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혁명(2) >
―안우정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포 경찰서 수사과, 지능범죄 수사팀의 송진우 경사입니다.
마포 경찰서 수사과?
송진우 경사?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안우정씨의 동생, 안우진씨가 주가 조작으로 인한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 그리고 배임과 횡령 혐의로 현재 마포 경찰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형사의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내 동생이 주가 조작? 배임, 횡령?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아닌가요? 제 동생은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적법한 과정에 따라 체포 영장까지 발부된 상태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안우진씨한테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마포 경찰서로 오시면 30분간 면회할 수 있습니다.
영장······?
그러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안우정은 서둘러 지갑과 외투만을 챙긴 채 택시를 잡았다.
‘우진이가······ 주가 조작을 했다고?’
경찰서로 향하는 내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약 20분간을 달려 도착하게 된 마포 경찰서.
곧장 민원실에 달려가 신분증을 보여주며, 동생의 면회 신청부터 했다.
그러자 경찰관 한 명이 다가오더니, 안우정을 어느 쇠문이 달린 방 안으로 안내했다.
‘제발······.’
핸드폰도 들고 들어갈 수 없는 철통같은 보안에 안우정은 저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우리 우진이가 정말로 범죄를 저지른 거면 어떡하지?
어머니한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동생이 경영하는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수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혀, 형······.”
면회실의 강화 유리 너머로.
수갑을 찬 동생 채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뭐, 뭐야!’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애검인 레바테인부터 꺼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노리며 달려드는 적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동그란 공터.
그 위로 처져 있는 반투명한 파란색 막과, 그 너머에 펼쳐진 은하수들.
‘경기가 끝난 거였어.’
상황 판단을 마친 안우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정님.”
“이번 경기도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지. 수고했다.”
자신을 반겨주는 팀의 동료들과 천사들.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는.
팜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 경기도 정말 쉽지 않았어.
“어? 우정님. 왜 눈물을 흘리고 계세요?”
그때, 자신을 반겨주는 동료의 말에 안우정은 급히 가면을 쓸었다.
그러자 가면 아래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
깨어나기 전에 봤던 동생의 얼굴 때문이었나.
‘그러고 보니, 동생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에 안우정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악몽을 좀 꿨거든요.”
“악몽이요?”
“네.”
정말 오랜만에 꾼.
동생의 꿈.
“전 이만 가서 쉬어야겠네요.”
“네, 이따 파티 시작할 때 불러드릴게요.”
안우정은 활짝 웃으며 숙소로 향했다.
등을 돌리는 그의 입매가 차갑게 굳어졌다.
레바테인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형이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게.’
어떻게든.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고 말겠어.
* * *
서걱!
적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거침없이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이젠 뚫겠다고 마음 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창을 휘두르면, 그곳에 길이 생길 뿐.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적 군세를 반으로 가르며 나아가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한 명의 기사가 보였다.
‘여기에도 소드 마스터가 있었군.’
과연 4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발리노르.
전술 병기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악마의 눈으로 확인하니, 스텟도 제법 준수했다.
그래도 뭐, 별로 긴장되진 않았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많이 강해졌으니까.
파바박!
기사가 근처까지 다가오더니, 돌연 대쉬를 멈추고 내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제법이네.’
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었다.
“저는 라 제국의 백작, 일리아스 칼리오스 폰 베라 입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
“제 견문이 짧아, 귀하 같은 강자를 알아보지 못했네요.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학살하고 다녔음에도, 일리아스는 함부로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음, 밝히기 싫다면 저도 여쭙지 않겠습니다. 그럼, 왜 저희를 공격하는 건지만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저희가 그라센을 공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공격을 멈추고 돌아가겠습니다.”
일리아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겠는데.’
상황 판단이 빠른 녀석이었다.
한눈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알아채고,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라 제국을 멸망시켜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 녀석은 살려두면 안 되는 1순위 인물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변수를 만들어내곤 하니까.
마음을 먹은 나는 곧장 일리아스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챙! 챙! 콰지지지직!
“크윽! 이유라도 말해 주시오! 어째서 이러시는 것인지!”
일리아스가 방패를 이용해 내 공격을 최대한 흘려내며 소리쳤다.
뇌전이 내부로 파고들어, 제법 통증이 심할 텐데도 녀석의 움직임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잘 막고 있긴 한데,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스텟, 테크닉, 체력, 그리고 현재 상황까지.
그 무엇도 녀석이 유리한 게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녀석이 날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콰직!
전혀 없었다.
“이봐 병사! 어서 맹스크 자작에게 전령을 보내라고 전해! 제국의 검들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 달라고!”
“아, 알겠습니다!”
제국의 검이라면, 라 제국 소속의 소드 마스터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녀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향한다면 제법 골치 아플 수 있긴 한데.
하지만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렇겐 안 될걸.’
어차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푹푹푹푹푹!
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마력장 끄트머리에서, 고치우의 화살이 막 전장을 이탈하려는 세 명의 기병을 꿰뚫었다.
전령으로 나서던 병사들이었다.
“젠장, 젠장!”
내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본 일리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세 사람도 나 못지않은 고수인 걸 깨달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챙! 콰직! 채챙! 챙! 콰지직!
‘슬슬 끝이군.’
계속해서 공격을 흘려내던 일리아스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빠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뇌전으로 인해 데미지를 많이 입은 상태에서, 체력까지 부족하다 보니,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전력을 다했기에 겨우겨우 내 공격에서 버틸 수 있었던 상황.
그런데 움직임이 느려졌다면?
서걱!
“크윽!”
더 이상 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휘두른 창에, 일리아스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젠장······. 쿨럭. 이만 한 실력자가 도대체 어디서······?”
