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닮은 두 사람(2) >
아세리안의 하루 일정은 모두가 잠잘 때 시작해서, 모두가 잠든 이후에 끝이 난다.
플레이어들이 그날 소화할 훈련의 커리큘럼과 식사부터 시작해서 아이템과 스텟 분석표, 그리고 오퍼와 이론 수업까지.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런 아세리안이 최근에는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추가되었다.
바로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인 라파엘과 만나는 것.
“앗, 라파엘님! 잘 지내셨나요? 하급신으로 승격한 이후에는 처음 뵙는 것 같아요.”
“호오. 오랜만이군요, 아세리안님. 요즘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은요. 라파엘님이 보고 싶어서 왔죠!”
라파엘과 만나 그녀가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라파엘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
안 그래도 경기 청탁 같은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신들의 방문을 피하는 그녀를 아세리안이 만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휴우, 다행이야. 그래도 예전에 밑에서 일했다고 문전 박대는 안 하시네.’
이전에 그녀가 라파엘의 부하 직원으로 있었으니까.
라파엘은 아세리안이 천사였던 시절, 능력을 높이 사는 치천사 중 한 명이었다.
그때 라파엘이 워낙 자신을 이뻐했기에,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이리라.
거기다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공개적인 자리로만 가지기도 했고.
“······그래서 요즘 골치가 많이 아프군요.”
“어휴, 고생이 많으시겠죠.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는 라파엘님이 중간계의 조화와 평화를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아세라인님처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앗, 라파엘님. 예전처럼 그냥 아리엘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오.”
“여전히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아세리안님.”
아세리안의 애교에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눈빛에서도 이젠 경계심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까지! 여기서 더 들이대면 피차 불편해질 수도 있어.’
그렇게 라파엘에게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 아세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 참. 아세리안님 팀에 렌이라는 플레이어 있죠?”
“네? 네!”
라파엘의 입에서 렌이라는 이름이 먼저 흘러나온 것이다.
아세리안의 입장에서, 라파엘과 만날 때 렌이라는 닉네임은 금기어나 마찬가지.
잘못하면 청탁을 하려는 걸로 오해해서, 징벌적 제재에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라파엘의 호감을 사는 선에서 끝낼 계획이었던 아세리안은 그녀가 먼저 렌을 언급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최근에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봤어요. 정말 대단했더군요. 그리고 한 편으로는 좀 부럽네요.”
“뭐가요?”
“상위 리그에서는 그런 대규모 이벤트를 펼치기가 쉽지 않잖아요. 아무래도 지구 출신 플레이어가 없다 보니.”
“맞아요!”
아세리안은 라파엘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라파엘은 노회한 치천사.
그녀가 이렇게 안우진의 닉네임을 꺼냈다는 것이, 왠지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말인데. 최근에 렌이 상위 리그로 올라왔죠? 혹시 렌에게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면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 좀 물어봐 줄래요?”
“성계 대항전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요?”
듣는 순간 가슴 한켠이 싸했다.
참가할 의향이 있냐고?
설마······.
‘혼자서라도 참가해 달라는 뜻인 거야?’
그걸 받아 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무래도 라파엘이 너무 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아세리안은 호호, 웃으면서 물어보겠다고 즉답했다.
라파엘의 앞에서 싫은 티를 내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일단 안우진님께 먼저 여쭤보고, 아니라고 하면 내가 기회를 봐서 잘 말해봐야겠어.’
그렇게 라파엘과의 담소를 끝낸 아세리안은 곧장 팜으로 돌아와 안우진부터 찾았다.
그리고 꺼낸 성계 대항전.
“거절하겠습니다.”
역시나 안우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생각할 가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지구는 최강의 성계라는 +10% 특전을 획득한 상황.
이 이상의 특전을 줄 건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무리해서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님. 그······ 아무래도 혼자서 성계 대항전 참가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제 막 올라온 신입생에게 혼자서 다른 성계 전체랑 싸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니······.”
“아세리안님. 고위 리그는 여전히 플레이어의 숫자가 부족한 거 아시죠?”
“네에······.”
“신들에게 포인트를 벌어, 상위 플레이어들을 성장시키려면 성계 대항전은 필수에요. 우리는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 아닙니까. 솔직히 섭섭하군요.”
“그래도 렌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라파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흐음.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충분히 가능성 있을 만큼 큰 메리트를 줄게요.”
