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닮은 두 사람(4) >
*어제 2연참 했습니다.
혹시나 79화를 안 읽으신 독자분들은 79화부터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시점 변화 때문입니다.)
카이로시아는 안우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거만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묘하게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잠깐이지만 노예로서 살아보았던 카이로시아로서는, 위에서 내려보는 그 느낌이 너무 거슬렸다.
‘레이디에 대한 예의도 없고 말야.’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안우진은 의무적으로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평소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끊이질 않던 상황.
그런데 안우진은 그런 자신의 외모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부분이.
묘하게 카이로시아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카이로시아는 안우진의 그런 반응이 상위 플레이어라는 자부심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제가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그때부턴 제게 예의를 갖춰 대해주시겠어요?”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자극했지만, 안우진의 건조한 대답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흥. 내가 더 빨리 강해지면, 그땐 무슨 표정을 지을지 보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를 넘어서던 카이로시아가 순간 움찔했다.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숲속.
거기에도 가면을 쓰고,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다.
순간 안우진이라고 착각할 정도.
창 대신 길다란 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게 다르달까.
‘하. 이 인간이 제법 유명하단 말은 들었지만,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까지 있을 줄이야.’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안우진의 반응이 거슬렸던 상황.
그 모습에 카이로시아의 기분이 팍 상했다.
저런 식으로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는 사람의 실력쯤이야 안 봐도 훤했다.
분명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 위해 저런 위압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거겠지.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36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소환 저지(팀 PvP 스토리 미션)]
[게임명 : 어둠의 태동]
[맵 : 에덴(대)]
[관객 수 : 32,666 명]
[미션 : 어둠의 교단이 에덴의 성전에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악마 소환을 저지하세요.]
[승리 조건1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강림석을 파괴하라―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사살하라―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악마 소환 의식은 앞으로 48시간 안에 완료될 예정입니다. 제한 시간을 넘길 시 미션은 자동으로 실패 처리 됩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강림석’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제물’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에덴은 어둠의 교단이 세운 도시 국가입니다.]
[성의 주민들은 모두 어둠의 교단의 교민입니다.]
[악마 소환 저지까지 제한 시간 : 48:00:00]
미션 내용을 본 카이로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런 미션이 나오다니.
‘주민들이 모두 적이라는 소리랑 마찬가지잖아.’
자신의 스타일 특성상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몰살시키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잠입해서 무언가를 파괴하는 미션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민들을 모두 죽이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내부로의 잠입은 필수였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죠. 저는······.”
함께 들어온 기사를 시작으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그사이 카이로시아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들 장비가 좋네.’
네 경기 만에 컨텐더 자격을 획득하고 메인 이벤트에 참가한 자신과 달리, 모두들 경기를 많이 뛰어본 것 같았다.
실용성 있어 보이면서도, 각각의 장비들이 절제된 미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
누구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어두침침해 보이는, 딱 한 사람만 빼고.
그와 반면에.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으.’
안우진이 사준 검은색 로브와 검은색 장신구 세트.
아이템의 옵션은 무척 훌륭했지만, 아름다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검은색으로 사준 이유도 가관이었다.
눈에 안 띄어야 살 확률이 높다나 뭐라나.
‘빨리 포인트를 많이 벌어서 내 취향에 맞는 걸로 사야겠어.’
그렇게 한 명씩 자기소개가 이루어지고, 검은 로브 사내와 카이로시아만 남은 상황이었다.
“검객입니다. 룬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푸흡.”
닉네임까지 따라 했어?
하, 어이 없어.
검은 로브 사내의 닉네임을 들은 카이로시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둘러 손으로 입가를 가려 봤지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외모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아, 미안해요. 자기소개 중이신데 제가 너무 교양이 없었네요. 카이로시아 입니다. 마법사예요.”
“네임드!”
카이로시아가 자기소개를 하자,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의 명성이 어느새 하위 리그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은근한 눈길로 보내던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 이제는 경외가 서려 있었다.
카이로시아는 저 눈빛들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리딩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그때부터 경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제한 시간은 48시간.
미션 진행 전에 필요한 정보 수집과, 진입로 설정 및 탐색까지.
해야 할 게 무척 많았으니까.
“성 내부로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겠군요. 교단에 헌금을 내러 왔다고 하면 거의 들여보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악마 소환은 내성에 있는 교황청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외성은 그냥 진입하고, 내성부터는 잠입 혹은 돌파를 감행해야겠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런 숲속에서 쉬는 것보다, 차라리 일단 에덴으로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헌금을 내야 하는데, 모두들 골드를 일부 지출해 주셔야겠는데요?”
파티장의 말에 모두들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골드를 꺼냈다.
순간 카이로시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앗. 골드가 없는데······ 어떡하지?’
사실 안우진이 챙겨 준 골드가 있긴 했었다.
그 골드들로 안우진이 챙겨 준 검은색 완드 대신, 지금 들고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완드를 사는데 다 써버려서 문제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경기장 내에서는 <스텟 상점>과 <중개 거래소>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경기장 내에선 골드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다.
모든 포인트를 스텟 올리는 데에 투자하느라 남은 포인트도 얼마 없었기도 하고.
그래서 카이로시아가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팀의 가장 큰 전력이시니까, 제가 카이로시아님 몫까지 내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검은 로브 사내가 자신의 몫까지 골드를 지불해 준 것이다.
아마 자신의 난처한 몸짓을 보고선, 민망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먼저 선수를 쳐 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카이로시아가 가볍게 목례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도 그 인간보다는 더 인간미가 있네.’
