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후폭풍(2) >
만약 정말로 플레잉 코치의 정산율을 5프로로 올려준다면 1억 골드 이상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상황이 아주 좋아.’
내가 생각했을 때, 플레이어가 상위 리그로 올라오기 위해선 네 가지가 필요했다.
스텟과 테크닉, 스킬, 그리고 아이템.
‘간혹 초기 스텟이 세 자리를 넘는 괴물들은 예외지만.’
거의 99.99%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텟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스킬은 현재 내가 그림자 표식이나 뇌룡의 포효, 뇌신 스킬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는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템은 블라디미르의 가면 하나로 얘기 끝이고.
‘팀 투지 플레이어들은 스텟과 테크닉적인 면에선 문제없어.’
저주셋을 이용한 스텟 상승, 그리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는 커리큘럼.
그 두 가지로 팀 투지는 역대급 생존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고급 스킬과 아이템들을 지원해준다면?
주창범이 그랬던 것처럼 1티어 스킬들로 도배하게 된다면 어떨까?
‘모용악이나 루치아노, 고건하 같은 플레이어들도 금세 상위 리그로 올라오겠지.’
나야 블랙 허브를 통한 시세차익으로 스킬과 아이템 문제를 해결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쉽지 않을 것이다.
버는 포인트로 족족 스텟을 구입할 테니까.
미션 진행 중에 운 좋게 값비싼 아이템을 얻거나, 스킬북을 획득하지 않는 이상 이 두 가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그 두 가지를 채워줄 생각인 거고.
‘승급만 시켜도 본전은 뽑을 수 있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순간 기본급이 껑충 뛴다.
하위 리그에서는 기껏 올라 봤자 천, 이천 포인트씩 오르던 게, 상위 리그에서는 만 포인트 단위로 오르니까.
‘당장 내 기본급만 봐도 10만 포인트를 넘지.’
괜히 나 혼자 버는 포인트가, 한때나마 팀 투지 수익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던 게 아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팀에서는 골드만 지원해준다면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제법 된다.
그들이 올라오면 지금까지 받고 있던 포인트가 단숨에 몇 배나 상승할 것이다.
‘한 달에 플레잉 코치 정산 비용만 10만 포인트씩 들어올 수도 있어.’
그럼에도 내가 여태껏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이유는, 플레잉 코치의 정산 비율이 고작 3%밖에 안 돼서 투자 대비 리턴이 무척 낮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에게 모두 지원을 해주려면 몇천만 골드 가지고는 택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5프로로 오르면 얘기가 다르지.’
기존의 투자 대비 수익이 66%나 상승하는 셈.
이 정도면 투자금액을 늘리는 게 나한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정확한 가치부터 파악해야겠어.’
그래야 얼마를 투자할 수 있는지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킬북들을 우수수 쏟아부었다.
“······?”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세리안.
“일단 제가 저번 경기에서 정확히 얼마를 얻었는지부터 파악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 하기엔 양이 좀 많아서 그런데,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런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실 때 혹시 팀원들 중에 시너지가 잘 맞을 것 같은 스킬들은 한쪽으로 빼 주세요.”
“넹!”
그때부터 우리 둘은 스킬북들을 하나하나 감정하며 종이에 대략적인 가치를 적기 시작했다.
무려 천 권이나 되기 때문에 혼자서 했으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만, 아세리안은 이런 부분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스킬북과 종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절반가량의 스킬북들을 정리했을 때였다.
“어······.”
“왜 그러십니까?”
“자, 잠시만요. 이, 이것 좀 봐주셔야겠는데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리안이 말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서둘러 다가가, 그녀가 건네는 스킬북을 살폈다.
[<스킬북:극한심결極寒心訣>]
[액티브]
[새외무림, 북해빙궁의 독문 무공입니다.]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2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25% 상승시킵니다.]
[마력에 극한의 기운이 흐릅니다.]
[<스킬:극한심결>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빙신氷身> 능력을 각성합니다.]
