들자, 대전大殿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하고 있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여인의 등에는 8쌍의 날개가, 그리고 머리 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다.
“고개를 들라.”
“예.”
“라미엘, 다음 접선 날짜가 언제지?”
그러자 여인이 잠시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대답했다.
“앞으로 열흘 남았습니다.”
“열흘이라······.”
왕은 왕좌의 팔걸이 부분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1분 정도 지난 후였다.
“받아라.”
팅-
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언가가 여인에게 정확히 날아왔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보니, 초록빛이 흘러나오는 조각이었다.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여인에게 왕이 입을 열었다.
“그 조각을 타니엘에게 전달하라.”
“알겠습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할까요?”
여인의 물음에 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대전을 비추고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왕을 비추었다.
자줏빛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반짝거렸다.
“조각 주인의 손에 돌아가야겠지.”
< 136화. 후폭풍(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