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대가의 제단(3) >
머리가 잘려 나간 수인족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띠링!
[플레이어 ‘몰케’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이번 경기에선 처음 보는 피의 회복과 피의 강화 알림창을 뒤로하고, 나는 곧장 창술사에게 달려들었다.
“몰케! 젠장.”
일대일 상황이 된 이상, 내가 녀석에게 밀릴 이유가 없었다.
챙! 콰지지직!
내 창이 녀석의 창을 뱀처럼 휘감으며 찔러 들어가자, 녀석이 황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격랑 하는 겨울의 향기!】
【잠재워라, 땅의 숨결이여!】
어떻게든 자기편을 돕기 위해, 적 마법사가 마법을 날려댔지만, 로만의 마법이 동시에 날아들며 나를 지켜주었다.
확실히 경험과 센스가 많다 보니, 적 마법사의 영창 속도에 맞춰 마법을 커버할 줄 알았다.
덕분에 나는 오롯이 창술사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든님도 합류해 주세요!”
“예.”
고창신의 말에 이든도 싸움에 가세하며 녀석들을 밀어붙였다.
한 명을 줄인 이상, 이대로 계속해서 수적 우위를 이용한다면 금세 녀석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크윽!”
이든이 방패를 앞세워 적 창술사의 공격을 끊어내고, 내가 그 빈틈을 노리며 녀석을 찔러 들어갈 때였다.
마력장으로 뒤쪽에서 비욘이 두 명의 기사에게 밀려 쩔쩔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비욘이 빠르게 빠져나오려 하자, 두 명의 기사가 방패를 앞세워 도주하려는 공간을 잘라냈다.
팅! 팅! 팅! 팅! 팅! 팅!
고창신이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화살을 날려댔지만, 적 기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화살 몇 발 정도는 몸으로 받아내며 거칠게 비욘을 몰아세웠다.
‘쯧.’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여유분의 창을 꺼내 비욘이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적 창술사를 이든에게 맡긴 채, 빠르게 비욘과 합류했다.
카앙!
내가 던진 창을 받아낸 기사가 한 걸음 크게 밀려났다.
창에 담긴 힘을 온전히 흘려내지 못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창을 앞세워 녀석에게 찔러 들어갔다.
그로 인해 빈 공간이 생겨난 비욘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쯧. 다 잡았거늘.”
적 기사가 작게 읊조리며 마법사에게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욕심부린 대가는 치러야지.’
나는 힘으로 몰아붙이며 적 기사가 마법사에게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고창신의 화살이 적 마법사의 보호 마법을 두들기고, 로만이 마무리를 하기 위해 영창을 하고 있는 상황.
지금 이 기사를 내가 물고 늘어지면, 적 마법사는 로만의 마법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천중千重의 겁박!】
마침 로만이 시동어를 읊으며 마법을 시전했고.
“아······.”
꽈직!
적 마법사는 작은 단말마를 남기며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암석에 찌부러졌다.
안 봐도 즉사였다.
이제 남은 건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창술사뿐.
완벽하게 우리 팀 쪽으로 승기가 넘어온 것이다.
“씨발!”
고창신과 로만의 일점사를 받게 된 적 창술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갓 상위 리그로 올라온 것 치고는 잘 싸우네. 원래 팀전 경험이 많았나?
└솔직히 강한 건 잘 모르겠는데, 판단력이나 전술 이해도는 ㅅㅌㅊ인듯. 오늘 처음 만난 팀원들을 저렇게까지 맞춰주는 건 분명 놀라운 재능임.
└이게 다 ㅂㅅ처럼 빨아주던 놈들 때문이야ㅡㅡ. 솔직히 저 정도 실력이 욕먹을 수준은 아니긴 한데, 다른 새끼들이 설레발을 너무 쳐서 기대감을 높여놨음.
└ㅇㅇ 스텟 낮은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정도면 떡잎은 좋네. 잘만 키우면 상위 리그에서도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기 하루 이틀 보냐? 야 저 정도는 상위 리그에 널리고 널렸음 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런 애들이 상위 리그 밑바닥 쿠션을 이루고 있지 ㅇㅇ
└아니 애초에 네임드라매. 요즘은 네임드 기준이 많이 낮아졌나?? 아니면 지구 출신이라서 네임드라고 불러주는 거야? 저게 어딜 봐서 네임드냐고.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기대하지 말고 봐~ 그럼 볼만 하니까.
서걱!
“커헉······.”
적 팀장으로 보이는 마지막 기사를 죽이는 걸 끝으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후. 다행히 피해는 별로 없군요.”
비욘이 두 명의 기사에게 공격을 당하느라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은 것 말고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5대5로 싸운 것 치고는 정말 경미할 정도의 피해였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렌님. 덕분에 비욘도 무사하고, 별 피해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띄워주는 고창신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팀원이지 않습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요.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빈자리를 잘 메꿔주신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전투를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다른 팀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비해 모두들 눈빛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같은 팀원이라는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찰그락- 찰그락-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주변에 있던 언데드들이 공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쉴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치유의 물약을 들이켜고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비욘이 투덜거리며 도끼를 들고 일어났다.
[남은 체력 : 42%]
상위 플레이어들과의 전투로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황.
‘쯧.’
거기다 나는 천둥의 숨결까지 켜고 있었더니,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그나마 마지막 세 명을 내가 마무리했기에 체력이 3% 회복되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헥헥거리고 있었을지도.
“일단 보스 룸까지 돌파하며 중간에 쉴 만한 공간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 비욘님 상태가 안 좋으니까, 지금부터는 렌님이 선두를 부탁드립니다.”
고창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나를 선두로, 다시 지하 유적의 탐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상황이 조금씩 나빠졌다.
