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닮은 두 사람(3) >
내 살기에 노출된 사람들이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예 전의를 상실한 모습.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엘프, 키아라가 입을 열었다.
“우린 신께서 보낸 전사들이에요. 3황자님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왔죠.”
“저, 정말 신께서 보낸 전사들이란 말이오? 날 황제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좋겠네요.”
“오, 빛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이쪽으로······.”
3황자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드리더니, 우리를 의자로 안내했다.
곁을 지키던 기사들은 서둘러 검을 집어넣곤 우리에게 예를 표했다.
신의 전사라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경계를 풀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란 뜻이리라.
“먼저 현재 상황부터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예!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키아라의 물음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상황은 진짜로 최악에 가까웠다.
황제가 죽고 1황자와 2황자, 3황자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내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최근에 2황자가 죽었고, 1황자가 황제에 등극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1황자의 병력은 20만. 거기다.
“······12명의 소드 마스터님들이 모두 1황자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저희는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술 병기라고 불리는 소드 마스터들까지 모두 1황자의 편에 섰다는 것은, 이미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지금 안티푸스의 바로 앞에는 한 명의 소드 마스터가 1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을 준비 중이었고.
한마디로 이들은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소.”
테루오미의 물음에 황자가 거대한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희가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형님, 아니 1황자는 여기. 수도인 안타레스에 있습니다. 신의 전사님들께서 1황자를 죽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황자를 죽여달라······.
어려운 미션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상위 리그 미션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3황자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
‘영향력도 별로 남지 않았고.’
이럴 때 1황자가 죽는다고 해서, 3황자가 황제에 오를 수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미션은 황제로 만들라고 했단 말이지.’
아마,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역할 분담을 하죠. 제가 1황자를 죽이고 오겠습니다.”
“렌님 혼자서 말이오?”
“예. 우리의 미션은 3황자님을 황제로 만드는 것 아닙니까. 결국 지금 여기 지도에 있는 모든 영토가 온전히 3황자님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제가 1황자를 죽이고 올 테니, 다른 분들은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얻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 말에 상위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어떡하죠?”
키아라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죽여야죠. 실력 행사를 했는데도 머리를 조아릴 마음이 없다면.”
“음. 좋네요. 렌님이 제일 위험한 역할을 해주겠다는데, 그럼 제가 여기. 남쪽 지방을 돌고 오겠습니다.”
가장 먼저 찬성한 건 궁수인 고치우였다.
그러자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그럼 북부를 돌겠소.”
“그럼 전 동쪽을 돌겠습니다.”
중앙은 내가.
동쪽은 고치우, 북쪽은 테루오미, 동쪽은 에밋이었다.
남은건.
“아, 그럼 제가 서쪽을 가야······.”
“아뇨. 키아라님은 3황자님을 지켜주셔야죠.”
“그럼 서쪽은 누가······?”
“마침 수도인 안타레스가 서쪽에 치우쳐져 있군요. 1황자를 죽이고. 서쪽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1황자를 죽이는 것도, 서쪽을 돌고 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내겐 그림자 표식이 있으니까.’
그러자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1황자를 죽이고 오는 것도 쉽지 않은 미션인데, 서쪽 귀족들까지 복속시키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제 임무가 제일 막중하겠네요.”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의 한쪽을 찍었다.
동북쪽 끝.
거기는 현재 우리가 있는.
안티푸스.
“일단 이 앞에 주둔했다는 1만의 병력과 소드 마스터를 제거해야겠죠.”
내 말에 파티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게 최우선이긴 하겠네요. 이것도 역할 분담이 필요한가요?”
키아라의 말에 모두들 피식 웃었다.
그들에게는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상위 플레이어라는 건.
한 명 한 명이 소드 마스터 이상의 실력자라는 것.
그들이 1만의 대군 앞에서 움츠러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깜깜한 밤하늘에서, 환한 보름달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3황자를 지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의 안내를 받아 성벽으로 오르니, 새까맣게 펼쳐져 있는 1만 명의 대군이 보였다.
적들은 안티푸스의 성벽과 고작 1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쳐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습을 감행하더라도 얼마든지 막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오히려 성문을 열고 별동대가 기습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바로 시작하죠.”
나는 망설임 없이 20미터의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이 몇 명이나 되든.
상관없었다.
내겐 블라디미르 가면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겠군요.”
에밋이 목을 좌우로 풀며 검과 방패를 점검했다.
“음. 약자를 죽이는 건 성미에 안 맞소만. 오늘은 어쩔 수 없군.”
테루오미는 길다란 카타나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저는 지휘관 위주로 저격하겠습니다.
활시위를 팅, 팅 소리가 나게 튕기며 고치우가 말했다.
“그럼.”
천둥의 숨결과 특전들을 켜고 마력을 끌어올리자.
온몸에서 뇌전이 흘러나왔다.
“시작하겠습니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내 말이 끝나는 걸 기점으로 모두들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적이다!”
