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닮은 두 사람(7) >
마계의 최하층.
왕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콜로세움 시스템에 강제로 접근하여 상위 리그 경기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안우진의 모습을.
그를 바라보는 왕의 자줏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반짝거렸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하던 왕이 옅은 미소를 피웠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 * *
―크흐흐. 아덴마하라는 힌트만으로 용케 알아차렸군.
악마가 씨익 웃자,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녀석의 이빨이 보였다.
붉은색 눈동자와 머리 위에 작게 솟은 뿔.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는 손톱.
250cm는 나갈 것 같은 거대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몸까지.
‘녀석이······ 레기아라고?’
도저히 레기아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의 모습은 기괴해져 있었다.
향수도 뿌리고, 자신의 외모에 과하게 신경 쓰던 녀석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
‘어떻게 된 일이지?’
녀석은 분명 내 손에 죽었다.
목이 꿰뚫린 채로.
그때 당시 피의 회복 메시지까지 떴으니,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죽으면······. 사후 세계나 콜로세움, 둘 중 하나로 가는 게 아니었나?’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었을 당시, 시스템은 분명.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녀석이 마계에서 왔다는 뜻.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마디를 툭, 뱉었다.
“마계는 지낼만한 모양이군. 이전보다 살이 찐 걸 보니.”
―후후, 내가 마계로 갔다는 걸 알고 있었군. 그래서 단번에 알아본 거였어.
‘죽으면 마계로 갈 수도 있는 거였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후후, 천계에서 광대놀음이나 하는 네 놈들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 우리는 신께 맹종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부여받게 되니까.
“그런 것 치고는 별로 강한 것 같지 않은데.”
그러자 악마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웃었다.
―크흐흐흐. 죽기 직전에도 과연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나야말로 녀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과연 죽기 직전에도 그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자고.’
녀석의 대화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마계엔 콜로세움 같은 시스템이 없다는 것.
광대놀음이나 한다는 의미는 아마,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뛰는 우리를 향한 비아냥일 것이다.
그리고.
‘신이란 존재가 인위적으로 힘을 부여해주는 모양인데.’
어떤 메커니즘으로 힘을 부여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원이 풍부하다면 얼마든지 고위급이든 초월급이든 찍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좀 부럽네.
‘좋은 정보를 얻었어.’
뭐 어쨌든.
앞으로 계속해서 악마들과 만나 싸우게 될 내게 있어서, 이건 정말 귀중한 정보였다.
이걸로 녀석에게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이제는, 녀석을 죽일 일만이 남았다.
―간절하게 바라왔던 녀석을 만나니,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자,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 번 볼까.
악마도 마침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듯 양 손톱에 시꺼먼 마기가 모여들었다.
‘맞상대하는 건 안 돼. 일단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일 때까지 시간 끌기부터!’
쐐애애애애애애애액!
채앵! 챙! 채채챙! 챙!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악마가 손톱을 휘두르며 나를 밀어붙였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나보다 스텟이 높기에, 공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무거웠다.
혼자서 상대하기엔 벅찰 정도.
하지만.
‘별거 아니군.’
이곳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테루오미, 에밋, 고치우와 키아라까지.
내가 악마와 격돌하기 시작하자, 네 명의 상위 플레이어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피의 강화 특전의 유지 시간도 넉넉한 상황.
파티원들과 함께 진형을 짜고 녀석을 상대한다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1:31:44]
“렌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홀로 녀석을 상대하느라 고생하셨소!”
때마침 병사들을 처리하고, 합류하는 파티원들.
테루오미와 에밋이 악마를 에워싸며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덕분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가 보냈던 하위 플레이어들은?”
“제가 성 밖까지 무사히 내보냈어요.”
“감사합니다, 키아라님. 그럼 두 분께 적 병사들을 맡기겠습니다.”
키아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나는 다시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챙! 채챙! 챙!
공격을 넣겠다는 생각은 버린다.
지금은 철저하게 서포트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협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테루오미와 에밋의 공격만으로도 충분해.’
욕심부리지 않는 것.
내가 가세하자마자 우리 세 사람의 협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필요할 때마다 뒤로 빠졌고.
혹시나 두 사람에게 위험한 순간이 있다면 커버했으며.
공격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도록 공간을 잘랐다.
‘당황하고 있군.’
