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혁명(4) >
즉위식 당일 아침.
나는 키아라, 고치우와 함께 라 제국의 수도, 안타레스의 중앙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식당 창가에 앉아 있었다.
“고치우님. 즉위식이 진행되면 저기. 지금 병사 세 명이 서 있는 곳 보이시죠. 저쪽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예.”
즉위식이 열리는 곳은 안타레스의 중앙 광장.
하지만 지금은 즉위식 준비로 인해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막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 식당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라면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니까.
“사람이 엄청나게 많네요.”
창가에 기댄 채 중앙 광장을 살펴보고 있던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안타레스는 어딜 가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 앉아 있는 식당의 창가 자리만 해도, 엄청난 웃돈을 주고서야 구할 수 있었을 정도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거대한 행사니까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식당 한 켠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리허설 겸 상황 정리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밥 더 든든하게 먹어! 한 번 중앙 광장으로 내려가면 사람들 때문에 못 빠져나올 테니까!”
“햇빛이 뜨겁습니다요! 햇빛 가리개 사시오!”
“아니! 고작 도시락 7개에 30실버라니! 이런 바가지를 봤나!”
식당이 개판 5분 전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 본 결과, 작게 소곤소곤 대화해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적어도 이 식당 내에서는 없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결국 렌님이 악마 역할을 하시다 보면 백성들을 많이 죽이게 될 텐데.”
키아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라 제국을 멸망시키라는 미션이 나왔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아······.”
슬픈 표정을 짓는 키아라.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션이 내려오면 수행한다.
그건 초월 리그로 향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절대 규칙.
우리의 신념이 어떻든 상관없다.
‘그 규칙은 절대 깨지지 않지.’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신념? 가치관? 내 스스로를 위한 행복?
그런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
막말로 내가 대악마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저주와 원망을 듣더라도.
우리 가족들만 살려준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씁쓸하네요.”
아무래도 그녀가, 이런 식의 스토리 미션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이건, 엘프처럼 종족 특전을 가지고 있거나, 애초에 높은 스텟으로 들어오는 네임드들이 대부분 겪는 일이었다.
그들은 워낙 빠르게 상위 리그까지 올라오다 보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성향인 신념 때문인 걸 수도 있고.
“하나만 생각하세요.”
“······?”
축 처진 키아라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울 반대편에는 우리 각자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저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어디까지 내 던질 수 있는가. 키아라님은 어떻습니까. 신념? 가치관? 그런 걸 따질 만큼 소원이 간절하지 않으십니까.”
“아······. 다, 당연히······.”
“간절하시겠죠. 그럴 테니까 상위 리그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거고요. 그럼 하나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는가.”
“하나만 생각해라······.”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던 키아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에서는 씁쓸함, 우울함 같은 감정들이 사라지고, 반드시 해내겠다는 독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이벤트를 앞둔 상황.
그런 와중에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할 키아라가 흔들리면 계획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얼마 못 가서 죽겠군.’
지금이야 내가 그녀에게 일깨워주긴 했지만,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오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서 흔들린다는 건.
콜로세움에선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키아라와 달리, 곁에 앉은 고치우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이미 나처럼 마음을 다잡은 지 오래라는 것.
‘고치우는 문제없을 것 같고.’
이 작전의 실행자는 단 셋.
나와 키아라, 그리고 고치우.
준비도 완벽하고, 키아라도 마음을 다잡은 것 같으니 남은 건 계획을 실행하는 것 뿐.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중앙 광장을 살펴보니, 즉위식 준비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잠시 후.
저곳에서 악마가 등장할 것이다.
벼락을 뿌리고, 피를 머금은 무서운 악마가.
“지금부터 중앙 광장을 개방하겠습니다!”
어느새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는 대낮이 되었다.
중앙 광장을 통제하던 기사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사이로 고치우도 함께 끼어 움직였다.
중앙 광장의 중심부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사람들로 가득 차기 전에 자리를 잡아놔야 했으니까.
한적하던 중앙 광장이 순식간에 엄청난 인파로 뒤덮였다.
“앗!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모두 통제에 따라주십쇼!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로 연행될 수 있습니다!”
“자리를 잡으신 분들은 조용히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제법 직책이 높아 보이는 기사들까지 나서서 군중들을 통제하는 가운데, 중앙 광장에 펼쳐진 단상 위로 귀족들이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렌 남작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1황자에게 숙청 대상으로 오르고, 즉위식 초대장마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테루오미가 그라센에 남아, 가렌 남작과 교황 후보인 에베렛을 지켜야 했다.
거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는 거대한 행사라 전투가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즉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기사의 외침에 웅성대던 관중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군악대가 각종 악기를 두드리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 일곱 대가 중앙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화려한 마차를, 앞뒤 좌우로 다른 마차들이 감싼 형태.
마차는 병사들이 몸으로 만든 벽을 따라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1황자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모두 고개를 숙여, 전하께 예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중앙에서 통제하는 기사의 외침에 수만 명의 백성들이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이 1황자.’
마차가 단상 바로 앞에 멈춰 서더니, 금발을 멋스럽게 넘긴 30대 초반의 남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자신이 1황자 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금빛으로 칠해진 무척 화려한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암살하려는 존재들이 있다면, 무척 위험할 정도로.
