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로세움의 회귀자-87화 (87/205)

< 87화. 혁명(3) >

악마 역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이득 볼 게 없었다.

어차피 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은 이상, 대량 학살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악마 역할을 받나, 안 받나 피의 흡수로 올라가는 스텟의 양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악마 역할은 기각.

“음. 렌님이 싫다면 어쩔 수 없죠.”

키아라의 실망 섞인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얘기한 거였어.’

진짜로 내가 악마 역할을 하길 바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전에 악마를 죽이고 온 사람에게 악마 역할을 하라니.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중급신 ‘카론’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악마가 되어 라 제국을 멸망시키기.

[보상 : 10,000 P]

[고신 ‘이켈로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재미있을 거 같은데 악마 역할 한번 해봐라 ㅋㅋㅋㅋ

하면 내가 넉넉하게 용돈 줄게 ㅋㅋㅋㅋ

[보상 : 10,000 P]

[하급신 ‘벤테시키메’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이거 각이닼ㅋㅋㅋㅋ 악마 ㄱㄱ 안 하면 님 악플 ㅅㄱ

[보상 : 2,000P]

[대신 ‘헤카테’님이 서브 미션을 ······.]

[중급신 ‘메노이티오스’님이 ······.]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하는 서브 미션들.

너무 빨리 내려가서 보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건은 딱 하나.

악마로 분장해서 상황극을 할 것.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한 번 찾아보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서브 미션들이 쏟아졌다.

그 광경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거부하는 것 자체가 큰 리스크일 정도였다.

“······그래도 없다면 제가 악마 역할을 하겠습니다.”

다른 파티원들도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파티원들에게까지 서브 미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조건은 안 봐도 뻔했다.

뭐, 내가 악마 역할을 수락하도록 만들라는 거겠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키아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좋은 방법이 있어도 하셔야겠는데요?”

“······.”

젠장.

나는 어쩔 수 없이.

‘서브 미션 일괄 수락.’

악마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띠링!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내용 : 악마 상황극을 펼쳐 <혁명> 미션 수행하기.

[보상 : 174,000 P]

‘고작 이런 걸로 17만 포인트나 준다고?’

보상 포인트를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서브 미션이 들어왔기에 어느 정도 포인트가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보상을 보자마자 동기 부여가 확실하게 차올랐다.

“마침 악마가 등장하기 좋은 아니, 악마 상황극을 펼치기 좋은 날이 있습니다.”

그때, 가렌 남작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게 언제인가요?”

“1황자 전하의 즉위식입니다. 앞으로 15일 후에 열린다고 공문이 내려왔었습니다.”

“이제는 전하라고 부르시면 안 돼요. 가렌 남작님을 죽이려 한 상대인데.”

“아, 예. 습관이 돼서 그만. 아무튼, 1황자의 즉위식이 열릴 겁니다. 그때는 어떠신지······?”

“즉위식이라면 제국의 전역에서 국민들이 몰려오겠군요. 악마 소환 작전을 펼치기 딱 좋네요.”

키아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였다.

즉위식이라면, 엄청 커다란 이벤트가 될 게 분명했다.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일 테니까.

마침 날짜도 적당하게 남았고.

“그럼 사전 준비를 시작해 보도록 하죠.”

그때부터 작전명 악마 소환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국 북부에 있는 도시, 노아.

중심부에 있는 골목길에서 나는 고치우, 그리고 한 중년인과 함께 있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질베스터.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에, 가렌 남작이 그라센에 있는 극단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라며 추천해 준 중년인이었다.

고치우가 질베스터에게 미리 준비해 온 피를 덕지덕지 발라주는 사이, 나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핵심은 공포 섞인 표정과, 1황자. 그리고 악마라는 키워드입니다.”

“예, 옛!”

“고치우님이 타이밍 맞춰서 들어갈 거고, 저도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짧은 단막극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질베스터를 보자,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믿어도 되려나.’

이번 일은 디테일이 무척 중요했다.

관객들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이게 연기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계획을 처음부터 수정해야 할 정도로.

‘쯧. 믿어보는 수밖에.’

“다 됐습니다.”

“음. 굉장하군요.”

언제 어디서라도 위장을 하는 뛰어난 궁수답게, 고치우의 분장 실력은 무척 뛰어났다.

평범한 중년인이었던 질베스터가, 피를 흘리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이번 일은 두 분의 합이 무척 중요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침투 및 납치는 제 특기이기도 하거든요.”

“예,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에 질베스터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술집을 향했다.

고치우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더니, 조용히 이동했다.

그 둘을 뒤로하고, 나는 달빛을 맞으며 근처 건물 천장으로 숨어들었다.

“이봐, 드레이코. 자네 저번에 에덴으로 상행 나갔다 왔다 하지 않았나?”

“크윽. 나쁜 년. 날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 잘 먹고 잘 살아라!”

“요즘 일 하는데 집중이 안 돼서 미치겠다니까. 자넨 안 그런가?”

취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술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아래를 내려보니, 마침 질베스터가 술집으로 헐레벌떡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연극.

“사, 살려주시오! 누가 날 쫓아오고 있소!”

“······!”

피범벅이 된 질베스터의 모습에, 직전까지만 해도 시장통을 연상케 하던 술집으로 싸늘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이곳은 괜히 누군가의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간 칼 맞기 십상인 세상.

도와주고자 나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눈알을 굴리며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신지?”

보다 못한 술집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이때다 싶었던 질베스터가 준비했던 대사를 쳤다.

“1황자가, 1황자가 악마를 소환······!”

와장창창창!