초감각은 내가 빠져야 할 타이밍과 들어가야 할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핑! 핑! 핑! 핑! 핑! 핑! 핑!
고치우의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를 공격한 건 아니었다.
그저.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내가 피할 걸 예상하고, 가장 치명적인 부분에만 화살을 쏜 것일 뿐.
―크윽!
내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탓에, 악마는 고치우가 쏜 화살들을 하나도 피할 수 없었다.
팔뚝과 허벅지, 어깨까지.
곳곳에 화살이 박히며 몸을 휘청했다.
콰과과과과과광!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키아라의 물 속성 마법.
‘제법인데.’
오늘 처음으로 합을 맞춘 사이임에도, 상위 플레이어들답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순간 테루오미가 잔상을 남기며 바람처럼 악마를 향해 쇄도했다.
“내가 마무리하겠소!”
그가 악마를 향해 검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서걱!
악마가 발버둥 치며 휘두른 손톱에 테루오미의 가슴이 베였다.
뭐, 상처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냥 생채기 정도였달까.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악마의 다음 행동이 이상했다.
손톱에 옅게 묻어난 피를 혓바닥으로 핥은 것이다.
그것도 테루오미가 공격을 퍼붓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뭔가 있어.’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까.
나는 곧장 파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뒤로 빠지······.”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액!
악마가 잔상을 남기며 바람처럼 내게 달려들어 손톱을 휘둘렀다.
‘방금 전에 쓴 테루오미 스킬!’
서걱!
워낙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공격이기에, 나 또한 악마의 손톱에 팔뚝을 베이고 말았다.
“······!”
“······!”
챙! 채챙! 챙!
다른 파티원들이 빠르게 나를 커버했기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크흐흐, 맛있군.
손톱에 맺힌 내 피를 핥는 악마.
그 모습에 테루오미와 에밋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다.
방금 악마가 사용한 게 테루오미의 스킬이라는 것과.
―후후, 능력이 아주 좋구나.
핏방울을 먹는 녀석의 행위가 무슨 관련이 있음을.
‘스킬을 복제하는 건가?’
이후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녀석의 스텟은 그대로였다.
악마의 눈으로도 녀석의 스텟창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고.
각성 능력을 가져갔는지는 조금 더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서 가능한 추론은 핏방울을 먹음으로써 타인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콰지지지지지지직!
‘씨발.’
악마의 몸에서 붉은색 뇌전이 흘러나왔다.
녀석이 내 스킬을 그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핏방울을 마시고 나서 테루오미와 에밋이 근접전을 펼쳤어.’
둘 중 한 명에게 그림자 표식이 등록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테루오미와 에밋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 경기가 끝나면 헤어져, 언제 다시 적으로 만날지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어떤 스킬을 보유 중인지 공유할 수도 없는 노릇.
테루오미도 같은 이유로 본인의 스킬들을 얘기해주지 않고 있었고, 다른 파티원들도 그 이유를 알기 때문에 나와 테루오미에게 무슨 스킬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긴장감만이 높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크흐흐, 갑자기 왜 그런 표정들을 짓고 있지? 푸흡.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냐? 자, 방금 전처럼 또 달려들어 보거라, 크하하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악마의 비웃음에 반응할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리고 다른 파티원들은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 모르기에.
―그럼 다시 한번 놀아보자꾸나!
악마가 붉은 뇌전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이대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그때부터 다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들 움직임이 한층 신중해졌달까.
챙! 채채챙! 챙!
녀석의 손톱과 부딪히자 뇌전의 데미지로 인해 팔이 저릿저릿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키아라의 마법이 녀석을 직격했지만, 이전과 달리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신하고 싸웠을 때의 느낌을 또 받게 될 줄이야.’
마력 상쇄 스킬 덕분이었다.
고작 스킬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녀석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그때였다.
“조, 조심!”
손톱을 휘두르던 악마가 갑자기 에밋의 앞에 나타났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에밋은 피할 수 없었다.
푹!
“에밋님!”
키아라의 외침에도, 에밋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장을 관통당하며 즉사한 것이다.
―후후, 이 녀석은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악마가 에밋의 피를 핥는 사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 표식은 범용성이 뛰어난 고급 스킬.
그걸 사용하는 순간, 내가 녀석에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멍청한 자식.’
그 고급 스킬을 고작 한 명 죽이겠다고 사용하다니.