‘근처에 있는 녀석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였군.’
하지만 1황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른 여섯 개의 마차에서 내린 기사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들 사이로, 한 명의 노인도 함께 존재했다.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무척 중후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1황자를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흑마법사.’
나는 단번에 녀석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 : 조로 아스터]
[성향 : 절대 악]
악마의 눈으로 본 녀석의 성향이.
절대 악이었으니까.
“슬슬 시작할까요?”
1황자가 단상으로 오르자, 키아라가 내게 물었다.
“아뇨. 적당한 때가 분명히 올 겁니다. 그때까지 잠시 대기하죠.”
지금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더 완벽한 타이밍을 찾고 싶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즉위식.
―나,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는 제국의 1황자이자, 정통 후계자로서, 선황 폐하의 자리를 이어받아, 앞으로 라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국법을 무겁게 받들되 억울한 이가 생기지 않게 할 것이고, 배곯는 이 생기지 않도록 나라의 재정으로 사치를 일삼지 아니할 것이며, 나아가 이 발리노르의 평화를 위해 언제나 앞장설 것임을 국민들 앞에서 맹세합니다.
루카스가 백성들 앞에서 즉위 서약을 한 뒤, 단상 위에 준비된 왕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격한 환호 소리.
박수 세례와 환호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루카스가 왕관을 머리에 쓰자 중앙 광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더 환호하라고.’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 나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면.
더욱 타격이 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암 요제프 라데츠키 폰 요크샤 공작!”
“예! 폐하!”
“경은 나를 받들어 이 제국을 부유하고, 강하며, 평화롭고, 공정하게 준비가 됐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경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폐하!”
루카스가 호명할 때마다 귀족들이 한 명씩 나와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지루한 보여주기식 충성 서약 행렬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루카스가 제국을 더 번영시키기 위해서 국교를 정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녹스 교는 발리노르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교단! 우리 라 제국이 더 번영하기 위해서 앞으로 녹스 교를 국교로 삼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모두들 밤의 신을 찬양하십시오!
마나로 증폭된 루카스의 외침.
그 말을 듣는 순간 군중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니까.
“폐하께서 말씀 중이십니다! 모두 조용!”
기사들이 나서서 군중들을 통제해보려고 했지만, 한 번 시작된 파장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키아라님.”
“네?”
“슬슬 시작할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
“앗, 네!”
나와 함께 식당 옥상으로 올라온 키아라가 영창을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군중 속으로 스며든 고치우를 찾았다.
미리 약속해 둔 지점이 있었기에,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마침 고치우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상황.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치우가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준비됐어요.”
그 사이, 영창을 마친 키아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시작하죠.”
작전명 악마 소환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꺅! 뭐야!”
“마법진! 여기 마법진이 형성됐다!”
고치우 주변으로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마법진이란 것 자체가 관중들에겐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로 표현하자면 폭탄이 설치된 거나 마찬가지랄까.
그 바람에 안 그래도 통제가 되지 않고 있던 관중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마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폐하를 지켜라!”
“저 마법진을 형성한 마법사를 찾아! 어서!”
군중들을 통제하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마법진을 향해 달려오고, 단상 위에 있던 소드 마스터들이 루카스를 에워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헉, 하, 하늘이!”
“이럴 수가!”
마법진을 피해 달아나던 사람들.
마법사를 색출하기 위해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와 기사.
단상 위에서 경계를 하던 귀족들과 소드 마스터 들까지 모두.
하늘을 바라봤다.
‘제대로인데?’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할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화창한 하늘이.
순식간에 짙은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었다.
단숨에 주변이 어둑해졌다.
그때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여유롭게 서 있던 고치우가 마나를 실어 웃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그 바람에 중앙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치우로 쏠리는 순간!
“다녀오겠습니다.”
“화이팅!”
띠링!
[플레이어 ‘고치우’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한순간에 뒤바뀌고.
날 바라보는 수천, 아니 수만 쌍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마나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자, 몸속에 피어난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화륵! 화르르르륵!
띠링!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내 주위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거기에.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짙은 살기까지 뿌려주자, 내게 달려오던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멈칫할 정도였다.
‘100만 골드를 쓰길 잘했군.’
당사자인 나도 섬뜩할 정도의 분위기.
아마 군중들의 눈에는 마법진이 펼쳐지고, 지옥문이 열리며, 지옥의 겁화와 함께 등장한 악마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악마다!”
“꺄아아아아악!”
“악마가 소환됐다!”
나는 주변에 있는 군중들을 한번 싹- 훑어본 후, 단상 위를 쳐다봤다.
그곳엔 당황한 표정의 황제, 루카스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기왕 쇼를 펼치기로 한 거, 제대로 해 주지.’
나는 그대로 벽력섬전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나는 중급 악마, 헬리퍼. 부름을 받고 왔다,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황제여.”
“무, 뭐?”
“그럼, 계약에 따라.”
그리고는 당황하는 루카스를 향해.
“라 제국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대가로 가져가겠다.”
싱긋 웃어주었다.
< 88화. 혁명(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