그와 동시에 검은 로브와 복면을 쓴 고치우가 술집 창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헉. 저, 저놈이오! 제발! 제발 누가 나를 구해······!”

‘제법인데?’

사색이 된 채 고치우를 손가락질하는 질베스터와.

그런 그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쳐 기절시킨 뒤 질베스터를 들쳐메는 고치우.

그리고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완벽한 한 편의 납치극을 보는 것 같았다.

고치우가 살기를 내뿜으며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노려보더니, 이내 입을 다물으라는 제스쳐를 취하곤 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술집에 웅크린 침묵은 고치우가 빠져나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됐어.’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들어선 안 되는 것이라도 들었다는 표정.

피범벅이 된 질베스터.

살기를 내뿜는 검은 로브의 괴인.

그리고 1황자와 악마라는 자극적 키워드까지.

‘제대로 소문이 나겠군.’

아주 은밀하면서도.

조용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애초에 1황자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것 자체가 양지에서 뻗어나갈 수 없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확 퍼지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물 밑에서 올라오는 소문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이보다 더 추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살이 붙어서 퍼져나가리라.

“렌님. 다녀왔습니다.”

그때, 내가 있는 지붕 위로, 질베스터를 들쳐멘 고치우가 나타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찮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떠셨습니까?”

고치우의 물음에 나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다 알고 보는 건데도, 섬뜩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자 고치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는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나는 기절한 척했던 질베스터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질베스터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였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내 칭찬에 질베스터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로 노아는 끝이군.’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이제 이런 식으로.

동쪽의 라스그리드와 서쪽의 베라.

그리고 남쪽의 네오발란스까지 진행하면 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그때부터 우리는 각 지역의 대도시들을 돌며, 소문을 퍼트리는 데 집중했다.

* * *

“폐하. 요즘 제국 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소문이라면?”

1황자 아니, 곧 황제가 될 루카스의 물음에 근위대장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추악한 소문이었습니다.”

근위대장의 말에 루카스가 검지로 팔걸이를 톡, 톡 두드렸다.

“그런데도 말을 꺼냈다는 건, 결국 내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 아닙니까. 편하게 말해 보시죠.”

“죄송합니다, 폐하.”

그때부터 근위대장이 제국에 나돌고 있는 소문들을 읊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악마를 소환한다는 내용부터.

이미 잡아먹히고, 악마가 루카스의 탈을 쓴 채 황제 행세를 하려고 한다는 것까지.

무려 수십 개가 넘는 내용들이 근위대장의 입에서 나왔다.

그동안에도 루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근처에 있던 귀족들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젠장. 큰일 났군.’

‘그러게 얘기하지 말자니까.’

계속해서 검지로 두드리는 저 행동은.

루카스가 굉장히 기분 나쁠 때 하는 버릇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카스는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모두 나가보시죠.”

“예, 폐하.”

함께 있던 10명의 귀족들이 나가고, 이윽고 거대한 황제의 집무실에는 침묵이 어렸다.

그때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로 아스터 경.”

루카스가 혼잣말을 하자, 아무도 없던 집무실에 검은 연기가 피워 오르더니, 이내 그곳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한 노인이 나타났다.

루카스는 그 노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나와 조로 아스터 경밖에 모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근데 제가 얘기하지 않았으니, 결국 조로 아스터 경이 발설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껄껄. 안심하시오, 황제여.”

“지금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닙니다.”

“보자······. 소문이 총 스무 개 정도 됐던 것 같군요. 제가 퍼트렸다면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소문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3황자의 잔존 세력들이 황제를 음해하기 위해 퍼트린 소문 같소만.”

괴인의 말에 루카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편이 훨씬 더 가능성 있겠군요.”

“황제를 그 자리로 올리기 위해 우리도 한 손을 보탰소. 이미 황제와 나는 한배를 탄 몸. 그런 소문을 뿌려봤자 손해 볼 것밖에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소문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굳이 처리할 것 없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엔 마기가 서려 있었다.

“어차피 소문이란 실체가 없으면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니.”

* * *

소문을 퍼트리고 난 이후, 우리가 한 일은 연출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니까. 시각적 효과를 주고 싶다는 거죠?”

“맞습니다. 흔히들 하는 생각 있지 않습니까. 악마가 등장할 때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불꽃이 사방을 휩쓸고.”

“으음.”

“지금 계획처럼 단순히 등장해서 학살한다? 그게 연쇄 살인마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 말에 키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하죠. 그럼 생각하고 있는 효과가 그 두 개뿐이신 거예요?”

“예. 가능하겠습니까?”

“마법진이랑 정령석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긴 해요. 근데 문제는 돈이죠.”

“얼마나 필요합니까?”

“음······. 마법진에 뿌릴 미스릴 가루랑, 정령석이······ 못해도 50만 골드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최소 50만 골드라······.

고작 먹구름 좀 뿌리고, 불꽃이 일렁이게 하는 데 필요한 돈 치고는 무척 거금이었다.

‘그래도 투자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단 말이지.’

제법 큰 돈이었지만, 나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에덴에서 3천만 골드라는 거금까지 챙긴 상황.

거기에 이번 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서브 미션 보상으로만 17만 포인트가 들어온다.

그렇게 생각하니, 50만 골드를 투자해 연출에 공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 50만 골드는 제가 부담하죠. 아니, 100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기왕 할 거, 최대한 성대하게 진행해 보는 게 좋겠군요.”

“성대하게요?”

“예. 그날의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라, 바로 제가 돼야 하니까요.”

즉위식까지 남은 날짜는 1주일.

시간도 넉넉하고 자금도 충분한 상황.

기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 87화. 혁명(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