방패에 몸을 의지한 채 한쪽 무릎을 꿇은 일리아스가 피를 토하며 읊조렸다.
녀석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이마에선 피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으아아악! 도망쳐!”
내가 일리아스를 상대하는 사이, 많던 적 병력들도 다른 파티원들에 의해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온 땅을 가득 메운 시체 더미 사이에서 간간이 살아남은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푹! 푹! 푹!
그들도 결국 얼마 못 가 고치우의 화살에 차가운 땅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이제 남은 건.
일리아스 하나 뿐.
‘잘 가라.’
이 전장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있는 그 기사에게.
나는 망설임 없이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서걱!
비통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을 구르는 머리.
그 뒤쪽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테루오미와, 키아라, 고치우가 보였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상승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오른다고?’
앞으로 더 확인을 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죽이는 상대의 스텟에 따라 오르는 양이 다른 모양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예. 세 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쨌든.
전투도 끝났겠다, 우리는 여유롭게 그라센 쪽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그라센 측의 병사들은 모두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저, 저 악마가 다가옵니다, 남작님!”
“으으······ 다, 다 죽을 거야······.”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 벌벌 떠는 병사들.
그 사이로 하얀빛이 흘러나오는, 중갑을 착용한 인물이 보였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가렌 레온하르트 폰 그라센]
[근력 : 69(+?)] [민첩 : 67(+?)] [체력 : 68(+?)]
[정신 : 61(+?)] [지력 : 18(+?)] [마력 : 69(+?)]
‘저 사람이군.’
가렌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따로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덕분인지, 함부로 화살을 날리는 병사는 없었다.
성벽 아래까지 다가간 나는 가렌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가렌님.”
“······?”
“저흰 가렌님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신께서 보낸 전사들입니다.”
내 말에 가렌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든가, 그런 소리를 해대겠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해 들으면 고맙······.
“아, 악마가 아니셨소?”
“······?”
뭐라고?
키아라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해 준 덕분에, 우리는 가렌 남작 저택의 접객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여기 에베렛이라는 분이 있나요?”
“생명 신의 예배당을 관리하는 사제의 이름이 에베렛입니다만······.”
“아, 그럼 그분도 이 자리로 불러주시겠어요? 한 번에 설명하는 게 좋으니까요.”
키아라의 말에 남작이 병사를 보내는 사이, 나는 접객실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안티푸스에서 1만 병력을 물리치고, 곧바로 에덴으로 향해 악마를 처치한 다음, 교인들을 학살하고 다시 이곳까지 와서 또 전투를 치른 상황.
체력적으론 멀쩡했으나,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상당했다.
“남작님! 에베렛 사제님을 데려왔습니다!”
“오, 에베렛 사제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남작님. 저는 왜······?”
에베렛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사제였다.
그는 우리의 모습을 보곤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에베렛 사제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생명의 신께서 보낸 전사들입니다.”
그때부터 키아라가 가렌과 에베렛에게 미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황자의 배후에 현재 흑마법사가 있으며, 그걸 알고 생명의 신께서 우리들을 보내주었고, 그로 인해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신성 제국을 세울 계획이라는 것까지.
그 얘기를 들은 가렌 남작과 에베렛 사제의 반응은.
“아······. 예에.”
“그렇······군요?”
무척 벙찐 표정이었다.
하긴.
고작 네 명이 찾아와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황제와 교황으로 만들어줄 거라는데, 그 누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아, 그런 눈초리로 보지 마세요. 명령을 듣고 온 저희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니까요.”
“크흠, 아닙니다. 그, 키아라 전사님? 신성 제국은 어떻게 건설하실 생각이신지······.”
가렌 남작의 물음에 키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안타레스로 가서 황제와 흑마법사를 죽일 생각이에요. 일단 하나씩 순서대로 해 나가 보려구요.”
“아······ 예.”
“······.”
그렇게 한동안 접객실에 침묵이 흘렀다.
가렌과 에베렛은 할 말이 궁해서.
그리고 키아라와 파티원들은 그 뒤에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렌님, 이건 어때요?”
“······?”
“종교는 신념의 문제라, 라 제국을 멸망시킬 순 있어도 신성 제국을 만드는 건 어려울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거구요. 조건에서도 나와 있었잖아요. 전 제국민의 60% 이상이 생명의 교단을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긴 하죠.”
“황제와 흑마법사를 죽인다고 치자고요. 그럼 이제 막 즉위한 황제에게 후계자가 있을 리도 없을 거고. 다른 황자들은 이번에 다 죽었잖아요. 그럼 결국 각 지역의 대귀족들이 왕을 참칭하며 나서지 않겠어요?”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으로 봐도, 황족들이 모조리 죽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혁명 미션을 위해서 그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황제를 먼저 죽이지 말고, 일단 생명의 교단부터 띄우죠. 거의 모든 인간들이 믿는 종교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면 되죠. 지상에 소환된 악마. 그 악마가 라 제국을 불태우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하여 생명신께서 보낸 용사들이 그 악마를 처단하고 라 제국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황제를 죽이고, 가렌 남작님을 적당히 띄어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되면 훨씬 쉬워지긴 하겠지만.
전제 조건이 필요했으니까.
“저희가 악마를 무슨 수로 소환합니까?”
“그럴 필요 없이 지금 있는 악마를 써먹으면 되잖아요.”
“악마가 있다고요?”
내 물음에 키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뭐랄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렌님이 악마 역할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니까 지금.
상황극을 하자는 뜻인 거 같은데.
그게 지금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그냥 척 보기에도······ 악마 같으시니까······.”
키아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가렌과 에베렛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치미를 뚝 뗀 채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
어이가 없네.
“안 합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86화. 혁명(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