곁에서 봐 온 안우진은 정말.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곁에서 누가 죽어가고 있어도 쳐다도 안 볼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훈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도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여유 시간이 생길 때면 마법 서적이라든가, 아니면 스텟 표를 꺼내놓고 분석하기 바쁜 인간이 안우진이었다.
무엇보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 보니, 인간성을 상실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됐을 정도랄까.
“오, 룬님. 이런 배려를 해주시다니. 하하,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좋네요. 왠지, 이번 경기는 잘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검은 로브 사내가 센스 있게 먼저 나서준 덕분에, 카이로시아에게 골드가 없다는 걸 눈치챈 파티원들은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골드를 좀 챙겨 다녀야겠어.’
카이로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미션.
헌금을 하겠다며 일정 골드를 지불하자, 경비병들은 몸수색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오, 정말 좋네요.”
시스템에서 도시 국가라고 소개한 것 답게, 에덴 성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분위기는 악마를 소환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고 활기찼다.
쓰레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길거리.
길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은 깔끔하고 단정해서 이곳이 제법 부유한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음.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군요. 이곳에서 악마 소환이 있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메인 이벤트에서 허튼 미션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일단 내부로 들어가 보죠.”
‘뭐야, 메인 이벤트라고 해도 별거 없는데?’
안우진이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내성으로의 진입이 큰 난관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곳에서도 자신들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교단에 헌금을 하러 온 김에 교황청을 보고 싶다고 하자 곧장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렇게 내부로 진입한 파티원들은 교황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저녁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보름달이 밝게 뜬 밤이 찾아왔다.
“발각되기 전까진 잠입을 기본 베이스로 움직이고, 적에게 발각되면 바로 전속력으로 움직일 거니까 체력 분배를 잘 부탁드립니다. 선두는 저와 룬님이, 중심부에 카이로시아님과 마법사님들이, 후방은 판석님이 부탁드립니다.”
에덴의 밤은 무척 고요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도시였달까.
“그럼.”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교황청밖에 없었고.
그 외의 집들은 모두 어두컴컴했다.
“돌입합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미션 진행이 시작되었다.
‘너무 상반되는 분위기라서 더 섬뜩해.’
푹! 푹!
교황청 입구를 지키고 있는 수비병들을 암살하고 내부로 향할수록 카이로시아의 마음속엔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이보다 활기찰 수 있을까 싶던 도시가, 마치 폐허가 된 유령 도시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청을 지키는 경비병의 숫자가 이렇게 적다고?’
카이로시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함정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자, 잠깐만요. 이거 함정인 거 같아요.”
“네, 저도 압니다.”
하지만 파티장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다른 파티원들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
“근데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
“함정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이는 거니까요. 애초에 메인 이벤트가 이렇게 쉬울 리 없으니.”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다른 방법이라······. 무슨 방법이 있죠?”
파티장의 물음에 카이로시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함정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
거기에 제한 시간이 24시간도 안 남았으니, 시간도 촉박하다.
결국, 이 상황에서 파티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부딪혀가며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일단 성전에 도착해서 강림석과 제물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맞네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네요.”
“아닙니다. 제가 충분히 설명해 드리고 시작하지 못했네요. 카이로시아님이 메인 이벤트 경기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걸 제가 간과했습니다. 그럼, 이해하신 걸로 알고 다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들어가야 한다라······.
카이로시아는 그 말이 못내 슬펐다.
자신들의 처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하지만 카이로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신들을 지옥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정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초월 리그에 반드시 올라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교황청의 중앙 로비까지 향했을 때였다.
“침입자다!”
“거룩한 신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이단이다!”
로비를 지키던 경계병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때부터 파티원들은 조용하고, 은밀하던 움직임을 탈피하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미션의 시작이었다.
【초록빛 하늘의 파노라마!】
【흩날려라, 열화의 꽃잎이여!】
선두에서 파티장과 검은 로브의 사내가 길을 뚫고, 그 중간중간마다 카이로시아의 옆에서 함께 달리던 마법사들이 지원 사격을 넣었다.
카이로시아는 지원 마법 대신,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일단 광역 마법으로 내부를 한바탕 휘저어 줘야겠어.’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제물로 쓰일 사람이든, 그를 지키는 사람이든 모두 죽여야 할 존재들.
한마디로, 성전 내부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여야 하기에, 광역 마법만큼 좋은 게 없었다.
“성전으로 돌입합니다!”
로비를 지나, 복도를 달리던 파티장이 이내 한쪽 벽에 달린 거대한 문을 밀치며 내부로 향했다.
그 뒤로 다른 파티원들이 기민하게 쫓아 들어갔다.
그래서 카이로시아도 모퉁이를 돌아 거대한 문 내부로 들어갈 때였다.
“······!”
“······!”
“······!”
성전 내부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흑기사들이 검을 빼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머리에 치솟은 작은 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거대한 육체를 가진.
‘왜, 악마가······!’
악마가 성전 가운데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긴급!]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미션 : 생존]
[상위 플레이어들이 잠시 후 에덴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생존하세요!]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1:00:00]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옥죄는 악랄한 마기가.
카이로시아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모두 뒤로!”
그와 동시에 귓가로 날아드는 파티장의 목소리.
순간 정신을 차린 카이로시아가 영창하던 마법을 그대로 시전했다.
【피에 잠긴 바람의 꽃잎!】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 80화. 닮은 두 사람(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