그럼에도 라파엘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죽했으면 메리트라는 얘기까지 들먹이며 얘기할 정도였다.
물론 그런 얄팍한 수에 당할 아세리안이 아니었다.
“메리트요? 형평성 문제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아마 이 부분은 다른 신들도 납득할 거예요. 혼자서 다른 성계 전체랑 싸우는 건데, 당연히 괜찮죠.”
“어떤 메리트를······?”
“호호, 아쉽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마디로 성계 대항전이 직접 열린 이후에나 알 수 있다는 뜻.
결국 아세리안은 원치 않음에도 안우진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성계 대항전 내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를 달라고.”
그런데 안우진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당연히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뭔가 방법이 있으신 게 분명해.’
안 그래도 라파엘과 계속해서 성계 대항전 문제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 불안했던 아세리안은 그 길로 곧장 그녀를 찾아가 안우진이 한 얘기를 전해 주었다.
아세리안은 라파엘이 기뻐하며 조건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를 쥐여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성계 대항전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흐음. 감히 일개 플레이어가······. 협상을 하려고 한다라······. 그럼 가서 이렇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스킬 중 세 가지를 더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다고. 만약 이 조건에도 응할 생각이 없다면, 다시 저를 찾아와 얘기해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라파엘의 반응은 아세리안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설마하니,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도 주지 않을 생각으로 했던 제안일 줄이야!’
거기다 문제는 또 있었다.
라파엘의 기분이 제대로 상해버렸다는 것.
“아, 아니, 라파엘님! 사, 사실 그저 제 생각이었을 뿐이에요. 적어도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는 있어야 렌이 만족해하지 않을까 하는······.”
아세리안이 다급하게 안우진을 감싸보려고 했지만, 돌아온 건 라파엘의 냉소 뿐이었다.
“아세리안님. 그 아이에게 똑똑히 전해 주세요. 치천사라는 존재가 어떤 위치인지 보여 주겠다고.”
‘안돼!’
보아하니, 안우진을 완전히 찍어 누르려는 눈치였다.
오랜 시간 라파엘과 함께 일해왔기 때문에, 그녀가 한번 칼을 뽑으면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아세리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게 짓밟을 게 분명했다.
아세리안이 다급하게 라파엘에게 잘못했다고 매달렸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 상태로 끝나선 안 돼. 그럼 안우진님은 영원히 오퍼를 못 받으실지도 몰라.’
그날부터 아세리안의 굴욕적인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라파엘을 찾아갔더니,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정말 악질이야.’
라파엘의 의도는 명확했다.
기다리라고 했으니, 시간이 늦었다고 돌아갈 수도 없다.
라파엘이 원하는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며 반성하라는 것이리라.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인 아세리안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라파엘을 찾아가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굴욕적인 처사를 감내한 것이다.
결국 아세리안은 매일 같이 새벽이나 되어서야 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으. 오늘도 진짜 힘들었어.”
그래도 이젠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라파엘의 마음이 풀린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오늘도 라파엘에게 시달린 아세리안이 조막만 한 주먹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달빛에 비친 누군가의 그림자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어? 안우진님?”
아세리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안우진이 혼자 달빛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순간 아세리안의 마음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설마 PTSD?
지금까지 팀 투지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이곳에선 워낙 흔히 걸리는 병이다.
상위 리그 데뷔전을 가진 후 안우진에게 PTSD가 오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
“거기서 뭐 하세요?”
“잠이 안 와서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하게 풍겨오는 슬픈 기운.
아세리안은 서둘러 안우진의 곁으로 순간이동 했다.
“잠이 안 오신다고······ 어머.”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술병이 눈에 보였다.
안우진에게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지금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네. 꿈을 좀 꿨더니.”
“아······. 악몽을 꾸셨나 봐요.”
“아뇨. 좋은 꿈을 꿨습니다.”
“그럼 왜······?”
그러자 안우진이 활짝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
“깨기 싫을 정도로. 좋은 꿈이라서요.”
그리고 무척.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설명할 수 없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고나 할까.
‘밖에 있을 때의 꿈을 꾸셨나 보구나.’
다행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씩 저마다 아픔을 간직한 채 들어온다.
안우진도 아마.
밖에서 뭔가 슬픈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아세리안은 일부러 활짝 웃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는 의미였다.