[적의 공격을 방어할 경우, 막는 데미지의 1%를 반사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빙신>]
[온몸이 단단하게 얼어붙습니다.]
[마력이 깃들지 않은 날붙이의 공격을 무시합니다.]
스킬의 효과를 본 나는 순간 멍해졌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스킬이 플래티넘 등급이라는 것을.
‘내가 왜 이 스킬을 못 봤지?’
거의 뇌룡의 포효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효과였다.
이걸 내가 못 보고 그냥 넣었을 리는 없었을 텐데······.
‘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천뢰십보를 익힌 직후에 얻은 모양이었다.
그때의 난 새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사용해볼 생각에,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니까.
“이거······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죠?”
고개를 들자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세리안이 보였다.
아마 주창범에게 무척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극한심결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아세리안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벌써 절반이나 했네요. 일단 나머지를 마저 끝내고 얘기하시죠.”
“아, 아니에요. 안우진님 부탁인데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아쉬운 듯 한동안 내 손끝을 바라보는 아세리안.
하지만 내가 그녀의 시선을 끝까지 무시하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스킬북 정리.
“와······ 진짜 대박이네요.”
종이를 내려다보는 아세리안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스킬북의 개수는 1,021개.
1티어 스킬이 311개였고, 2티어 스킬이 698개였다.
나머지 12개는 3티어 스킬이었는데, 확실히 마교에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서고답게, 3티어 등급의 스킬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략적으로 매긴 스킬북의 총액은.
‘11억 7천만 골드.’
기존에 예상했던 6억 5천만 골드보다 80%나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를 보고 있음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아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골드를 손에 쥘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후우.”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정신이 없으리라.
11억 골드는 신이라고 해도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나는 종이를 내려두며, 한쪽으로 빼둔 스킬북들을 살폈다.
총 52권의 스킬북이었다.
가치는 9,360만 골드.
대략 내가 번 금액의 8%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투자금을 늘려도 되겠어.’
11억이란 거금이라면, 혹시나 중개 거래소에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나,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스킬북들. 그리고 여기에 2억 골드를 더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2억 골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어보는 아세리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면 내가 투자하는 총금액은 2억 9360만 골드.
제대로 돈지랄을 했다.
‘기대되는군.’
이 정도라면 팀 투지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스킬과 아이템은 즉시 전력을 올려주기 때문에, 금방 반응이 올 테니까.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성공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 많았던 상위 리그 최초의 단독 미션! 난이도 조절 실패인가, 아니면 단독 미션의 탈을 쓴 일반 미션인가!
―제대로 잭팟을 터트린 렌! 미션도 완수하고,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까지. 과연 렌이 획득한 저 스킬북들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 것인가.
―각 팜에 바글바글한 무림인들. 하위 리그의 판도가 뒤바뀌나?
└중개 거래소에 매물이 없네 ㅅㅂㅡㅡ 뭔 일 생김?
└이번에 콜로세움으로 무림 쪽 스킬북들이 대거 유입됐음. 그래서 그거 안 풀리나 다들 중개 거래소 기웃기웃대니까 그 반사 작용으로 매물이 싹 쓸려나간듯 ㅋㅋㅋㅋ
└거기다 중개 거래소 평소에 잘 안 들어가는 신들까지 다 들어가서 죽치고 있으니까 ㅋㅋㅋㅋ 매물 풀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음 ㅋㅋ
└이번 단독 미션 개 어이없던데 ㅋㅋㅋㅋ 그냥 상위 넘버링 경기에 렌 혼자 집어넣고 단독 미션이라고 쓴 거랑 뭐가 다름..?
└근데 웃긴 건 그걸 렌이 혼자 깼엌ㅋㅋㅋㅋ 그게 더 어이없었음 ㅋㅋ
└이번 단독 미션 보니까 렌 혼자서 성계 대항전 출전해도 재미있겠더라 ㅋㅋㅋ 싸움도 잘하는데 상황에 따라 쓸 수 있는 유틸 스킬이 ㅈㄴ 많은가 보던데??
