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대가의 제단(5) >
“날, 보고 싶어 했다라.”
왕좌 위에 앉아서 중얼거리던 왕이 씨익,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었기에.
“후후. 제법 많이 성장했군. 하지만 아직 부족해.”
왕이 왕좌의 팔걸이를 검지로 툭, 툭 두드렸다.
그래.
기특하게도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어둠 속에서.
왕의 자줏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 * *
모든 언데드들을 정리한 우리는 T자 형태의 복도에서 우측으로 이동했다.
“이미 도착한 팀들이 제법 많군요.”
“아니, 벌써 보스 룸에 도착한 팀들이 있단 말이오? 도대체 어떻게?”
내 말에 비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고창신이 비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우린 중간에 다른 팀과 싸우며 체력 소모가 제법 많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휴식 시간도 가져야 했고. 그 사이에 보스 룸으로 향한 팀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찾긴 어렵지만, 보스 룸에 가까워질수록 언데드의 숫자와 등급이 증가했으니, 그걸 따라온 팀들이 많을 겁니다.”
오는 동안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던 모양이었다.
‘제법이네.’
사실, 고창신의 말이 맞았다.
아무런 힌트도 없이 이런 미로에서 보스 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언제 보스 몬스터가 잡힐지 모르니, 바로 돌입하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
우리는 곧장 복도 끝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직경 200미터짜리의 거대한 공동.
그 안에서는.
각종 마법이 흩뿌려지고, 스킬이 난무하며, 마구잡이로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공동 전체를 시꺼멓게 메우고 있는 언데드들.
그리고 중앙부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존재.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 한 손에 수정 구슬을 들고 있는 해골 몬스터가 있었다.
‘리치.’
내 예상대로 보스 몬스터는 리치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리치의 상태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보스몹 레이드를 들어가려 할 때마다, 다른 팀에서 견제를 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치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흑마법을 난사하고, 각종 언데드들을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미션이 진짜 더럽네.’
리치는 시체만 충분하다면 계속해서 언데드를 소환시킬 수 있는 몬스터.
거기다 1회차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 맵이 인체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엔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이 묻혀 있을 거라는 것.
아마 리치를 죽이기 전까진 언데드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겠지.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어.’
리치는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듯, 특정 팀을 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광역 마법을 쓰며 플레이어들 전체에게 딜을 넣고 있었다.
그러다가 특정 팀만 남게 되면, 그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리치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겠는데.’
한마디로, 미션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적아가 한데 뒤엉켜 있는 상황.
거기에다 꼬리를 물듯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함부로 리치를 공략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끌면 다른 팀들도 계속해서 합류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데스 나이트들도 바글바글 대는 상황.
‘차라리 잘됐어.’
이런 경우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일점사해서 리치를 빠르게 죽이거나.
‘차분하게 한 명씩 계속 줄여나가는 거지.’
내 경우엔 후자가 훨씬 나았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1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언데드와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생명체’ 니까.
“젠장. 계속해서 몰려오네! 이러다 여기서 다 만나겠어, 아주!”
“엇, 저 가면!”
“저 녀석이 렌이란 놈인가 본데.”
우리가 보스 룸으로 들어오자, 몇몇 플레이어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곧장 우리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은 없었다.
워낙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였다간 집중포화를 당하게 될 테니까.
‘다들 많이 지쳐 보이는군.’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모두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낡아서 넝마가 된 로브를 입고 있는 리치가 그나마 깔끔해 보일 정도.
잘만 하면.
이번 경기에서 피의 강화 특전을 켤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창신님. 리딩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프리롤로 움직이겠습니다.”
“······?”
내 말에 고창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내가 개인플레이를 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알겠습니다.”
다행히 고창신은 이것저것 캐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피의 강화 특전을 켜기 딱 좋은 상황이야.’
보스 룸은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외곽에서 눈치를 보며 언데드들을 줄이고 있는 팀들.
중심부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하며 리치를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팀.
그리고 플레이어들에게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언데드들.
그런데 워낙 언데드의 숫자가 많다 보니까, 팀 단위로 뭉쳐 있음에도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뚫고 들어가기 딱 좋다는 거지.’
악마의 눈을 켜서 나와 가장 가까운 플레이어들부터 순서대로 체크해 봤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플레이어는 없었다.
거기다가 모두들 몇 군데씩 상처를 입거나, 지쳐 있는 상태.
가장 약해 보이는 녀석들부터 차근차근 죽여가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속으로 대충 계산을 끝낸 나는 벽력섬전을 휘두르며 보스 룸에 깔려 있는 언데드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찰그락- 찰그락-
그리고는 간결하게 창을 휘두르며 녀석들을 밀쳐내는 데 주력했다.
사냥이 아닌, 돌파에 집중한 공격이었다.
목표는 중심부의 팀들이 내 돌격을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다가가 기습하는 것.
콰지지지지직!
캉! 캉! 캉!
시뻘건 뇌전이 흩뿌려지며 데스 나이트들을 단숨에 갈라버린 나는 곧장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좋았어.’
한 무리의 데스 나이트들을 돌파하자 적들이 보였다.
놈들은 내가 바로 근처까지 다가올 동안에도 다른 팀을 견제하거나, 언데드들을 상대하기 바쁜 상태였다.
“유명 네임드다! 조심!”
“맞상대하지 말고 모두 뒤로 빠져요!”