“아, 참. 다음 경기가 잡혔어요. 하이블러드나이트 118.”
“······벌써 경기가 잡혔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안우진.
아세리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형은 팀 PvP 스토리 미션이에요.”
“의외군요. 성계 대항전 직전쯤에나 가야 다음 오퍼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헤, 게임 메이커가 이번 경기를 인상 깊게 봤나 봐요. 안우진님은 어디서든 빛이 나시니까.”
아세리안은 본인이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들은 숨긴 채 안우진을 띄워 주었다.
자신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플레이어들을 서포팅 해주는 것.
지금까지 그렇게 팜을 운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스토리 미션이라. 쉽지 않겠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경기 준비도 제가 잘 도와드릴 테니까, 안우진님은 지금까지처럼 그저, 경기장 안에서 멋진 활약을 펼치고 돌아오시기만 하면 돼요.”
아세리안의 말에 안우진이 피식 웃었다.
오퍼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길 잘한 것 같았다.
안우진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슬픈 기운들이 한결 가라앉은 것이다.
“언제나 아세리안님의 도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오히려 안우진님이 항상 절 도와주고 계신걸요. 요즘 하위 리그의 진행자들이 팀 투지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이래요. 좋은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고. 그게 다 안우진님 덕분이에요.”
아세리안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척 과장된 몸짓.
안우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더 풀어주려는 의도였다.
다행히 아세리안의 의도가 잘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슬슬 가서 자야겠군요. 경기도 잡혔겠다, 내일부터 다시 지옥 훈련을 시작해야 할 테니까.”
“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푹 주무시고 조금 이따 뵈어요!”
명상실의 지붕에서 뛰어내린 안우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곤 숙소로 들어갔다.
‘휴우.’
그제야 아세리안은 참았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우진은 사실상 팀 투지의 기둥과 같은 존재.
지금은 많은 숫자의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이 콜로세움에서 활약하고 있다곤 하지만, 안우진 한 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활약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팜의 운영, 육성, 다른 플레이어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나아갈 방향의 개척까지.
안우진 하나로 인해서 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래서 아세리안은 안우진이 받는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 * *
―상위 리그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렌. 하이블러드나이트 118 출격!
―혼자서 전장을 지배한 렌. 과연 스토리 미션에서도 가능할까?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 “렌이 상위 리그의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다.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던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의 귀감이 되어주어 감사하다.”
―하위 리그에서도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의 약진. 이 모든 게 렌 효과?
└렌 112에서 출전하지 않았음? 118이면 고작 3개월 쉬고 나오는 거네.
└자주 보이면 좋지 뭘 ㅋㅋㅋ 온몸에서 찌릿찌릿 새어 나오는 뇌전은 개 멋있더라.
└윗 댓글 동감. 시각적 효과가 풍부해서 좋더라. 죽일 때마다 붉은 안개가 흡수되는 게 스킬인 거 같은데, 무슨 효과인지 모르겠네.
└상위 리그에서도 몇 경기 안 돼서 곧 컨텐더 획득할 듯 ㅇㅇ 개인적으론 쿠 훌린이랑 둘이서 일대일 뜨는 거 보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장난하냐 상위 리그 최강자인 쿠 훌린을 어디다 비벼 ㅋㅋㅋㅋ 렌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건 맞는데, 쿠 훌린이랑 비교하는 건 오바임ㅋㅋㅋㅋ
└ㅇㅇ 쿠 훌린한텐 게임도 안될 듯. 그래도 렌은 아직 신입생이니까 좀 기다려 보자. 쿠 훌린 고위 리그로 올라가고, 그 자리를 렌이 차지할 가능성은 있으니까.
아세리안에게 오퍼 얘기를 전달받은 이후, 벌써 2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이블러드나이트 118이 열리는 날 아침.
공터에는 카이로시아도 함께 나와 있었다.
그녀도 오늘 경기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였다.
나는 상위 리그, 그리고 카이로시아는 하위 리그 블러드 나이트 236에 참가한다.
그것도 메인 이벤트에.
공터에서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곁에 서 있던 카이로시아가 입을 열었다.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로 넘어가는데 1년 정도 걸리셨다죠?”
“예.”
“저는 고작 세 달 만에 메인 이벤트네요. 상위 리그로 올라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카이로시아가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요 몇 경기 동안 경기를 그야말로 찢다시피 하다 보니, 자신감이 한껏 상승해 있는 모습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뭐.
