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후폭풍(3) >
‘정말 지긋지긋해.’
르니카엘이 건네준 서류를 보던 라파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도대체 왜 자꾸 포인트가 부족한 거야?’
성계 대항전에 들어가는 포인트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이젠 처음에 계획했던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상황.
그로 인해 요즘 라파엘의 심기가 무척 예민했다.
주변에 존재하는 천사들이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라파엘님.”
그때 들려오는 타니엘의 목소리.
“왜.”
라파엘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까칠하게 대답했다.
“오딘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또 왜!”
하지만 이어지는 타니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열두 주신이 찾아올 때는 항상 골치 아픈 일들을 들고 왔었으니까.
몇 달 전엔 긴급 미션이라며 렌을 차출해갔고, 당장 며칠 전만 해도 단독 미션이라며 또다시 렌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그날, 라파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
렌이 죽는 순간 그녀가 계획해 온 모든 것들, 천문학적인 포인트가 모조리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성계 대항전이 엎어진다고 해서 상위 리그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영원히 열두 주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겠지.’
그녀의 목표에 영영 도달할 수 없다는 것.
다행히 렌이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열두 주신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건 저도 잘······.”
고개를 조아리는 타니엘의 모습에, 라파엘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으로 모셔.”
“네.”
그러고는 서둘러 의복과 머리칼을 정리했다.
오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오늘은 별일 아니길.’
잠시 후.
“오딘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타니엘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라파엘이 원피스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라파엘, 주신님을 뵈옵니다.”
“음, 라파엘. 바빠 보이는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아무리 바빠도 오딘님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한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파엘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딘의 대답은 라파엘이 그토록 바라지 않던 주제였다.
“플레이어 렌이 단독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더군. 그로 인해 주신회主神會에서도 렌을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예.”
라파엘이 잡은 치마 춤 너머로 허벅지를 꼬옥 꼬집었다.
‘그놈의 렌. 렌. 렌! 도대체 왜 자꾸 렌을 물고 늘어지는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 같았으니까.
렌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
그래서 확실하게 목줄을 채워놨는데, 자신이 채워둔 목줄을 주신들이 자꾸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절대 안 뺏겨.’
라파엘이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오딘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전에 부탁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렌과 한 번 직접 보고 싶다고.”
“맞습니다.”
“근데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오딘이 안대를 껴,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자 라파엘이 침을 꿀꺽 삼킨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성계 대항전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출전하는 거다 보니까, 이래저래 준비할 게 많은 모양입니다. 성계 대항전이 끝난 뒤에 오딘님을 알현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해 왔습니다.”
그러자 오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후. 다행이야.’
아무래도 그녀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참.”
그러나 오딘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속이 매슥거렸다.
열두 주신, 특히 오딘과 대화할 때마다 그녀는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듯 하더니 뒤에서 꼬아버렸으니까.
“요즘 재정이 무척 안 좋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내 안 그래도 주신회에서 그와 관련하여 안건을 올렸노라. 아마 곧 있으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앗!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말과 달리, 고개를 숙인 그녀의 표정은 무척 싸늘했다.
‘내 목줄을 쥐고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포인트를 무기 삼아 그녀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주신회.
덕분에 상위 리그는 그녀의 왕국이 아닌, 주신회의 왕국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숙인 게 마지막일 테니까.
‘2달만 버티면 돼.’
상위 성계 대항전.
그게 그녀의 입지를 올려줄 것이다.
저 위, 열두 자리가 있는 곳까지.
* * *
“그대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지.”
눈앞의 존재를 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스킬북의 정리, 팀에 대한 투자, 그리고 카이로시아의 승급전까지.
최근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터라 새로 들어온 신입들을 살피지 못했다.
무려 4천 명이나 새로 들어온 상황.
이전처럼 꼼꼼하게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그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허나.”
눈앞의 존재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짧게 쳐낸 은발의 머리칼.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
엉덩이 쪽에서 씰룩거리고 있는 꼬리.
그리고 거대한 육체에 오밀조밀하게 박혀 있는 근육들과, 이빨에 나 있는 송곳니까지.
‘당연히 무림에서 들어온 네임드일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알프하임 출신이었을 줄이야.
“내가 들어온 이상 팀의 최강이란 타이틀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수호]
[성향 : 호전]
[근력 : 98(+?)] [민첩 : 101(+?)] [체력 : 89(+?)]
[정신 : 81(+?)] [지력 : 1(+?)] [마력 : 92(+?)]
[각성 능력 : <특급박투술> <사냥본능> <육감> <고급살기> <최상급마나운용> <하급치료술>]
[종족 특전 : 최강의 종족]
이번에 우리 팀에 들어온 네임드는 알프하임에서 온 호인족이었다.
그것도 로열 블러드들만 가지고 태어난다는 은발을 가진.
‘호인족은 정말 뛰어난 종족이지.’
육중한 몸,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힘.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민첩한 움직임.
거기다 뛰어난 전투 센스까지.
이전에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만났던 소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개체 수만 많았으면 콜로세움을 씹어먹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쩐지. 모용악이 힘들어하더라니.’
“안우진님, 모용악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시죠.”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저······ 이번에 들어온 네임드 말입니다.”
“예.”