“적의 습격이다!”
땡! 땡! 땡! 땡! 땡! 땡!
뿌- 뿌우-
적 진영과 500미터 정도를 남겨두자 종이 울리고, 뿔피리가 울렸다.
적들은 기민하게 무장을 한 채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안티푸스의 병력이 기습하길 기다리고 있었군.’
마침 우리가 게이트를 타고 이동했을 때, 3황자와 기사들도 기습을 논하고 있었다.
근데 이 정도의 반응속도라면,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녀석들이 무엇을 준비했든.
소드 마스터를 상회하는 4명의 상위 플레이어들을 막기엔 한없이 부족할 테니까.
‘일단 피의 강화 특전부터.’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꽈아아아아앙!
적 진영의 코앞에 도착한 나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벽력섬전이 한번 번뜩할 때마다, 병사들 서너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띠링!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앙!
섬광이 번뜩! 하더니, 하늘에서 수많은 벼락이 내 주위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악!”
“아, 악마!”
근처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학살은.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며 정점을 찍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벽력이 터지며 빛줄기가 하늘로 뿜어져 나가고, 청천벽력이 발동되며 수많은 벼락이 뿌려진다.
죽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내 몸으로 흡수되어 들어오는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이노오오옴!”
그때, 거대한 노호성을 지르며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노기사였는데, 느껴지는 마력이 상당했다.
‘녀석이 소드 마스터인가 보군.’
나는 곧장 악마의 눈을 켜고 녀석의 스텟을 확인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발렌티노 레무스 폰 클라이스트]
[근력 : 102(+?)] [민첩 : 100+(?)] [체력 : 103(+?)]
[정신 : 92(+?)] [지력 : 3(+?)] [마력 : 100(+?)]
[업적 특전 : 소드 마스터의 위용]
“바, 발렌티노 후작님이다!”
“우와아아아아! 적을 죽여라!”
발렌티노라는 소드 마스터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피식 웃었다.
하위 리그에서 만난 리암 수준의 스텟.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라.’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32(+59)(+5)] [민첩 : 136(+61)+(5)] [체력 : 126(+51)+(5)]
[정신 : 173(+69)+(5)] [지력 : 26(+10)] [마력 : 147(+59)+(5)]
기초 스텟이 마의 구간에 돌입하면서.
그에 비례해서 상승하는 스텟의 양도 엄청나게 오른 상황.
발렌티노가 가지고 있는 스텟의 총합보다.
240 포인트나 높은 내가 녀석에게 질 확률은.
서걱!
“커헉!”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 이럴 수가! 소드 마스터를 단숨에······!”
“이, 인간이 아니야······.”
“뇌, 뇌신이다! 뇌신이 강림했다!”
내가 단번에 발렌티노를 베어 버리자,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곤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력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녀석도 인간이다! 모두 포기하지 마라!”
“이놈! 무기를 들어라, 어서!”
곳곳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병사들을 독려하거나, 목을 치며 내게 싸울 것을 명했지만.
푹! 푹! 푹! 푹! 푹!
고치우의 화살이 정확하게 이마를 관통하며, 녀석들의 소란을 잠재워 주었다.
‘나쁘지 않군.’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해 보니, 다른 파티원들이 있는 곳도 다르지 않았다.
압도적인 살육에 모두들 무기를 버리며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이제는 서 있는 병사들보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고치우님. 포로들을 통제할 병사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별로 크게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고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치우가 지원 병력을 부르러 간 사이, 나는 저항하는 병사들을 처리했다.
서걱! 서걱! 서걱!
그러다 보니, 끝끝내 다른 파티원들과도 중앙에서 만나게 되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드 마스터까지 처리한다고 고생하셨소.”
“정말 대단하시군요. 하위 리그를 폭격하고 오셨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테루오미와 에밋은 무척 감탄한 표정이었다.
전투 중에도 내가 싸우는 모습을 간간이 관찰한 모양.
뭐, 벽력과 청천벽력 때문에 내가 싸우는 모습이 요란하긴 했지만.
그때였다.
띠링!
[서킷 브레이커 발동!]
[현재 진행되는 <킹 메이커> 미션이 일시 중단됩니다!]
순간 나는 눈앞에 뜬 상태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서킷 브레이커?
이게 뭐지?
지금까지 경기를 뛰면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에밋과 테루오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킹 메이커> 스토리 미션 팀은 지금 당장 에덴으로 이동하세요!]
[새로운 미션이 부여되었습니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2:00:00]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284,071 명]
눈앞에 뜬 새로운 미션.
‘악마······ 처단?’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에밋과 테루오미 뿐만 아니라, 안티푸스에 있던 키아라와 고치우도 성벽에서 뛰어내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2시간 안에 악마를 처치해야 하는 상황.
우리는 곧장 안티푸스의 바로 옆 도시인 에덴을 향해 달려갔다.
< 79화. 닮은 두 사람(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