내가 무리에서 빠져나와 홀로 돌격해오자,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모두들 침착하게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피의 강화 스텍을 빠르게 쌓아야 해.’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는 플레이어들에게 뒤엉킨 채 방패를 휘두르고 있던 기사를 향해 창을 내리쳤다.
그러자 기사가 자세를 낮추며 방패를 세우고 내 공격에 대비했다.
캉!
방패를 내리치자, 엄청난 반발력이 밀려 들어왔다.
‘근력이 엄청난데.’
돌진하고 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띠링!
[플레이어 ‘프레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내 돌격이 허무하게 밀려나자 주변 플레이어들이 피식 웃었다.
“뭐야.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됐어?”
“괜히 긴장했네.”
그렇게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지금!’
[플레이어 ‘프레틱’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뒤바뀌자마자 곧장 창을 휘둘렀다.
스킬을 쓰는 나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간 이동이었는데,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진 플레이어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걱!
순식간에 나를 밀쳤던 기사의 목을 벤 나는, 적들이 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곧장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쿨타임이 제법 긴 그림자 표식을 아끼지 않은 효과는 대단했다.
단숨에 세 명의 플레이어를 처치하고, 그 안의 원거리 딜러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팀 단위로 뭉쳐 있는 상황에서 탱커가 뚫린 여파는 무척 컸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5/30)]
단숨에 5명이 넘는 플레이어를 처치하며 모든 스텟이 5%나 오른 것이다.
그리고 초인급의 경기에서, 5%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수치였다.
내가 파고드는 걸 본 한 창술사가 나를 향해 창을 뻗었다.
‘어딜!’
나도 녀석을 향해 창을 맞찔러 들어갔다.
비슷한 창의 길이.
비슷한 타이밍의 공격.
그럼에도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녀석의 창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고, 녀석은······.
푹! 푸쉬이이익!
띠링!
내 창이 정확하게 녀석의 목구멍을 꿰뚫고 빠져나오자, 엄청난 양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5%라는 숫자는 얼마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단 한 수만으로 승부가 갈려지는 초인의 세계에서, 메우기 쉽지 않은 수치였다.
그리고 그 수치는, 계속해서 커져 갔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앙!
때마침 벽력이 터지며, 사방으로 시뻘건 뇌전이 퍼졌다.
그 바람에, 영향권에 있던 두 명의 플레이어는 상반신이 그대로 사라졌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30)]
그리고 그때부터 보스 룸의 상황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처음이랑 딴판이잖아!”
“저 녀석부터 먼저 조져!”
고만고만한 수준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한 명의 독보적인 강자가 나타나니까, 서로 암묵적으로 날 먼저 제거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
띠링!
[<전광석화>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나는 곧장 아껴둔 한 수를 꺼냈다.
순간적으로 빨라진 움직임.
그로 인해 내게 향하던 공격들을 피한 나는 빈틈을 노리며 창을 휘둘렀다.
‘방어가 좋네. 돌파.’
‘목에 허점!’
‘발이 느려. 따라붙으면 심장을 노릴 수 있겠어.’
초감각과 마력장의 조합은 이런 난전에 특화된 능력.
내 눈이 향하는 곳 뿐만 아니라 영역 전체를 읽어내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플레이어들 사이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봤자 하위 리그 때처럼 양학을 하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서걱! 서걱!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30)]
[<전광 석화> 의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전광석화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5킬 정도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천자 20%와, 최강의 성계 10%, 천둥의 숨결 15%, 거기에 피의 강화 13%까지 적용되면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학살을 하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같은 팀원들이 엄호를 해주었다.
팅! 팅! 팅! 팅! 팅! 팅! 팅!
【웅크린 산신의 분노!】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고창신의 화살과, 로만의 대지 마법.
물론, 크게 유의미한 공격은 아니었다.
【차가운 염화의 방패!】
【향긋한 바람의 한숨!】
화살들은 탱커들에 의해 차단당했고, 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이 커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창신의 화살과, 로만의 마법을 막기 위해.
적들은 어쩔 수 없이 빈틈을 허용해야 했으니까.
서걱!
‘쉽지 않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쉽게 죽어주지 않았다.
빈틈이 생기면 다른 플레이어가 커버해주고, 내가 먹잇감을 노리는 타이밍에 맞춰 내게 검을 휘둘러 왔다.
‘체력 소모가 너무 커.’
거기다 상위 리그부터는 워낙 수비가 좋다 보니, 피의 회복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천둥의 숨결 때문에 체력 소모가 2배로 늘어난 상황.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창신이 팀원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나를 서포트 해주는 역할로.
“이든님. 왼쪽 공간 좀 잘라주세요. 그러면 렌님이 진형을 가르기 수월할 겁니다.”
“예.”
“로만님. 리치가 렌님을 타깃으로 영창중인 거 같습니다. 커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비욘님, 중앙에서 렌님이 받는 압력 좀 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소.”
안 그래도 피의 강화 스텍이 제법 쌓여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고창신의 지원사격은 내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됐어.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후후, 모두들 어리석구나. 힘을 합쳐 이 몸을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크흐흐, 이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이란 말인가.
【어둠의 소나기!】
그때, 천장에서 무수한 마법 비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전투를 여유롭게 지켜보던 리치가 쓴 마법이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보호 마법!”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색 빗줄기가 플레이어들에게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 75화. 대가의 제단(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