“그······ 죄송하지만 한번 직접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무실로 찾아왔던 모용악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는데, 새로 들어온 네임드를 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갓 들어온 신입에게 졌나 보군.’
직접 본 소호의 스텟은 상위 플레이어 수준.
아직 하위 리그에서 구르고 있는 모용악에겐 버거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최강의 종족인 호인족, 그중에서도 로열 블러드가 상대였으니.
‘제대로 한번 서열 정리를 해줘야겠어.’
호랑이는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무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무척 서열에 민감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수호는 호인족의 로열 블러드.
무리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서열에 민감할수록 한번 밟아두면 편하긴 하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나와 수호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특수 대련장 한쪽에서 대기하던 카이로시아가 은발을 쓸어넘기며 다가왔다.
“안우진님.”
“예.”
“예?”
“······어.”
최근 그녀는 별것도 아닌 걸로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반말 듣는 게 그렇게 좋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확실하게 짓밟아 주세요. 아님, 제가 할까요?”
묘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라면 수호를 압도적인 화력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호인족이라고는 하지만, 마법에 직격당하면 죽는 건 똑같을 테니까.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그녀는 마법사.
수호의 입장에선 암습으로 그녀를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상황만 잘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가능성 있기도 하고.
“내가 할게.”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상황, 어떤 방식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천세운과의 싸움을 통해 권각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검만 들고 싸웠다면 연출되지 않았을 상황들이, 권각술이 추가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었다.
말하자면 천세운은 검 뿐만 아니라 주먹과 발차기라는, 네 개의 검으로 날 상대한 거랄까.
‘나도 권각술을 특급 경지까지 올려야겠어.’
그렇게 되면 내 공격 방식이 훨씬 다양해질 것이다.
리치가 긴 창을 뚫고 들어와도, 리치가 짧은 주먹과 발차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음을 먹은 나는 벽력섬전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뭘 하는 거지?”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
나는 양발을 어깨너비로 비스듬하게 벌린 채 수호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굳이 창을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요. 덤비시죠.”
그러자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발톱에 찢기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보겠다!”
녀석이 낮게 으르렁대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난 칼자국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수호의 스텟으로 봤을 때,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이런 도발도 처음 들어봤겠지.
‘제대로 짓밟아 주지.’
나는 천뢰십보.
그리고 뇌신 강림을 활성화 시켰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
그러고는 내게 달려드는 수호의 손톱을 쳐내며, 다른 손으로는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까드득-
쇄골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정강이를 발로 찼다.
“끄윽!”
그러자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여나가는 수호의 무릎.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잘 가라.’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피의 강화 특전이 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근력 스텟은 216 포인트.
그 엄청난 괴력에, 특수 대련장의 흙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먼지를 동반한 엄청난 충격파가 뇌전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그 한 번의 공격 아니, 패대기 질 만으로도 수호는 즉사했다.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 났는지, 복부가 사람이라면 보일 수 없는 형체로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깼습니까.”
“······.”
“그럼 일어나시죠. 제가 좀 바쁜 몸이라. 한 열 번만 더 죽이고 가겠습니다.”
내 말에도 수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온몸을 벌벌 떨 뿐.
사납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순한 양으로 변해 있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군.’
호인족은 뛰어난 본능을 가지고 있는 종족이지만,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카이로시아나 모용악, 고건하처럼 열 번씩이나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더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도리도리.
“전 대답하지 않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다시 묻죠. 더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내, 내가 졌다.”
“졌다?”
“져, 졌습니다······.”
엉덩이 쪽에서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도 축 늘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서열 정리가 됐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안심할 순 없지.’
“모용악님.”
“예, 안우진님.”
내 부름에 새로 들어온 준네임드 급들과 함께, 카이로시아 곁에서 싸움을 관전하던 모용악이 달려왔다.
모용악 너머로 준네임드 급 플레이어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아뇨, 바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모용악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또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정신 차릴 때까지 죽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살기를 내뿜자 모용악, 쓰러져있던 수호,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몸을 움찔 떨었다.
시각적 임팩트도 충분했고, 확실하게 경고의 메시지도 남겼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수호님?”
“······예.”
“절 쓰러트릴 수 있겠다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물론 그때는 더 과격해진 제 모습을 보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
“그럼 전 이만.”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수호를 뒤로하고 특수 대련장을 나섰다.
‘오후엔 주창범과 붙어봐야겠군.’
권각술을 수련하려고 했는데, 너무 쉽게 끝난 상황.
마침 곧 있으면 주창범도 승급샷을 받을 테니, 실전 감각을 다듬어줄 겸 녀석을 상대로 권각술을 수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우진이형!”
마침 체력 단련장에서 나오는 주창범.
그래서 그에게 오후의 대련 일정을 잡으려 할 때였다.
“형, 상위 리그에 두 번째 지구 플레이어가 나타났어요.”
한달음에 다가온 주창범이 말했다.
“······뭐라고요?”
띠링! 띠링!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집무실로 좀 와주세요! 빨리요!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알림창.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일단, 조금 이따 얘기하죠.”
나는 한숨을 내쉰 나는 주창범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집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급해 보이는 아세리안의 메시지.
‘아마 성계 대항전 때문이겠지.’
< 135화. 후폭풍(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