└거기다 지금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서 두 개나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준다잖아 ㅋㅋ 이 정도면 꿀잼 예약임ㅋ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 아직도 2달이나 남았어 ㅡㅡ 시간아 빨리 가라 젭라···.ㅠㅠ
└이젠 더 이상 까는 애들 없겠지? 쿠 훌린 vs 렌 가즈아아아아악
아세리안에게 총 3억 골드를 투자하겠다고 밝히고 1주일 후.
[현재 시각 : 23:57:58]
밤늦은 시각임에도 팀 투지의 팜은 대낮처럼 환했다.
모든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데다가, 공터에도 【불빛】 마법이 시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제 일이 아닌데도 되게 떨리네요. 우진이형 때는 안 그랬는데.”
“안우진님이야 뭐, 걱정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강한 분이시니까. 근데 슬슬 끝날 때 되지 않았나?”
“어디 보자······ 아직 2분 남았어요. 아으, 왜 이렇게 떨리지?”
“창범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너 때문에 나까지 정신 사납잖아.”
“허얼, 무슨 소리예요, 악이 형. 지금까지 형이 제일 말 많았잖아요!”
원래대로라면 모두들 자고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공터에는 팀원들로 바글바글거리고 있었다.
투닥거리는 주창범과 모용악.
허공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하는 아세리안과 피넛엘, 그리고 포르도엘.
두 손을 모은 채 기도 중인 이세연.
그 외에 3기수부터 이번에 새로 들어온 7기수 플레이어들까지.
모두들 한 사람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었다.
‘쯧.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기분이겠군.’
주창범과 사인방이 처음으로 단독 PvP 경기에 들어갔을 때 이후로는 이런 초조함을 느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오오! 게이트가 열려요!”
게이트가 열린다는 누군가의 말과 동시에 팜이 엄청나게 시끌벅적해졌다.
5천 명이 넘는 팀원들이 모두들 소리를 지르거나,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얼싸안고 방방 뛰고 있었다.
“휴우.”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눈을 떼며 한숨을 내쉬는 아세리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내가 아니었다.
‘드디어.’
“오오! 나온다! 나와!”
“와아아아아아아아!”
“폭죽 준비해요, 어서!”
팍! 파바바바박!
순간 무수한 숫자의 폭죽이 터졌다.
“상위 리그로 승급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카이로시아님!”
“우리 팀 두 번째 상위 플레이어!”
오늘은 카이로시아의 승급전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다녀왔습니다.”
검은 로브에 검은 완드를 착용한 카이로시아가 은발을 흩날리며 게이트에서 나왔다.
평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그녀 또한 상위 플레이어로 승격한 것에 무척 감격한 모양이었다.
‘됐어.’
카이로시아 다음으로는 주창범, 모용악, 지그, 고건하, 루치아노 같은 플레이어들이 순서대로 승급샷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첫 스타트가 무척 좋았다.
이후에 승급전을 펼칠 플레이어들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로시아님은 팜에 들어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당소소가 내게 물었다.
‘언제 들어왔더라.’
내가 승급하고 바로 다음 주에 들어왔으니까······.
“음. 대충 10개월 정도 됐네요.”
“안우진님은요?”
“전 9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럼 저도 앞으로 9개월 안에 상위 리그로 올라가고 말겠어요.”
그런 내 대답에 당소소가 담담하게 다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쉽지 않을 거니까요.”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축하해요, 카이로시아님.”
“감사합니다, 여신님.”
“축하한다. 그대라면 금세 상위 리그로 올라올 줄 알았다.”
“감사합니다, 피넛엘님.”
어느새 다가와 아세리안, 천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카이로시아가 내 앞에 똑바로 섰다.
“축하드립니다. 결국 올라오셨네요.”
나 역시 그녀에게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소소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본 카이로시아가 턱 끝을 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죠.”
“······?”
“고생했어, 카이로시아. 그렇게 얘기하셔야죠. 반말권 잊으셨어요?”
“······!”
< 134화. 후폭풍(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