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새로운 네임드(1) >
마계의 최하층.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이 대전大殿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이번 긴급 미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5급 역천사, 마요엘.
그녀가 대전 한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왕좌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저를 받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 어찌 너를 잊겠느냐, 마요엘이여.
작게 읊조린 목소리에도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으으.’
그 안에 담긴 힘을 느낀 마요엘이 몸을 움찔 떨며, 더욱 깊숙이 머리를 내리깔았다.
―고개를 들라.
마요엘이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왕의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권위가 들어 있었다.
고개를 드니,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대에게 은혜를 하사하겠노라. 기대하는 바가 크노니, 부디 나와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계를 위하여 애써주거라.
왕이 한쪽 팔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자줏빛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흘러 나와, 마요엘의 몸을 휘감았다.
연기에 휩싸인 마요엘의 온몸에서 우드득-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단해.’
엄청난 힘이 샘솟았다.
이게 마기魔氣의 힘.
몸속에서 마기와 신성력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자줏빛 연기 안에서, 마요엘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마계의 왕이자.
또 한 명의 초월자에게.
“첫 번째 대천사시여.”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남은 포인트 : 444,730 P]
“하.”
긴급 미션을 완수하고, 무사히 경기를 마친 기념 파티를 즐긴 다음 날.
집무실에 앉아 보유 포인트를 확인한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한 경기를 뛰었는데, 보유 포인트가 44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거 아니야?’
시노엘을 죽이면서 23만 포인트.
그리고 루에타에서 26만 포인트.
거기다 마성석을 부순 보너스 5만 포인트에,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에 선정되며 또 추가로 5만 포인트까지.
수수료 30%를 떼고도 내 수중에 41만 포인트나 들어온 것이다.
‘거기다 플레잉 코치로 3프로 페이백 받은 것도 있지.’
3% 페이백이 무려 8500 포인트.
거기에 팀 투지의 다른 플레이어들로 인해 들어온 포인트까지 합치자 44만 포인트나 됐다.
‘운이 좋았어.’
긴급 미션 한 경기를 뛰었을 뿐이지만, 미션이 두 개였기 때문에 벌어들이는 포인트의 양이 무척 많았다.
거기다 마성석이라는 보너스 미션까지.
덕분에 고작 한 경기를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리그 첫 번째 경기였던 죽음의 구도자, 그리고 두 번째 경기였던 혁명 경기까지 합친 포인트를 벌게 된 것이다.
보유 포인트를 본 나는 책상을 검지로 툭, 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근력이랑 민첩. 슬슬 둘 중에 한 개를 선택할 때가 됐어.’
체력 스텟은 애초에 고민도 하지 않았다.
뇌신의 포효만 해도 체력 소모율이 2배로 상승하기에, 효율이 떨어진다.
어차피 가면 덕분에 체력을 꾸준히 회복할 수 있기도 하고.
‘근력이랑 민첩, 둘 다 나쁘지 않아.’
이미 기초 스텟 120을 앞두고 있는 상황.
이젠 어지간한 강자와 붙는 게 아니라면, 근력이 부족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민첩도 마찬가지고.’
루에타 요새에서 죽였던, 레시엘이라는 타락 천사와 싸울 때 충분히 느꼈다.
이젠 나보다 더 빠른 상대를 만난다 해서, 손도 못 써보고 거리를 허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어느 쪽에 더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렸군.’
압도적인 화력이냐, 아니면 상황별로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이냐.
뇌신과 벽력 덕분에 현재 내 화력은 상위 리그 탑 클래스.
거기에 이제는 뇌신 강림이라는 또 하나의 무기를 손에 쥔 상황.
여기서 더 화력을 끌어올린다면 아마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내 창을 받아낼 존재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민첩을 올리는 게 낫겠어.’
압도적인 화력이 과연 고위 플레이어들에게도 통할까?
그런 생각까지 이어지자, 근력의 메리트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근력이 높다고 한들, 상대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폭이 너무 적어.’
개중에는 나보다 화력이 더 센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당장 상위 리그에서만 예를 들어 봐도, 쿠 훌린이라는 최상위 네임드가 있었고.
물론 내가 그를 직접 상대해 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신들이 남긴 댓글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신들이 화력만큼은 내가 쿠 훌린한테 떨어진다고 그랬지.’
그런 플레이어와 상대하게 된다면, 더 높은 화력을 가진 쪽이 유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벼르고 벼른 회심의 무기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겠지.
‘하지만 민첩을 올리면 그런 상황에 직면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민첩 스텟 자체는 그저 움직임이 빨라지게 해준다거나, 반응 속도가 상승한다거나, 더 유연해지는 등의 효과밖에 없지만, 그런 것들이 의외로 엄청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초감각과 마력장을 이용해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내게 있어서, 그 영향은 더욱 클 것이다.
‘생존에서도 훨씬 유리하겠지.’
근력 스텟을 찍어 화력을 올린다면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압도적인 위용을 보일 수 있겠지만, 명심해야 할 게 있었다.
백 명의 플레이어들을 죽여 봤자, 결국 나보다 강한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만나 죽는다는 것.
결국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 어떤 스텟이 더 유리한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민첩을 올려야겠군.’
마음을 먹은 나는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했다.
사실 근력과 민첩, 결국 뭘 올리든 간에 내가 지금보다 강해진다는 건 분명하기에, 스텟을 구입하는 내 손길엔 한 줌의 주저함도 들어있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5,000 P 를 소모······.]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15] [민첩 : 143] [체력 : 113]
[정신 : 99] [지력 : 44] [마력 : 91]
민첩 스텟 143 포인트.
‘아주 좋네.’