나였으면 타이밍을 봐서 못 해도 두 명 이상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사용했을 텐데.
거기다 한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이 가져간 것은 스킬뿐.
초감각 같은 각성 능력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테크닉이 그대로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콰지지지지지직!
세 명의 스킬을 흡수한 악마가 이제는 고치우와 키아라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어딜!’
나는 경로를 끊으며 녀석에게 곧장 창을 휘둘렀다.
에밋과 테루오미가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적어도 그림자 표식급의 사기 스킬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플레이어들과 싸울 때도 녀석들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싸우는 건 똑같아.’
콰지지지지지지직! 퍼펑! 펑!
내 뇌전과 녀석의 뇌전이 창날과 손톱에서 부딪히며 격하게 터져 나갔다.
‘아이템 효과는 복사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녀석의 뇌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는 뇌신과 벽력섬전으로 인해 완전히 새빨간 뇌전이.
악마에게선 뇌신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 나오는 연붉은 뇌전이 흘러나왔으니까.
만약 녀석이 아이템 효과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지.’
바로 도망쳐야 한다.
그만큼 블라디미르 가면의 효과는 사기적이었으니까.
“테루오미님이 적 병력들을 막아주시고, 키아라님이랑 고치우님은 제 엄호를!”
“알겠소!”
“알겠어요!”
초감각이 있는 나와 달리, 테루오미는 갑작스러운 스킬 연타에 반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원거리 딜러인 키아라와 고치우가 날 엄호하고, 테루오미가 적 병력을 막는 게 나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루오미가 후방으로 달려가고, 병사들을 향했던 마법과 화살들이 방향을 틀어 악마에게 향했다.
핑! 핑! 핑! 핑! 핑!
나와 악마를 향해 날아드는 무수한 화살과 마법들.
콰과과과과광!
하지만 그 무엇도 악마와의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크윽! 너에게 그런 스킬은 없을 텐데!
초감각과 마력장으로 공간 전체를 읽어낼 수 있기에,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들을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야를 차단하고 있어, 내가 피한 직후에나 화살과 마법이 날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악마는.
푹! 푹! 푹! 푹! 푹!
그 공격들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벌써부터 저릿저릿하네.’
녀석도 천둥의 숨결을 켠 것인지, 근력과 민첩 스텟이 15% 상승해 있었다.
스텟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데도 내가 녀석의 길을 막아설 수 있는 이유는.
콰지지지지지지직! 후욱!
손톱과 창이라는 각자 무기의 리치 차이와.
슬쩍슬쩍 몸을 틀 때마다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 그리고 키아라의 마법 엄호 덕분이었다.
‘녀석에게 체력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는 바로 직전까지 병사들을 학살하고 왔기 때문에 아직까진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반면에 악마는 내가 오기 전부터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나와 테루오미, 에밋의 협공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방금 전부터는 천둥의 숨결을 사용하며 체력 소모가 두 배로 늘어난 상황.
체력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후, 내가 무섭더냐? 실력이 안 되니까 같잖은 짓을 하는구나.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내게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화살과 마법 폭격을 맞게 된 악마가 비아냥거렸다.
도발을 해서 어떻게든 전면전을 펼치고 싶은 거겠지.
제대로 싸우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내가 곁에서 계속 공격을 흘려내며 진로를 막자 나부터 처리하는 걸로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런 악마의 비웃음을 나는 그저 무시로 일관한 채 공격을 흘려내는 데 집중했다.
―놀아줬더니 기고만장 해가지고!
순간 악마의 근처에 마나로 이루어진 육각형 모양의 거대한 막이 생성되었다.
기사인 에밋이 가지고 있던 방어 스킬 중 하나인 모양.
통! 통! 통!
악마가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찔러 넣는 공격들이 막에 튕겨 나갔다.
그 틈에 악마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검붉은 손톱을 휘둘렀다.
‘어딜!’
방어 스킬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내게 그런 식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플레이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쥐새끼 같은 놈!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고 말겠다!
내가 빠르게 사각으로 움직이며, 직선으로 돌격해 오는 녀석을 벗겨내자, 악마가 으르렁거렸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엄습해오는 불안감.
뒷목이 쭈뼛쭈뼛해지며, 온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내 분신과 싸울 때 느꼈던······!’
쐐애애애애애애애액!
< 83화. 닮은 두 사람(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