사실, 그녀 정도의 괴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위 리그 시절 많은 네임드들을 만났지만, 아르웬만한 강자를 본 적이 없었다.
카이로시아는 그런 아르웬과 비견될 정도의 네임드.
그런 그녀가 나보다 더 짧은 시간 만에 상위 리그로 올라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제가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그때부턴 제게 예의를 갖춰 대해주시겠어요?”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여전히 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카이로시아.
그나마 나는 그녀를 전담으로 맡아 훈련했기에, 내게는 까칠하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팜에서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모습이 그녀에게 아니꼬워 보였던 모양이다.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카이로시아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발.
빨리 올라와서 포인트 쓸어다가 내 주머니에 넣어줬으면.
“흥. 말을 해도.”
내가 비아냥대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무시로 일관할 뿐이었다.
애초에 카이로시아와 나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카이로시아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로 팜에 들어왔다면.
‘난 대기만성형에 가깝지.’
기반은 이미 완성되었다.
아마 그녀가 상위 리그에 올라올 즈음에는.
내 성장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를 것이다.
띠링!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8 첫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2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알림창과 함께 공터에 2개의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그러자 나와 카이로시아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노심초사하며 보고 있던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그녀는 카이로시아를 바라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시아님. 이번 경기에서도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네, 여신님. 최선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카이로시아가 깍듯하게 대답하더니, 씩씩하게 게이트로 들어갔다.
아세리안에겐 개기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의 개념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안우진님. 요 며칠, 훈련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 경기에서도 멋진 활약 기대하고 있을게요.”
내게 활짝 미소 짓는 아세리안.
나는 평소처럼 가볍게 목례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무척 화려하게 치장된 넓은 방이 보였다.
우당탕탕!
“누구냐!”
“전하, 어서 옥체를!”
방 안에 있는 인원은 총 6명.
방 한가운데, 금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아 있는 20대의 청년이 앉아 있고, 그 앞으로 중갑을 착용한 5명의 기사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왕, 혹은 그에 준하는 누군가가 거처하는 곳 같았다.
의자들이 거칠게 뒤로 내동댕이쳐져 있는 걸 보아하니, 우리의 등장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양새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나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는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띠링!
[경기 :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의 두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스토리 미션(단체 PvP)]
[게임명 : 킹 메이커]
[맵 : 안티푸스(중)]
[관객 수 : 623,666 명]
[미션 : 라 제국의 3황자, ‘막시밀리언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를 황제로 만드세요.]
[장기 스토리 미션입니다.]
[현재 라 제국은 세 명의 황자가 황위 경쟁 중입니다.]
[3황자가 사망할 경우 미션에 실패합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5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3황자를 빠르게 황제로 등극시킬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경기 진행 시간 : 00:00:34]
이번 경기는 킹 메이커.
3황자를 황제로 만들라는 미션이었다.
‘쉽지 않겠군.’
이 미션이 상위 리그에 배정되었다는 것은.
지금 3황자의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안녕하십니까, 렌님. 에밋입니다. 기사죠.”
“고치우입니다.”
“키아라 라고 해요. 정령사에요.”
“테루오미라고 하오. 검객이오.”
같은 팀원들은 기사 한 명, 궁수 한 명, 정령사 한 명, 검객 한 명이었다.
조합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랄까.
“렌. 창술사 입니다.”
거기다 모두들 스텟도 준수했다.
‘팀 운은 완전 좋군.’
쉽지 않은 미션이 되겠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는가! 이곳에 계신 분이 누군데 감히······!”
우리가 한가로이 인사를 나누고 있자, 황자를 지키던 기사 한 명이 살기를 뿜어내며 윽박질렀다.
아무래도 승급전 경기 때와 다르게,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모양인데.
‘진행하기 전에 먼저 확실하게 끊어놓고 가야겠군.’
싸아아아아아아아아-
마음을 먹자, 살기가 내 몸에서 새어 나왔다.
“앞으로는.”
방금 우리에게 윽박질렀던 기사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봐 가면서 살기를 드러냅시다.”
아주 진득진득한 살기가.
“죽고 싶지 않다면.”
“······!”
*2연참입니다. 뒤에 79화 있습니다.
< 78화. 닮은 두 사람(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