그 수치를 본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강자들을 만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스타일 전환을 통해 적어도 상성에서는 먹고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다음으로 체크해야 하는 건······.’
포인트 사용을 마친 나는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슬슬 성계 대항전에 대한 오피셜이 나올 때가 됐는데.’
내게 6개월이란 자격 정지가 내려진 이유에 대해, 나는 성계 대항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슬슬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는 얘기가 흘러나와야 한다.
그래야 홍보를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찾는 게시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급 미션에 대한 후기들밖에 없었달까.
―쿠 훌린은 역시 쿠 훌린. 파이트 오브 더 하이블러드에 선정되며 상위 리그의 최강자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다!
―왕좌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예, 렌. 하위 리그에 이어 상위 리그에서도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위 리그 관객들. “렌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지구 출신인 건 아무런 페널티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해줄 장신구일 뿐.”
‘내 게시글도 엄청 많네.’
긴급 미션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대가의 제단이 있었던 ‘죽음의 구도자’ 경기, 그리고 서킷 브레이커가 터졌던 ‘혁명’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하위 넘버링 경기였으니까.
상위 넘버링과 하위 넘버링의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까, 하위 넘버링에 괜찮은 유망주가 나왔네, 정도의 반응밖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젠 다르지.’
내 닉네임이 박힌 게시글의 숫자가 증명하고 있었다.
함께 긴급 미션을 뛰었던 쿠 훌린, 그리고 주소월과 엇비슷할 정도로 내 닉네임이 많이 언급되고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이름값이 높아진다는 건, 기본급이 상승한다는 뜻.
하위 리그에서 한창 난리 칠 때 내 기본급이 1만 포인트였다.
그런데 지금은 7만 포인트까지 오른 상황.
이 정도라면 상위 리그에서도 100명 안에 들 정도로 높은 기본급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고액의 기본급 때문이 아니었다.
‘라파엘.’
하위 리그와 다르게, 상위 리그에서는 게임 메이커가 날 쥐고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쿠 훌린 vs 렌 가즈아아아아아아!
└긴급 미션 보는데 진짜 소름 돋았음. 움직임이 이전이랑 완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졌던데?
└ㄹㅇㅋㅋㅋㅋ 네임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상위 리그에서도 이 정도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클라스가 달랐다는 뜻임.
└쿠 훌린 vs 렌 보고싶다아아아악!
└꽤 가능성 있는 유망주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슈퍼스타였누 ㄷㄷ
└난 이번 긴급 미션에서 렌을 처음 봤음.. 그동안 언급은 자주 됐는데, 그래봤자 하위 리그 임팩트 빨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믿거 하고 있었거든? 그런 생각으로 과거의 경기를 안 본 내 뒤통수를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였음.
└애초에 승패를 떠나 쿠 훌린 vs 렌 따위의 언급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넘사벽 클라스란 거임 ㅋㅋㅋㅋ
└근데 렌 도대체 왜 자격 정지 6개월이나 받은 거냐.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 없네 ㅡㅡ 징계 사유도 ㅈㄴ 어이 없음 ㅋㅋㅋ 미션을 제대로 수행했는데 게임 메이커 오더 안 따랐다고 징계 ㅇㅈㄹ ㅋㅋㅋㅋ
└요즘 상위 게임 메이커가 미친 거지. 난 그래서 바로 민원 넣었음. 아직도 자격 정지 3개월이나 남았네 ㅅㅂ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요즘 상위 게임 메이커 집무실로 민원 ㅈㄴ 들어온다고 함. 민원실 천사들 과로사 직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신들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야무야되며 묻혔던 내 징계 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오퍼가지고 협박하는 건 통하지 않아.’
물론 남들에게 2개의 오퍼를 줄 때, 나한테는 1개만 준다든가 하는 장난질은 칠 수 있겠지만.
그나저나.
‘슬슬 성계 대항전을 준비해야겠네.’
내가 최상위권 네임드로 자리 잡은 건 맞지만, 아직까진 최강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쿠 훌린, 주소월만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들이었으니까.
다만 쿠 훌린과 내가 자주 비교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둘 다 창술사라는 점.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섬멸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것.
‘아직 멀었어.’
하지만 상위 리그엔 쿠 훌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졸본의 네임드 을지문덕.
무림의 몽연과 예천화.
그외에 시르카, 카시아, 랜슬롯, 엔키두 같은 네임드들까지.
분명 모두들 나보다 떨어지지 않는 실력자들일 것이다.
‘아세리안한테 정보 좀 모아달라고 해야겠군.’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어떤 스타일을 주로 구사하고, 어떤 무기를 잘 다룬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터.
그런 기본적인 정보들만 알아둬도 분명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미리미리 얘기해 놔야지.’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똑- 똑-
“안우진님, 계신가요?”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와 아세리안의 목소리.
안 그래도 그녀에게 가려고 하던 참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방긋 웃으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아세리안.
오늘도 무척 활기찬 모습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아, 네. 저도 마침 아세리안님을 만나 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아세리안이 앉을 수 있도록 맞은편 의자를 슬쩍 빼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고마워요.”
그러자 눈웃음을 짓는 아세리안.
‘일단 방문한 이유부터 듣고 나서 꺼내야겠군.’
나는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팜에 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네? 아하하.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항상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안우진님의 집무실로 찾아왔었네요. 아이참, 민망해라.”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헤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오늘도 안우진님께 뭔가를 부탁드리려고 온 건데.”
아세리안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저 웃음이군.’
그 모습을 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세리안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마다 저런 미소를 지었으니까.
초감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세리안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면······?”
“주창범씨 때문에요.”
“주창범······?”
< 112화. 새로운 네임드(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