데스나이트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길목을 빼곡하게 가로막고 있을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헉, 헉. 젠장. 앞쪽으로는 뚫고 가기 어려워 보이는군요. 일단 뒤로 빠지겠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재정비 후에 다시 도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임 어택 미션이긴 하지만,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저 데스나이트 군단을 무리하게 뚫으려고 하다간 위험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휴식할 공간이라도 찾고 싶었는데, 어딜 가더라도 언데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이라면, 앞쪽에선 데스나이트가 막고 있지만, 우리가 왔던 방향은 거의 스켈레톤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쉴 공간을 찾긴 쉽지 않겠군.”
나와 교대해, 전방에서 길을 뚫고 있는 기사, 이든의 말에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초감각으로 인해 증폭된 청각이 미세한 소리 같은 걸 들을 순 있어도,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모두들 체력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헉, 헉. 33프로 남았소.”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던 비욘의 체력 소모가 무척 컸다.
“전 딱 40프로네요.”
“뒤에서 마법만 때려 넣었더니 52프로 남아 있습니다.”
이든과 로만의 체력은 아직 양호한 수준.
“렌 님은 얼마나 남으셨죠?”
“34프로 입니다.”
팀원들의 남은 체력을 들은 고창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뚫고 들어가기엔 체력이 너무 적고, 그렇다고 아예 유적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그냥 경기를 포기하자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밖에서 체력을 모두 회복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결국 또다시 길을 뚫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고.
“쉴 만한 공간을 딱 20분만 더 찾아보죠. 그래도 못 찾는다면 아예 밖으로 빠져나가겠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가는 건 안 돼.’
“만약 빠져나가게 된다면 그때부턴 저 혼자 남아서 플레이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림자 표식 스킬 덕분에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다.
그만큼 리스크가 적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계속해서 경기를 진행하고 싶었다.
혼자서라면 클리어할 확률이 무척 낮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내 말에 고창신이 잠시 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 굳이 말리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니, 일단 최대한 돌아다녀 보죠.”
그때부터 우리는 유적을 돌아다니며 언데드가 없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쉴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공동에서 언데드들을 모조리 죽여도, 잠시 후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그 광경에 모두들 얼굴에 그늘이 졌다.
결국 밖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진짜 더러운 맵이군.’
몰려드는 스켈레톤들을 처리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3분 정도면 고창신이 얘기한 20분이 된다.
잠시 후면 나 혼자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어?’
직경 30미터 정도의 커다란 공동을 지날 때였다.
낡아서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 나무 조각들.
그 너머에 있는 벽에 무언가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양인데.’
어디서 봤더라.
하위 리그에서는 저런 문양을 본 적이 없었다.
1회차?
1회차 땐 어차피 두 눈이 없었기······.
‘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유적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계속 기시감이 느껴졌던 거군.’
“갑자기 왜 멈추십니까, 렌님?”
저 문양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잠깐만 대신 언데드들을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예.”
이든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것 같더라니.’
그때와 다르게 폐허가 되고, 깜깜하고, 가구들이 모조리 박살 나 있었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하지만 공동의 벽에 그려져 있는 문양을 보니, 확실했다.
‘대가의 제단이었어.’
1회차, 하위 리그에서 활동할 당시 내가 직접 본 기억 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맵이자.
내가 두 눈을 바쳤던 곳.
바로 그곳이었다.
‘그땐 분명 흑마법사와 흑기사들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1회차에서 이곳은 생체 실험을 하는 실험실이었다.
그래서 지하에 위치해 있었고, 내부를 미로처럼 꼬아뒀었다.
그리고.
“모두들 이쪽으로!”
나는 곧장 문양이 그려져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인지, 다른 팀원들도 기민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
내가 벽의 곳곳을 더듬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고창신도 재빨리 벽에 달라붙어 이곳저곳을 만지고, 누르고, 쓸었다.
탈칵-
‘찾았다.’
드르르르르륵-
벽의 어딘가에 존재하던 버튼을 누르자, 벽이 움직이며 빈 공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방이 있었다.
내가 그 안으로 성큼 내딛자, 안전한 공간인지 눈치만 보고 있던 팀원들도 나를 따라 들어왔다.
찰그락- 찰그락-
스켈레톤들이 우릴 따라 안 쪽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다시 문이 닫힌 덕분에 무사히 녀석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후.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아, 벽의 틈새가 미세하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혹시 숨겨진 공간이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본 것 뿐입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그나저나, 유적은 분명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곳 같아 보였는데, 이곳엔 횃불이 켜져 있다니······?”
10평 정도의 작은 공간.
벽의 곳곳에 횃불이 켜져 있었고, 중앙에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흥미롭군요. 횃불이 마력으로 구동되는 방식입니다. 어디선가 마력이 계속해서 주입되고 있다는 뜻인데, 그 어디에도 마력 주입구가 없군요.”
곳곳을 살피던 마법사, 로만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커헉, 이제야 살겠군.”
이든과 비욘은 각자의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바깥과 같이, 대가의 제단이 있는 곳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던 흑마법사와 흑기사들이 사라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제단 위에 적혀 있던 글귀도 사라졌군.’
어떻게 해야 이 제단을 이용할 수 있는지 쓰여져 있던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에 있는 제단을 보자 여러 가지 감정이 몰려왔다.
여기서 왕을 처음 만났으니까.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나는 제단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손을 뻗었다.
그리고 벽력섬전으로 손바닥을 그어, 제단 위에 피를 떨어트렸다.
툭. 툭. 툭. 툭.
제단 위로 피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방울째 피가 제단으로 떨어질 때였다.
툭.
잘게 쪼개지며 튀어 오르던 피가 허공에 뜬 상태로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팀원들도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엄청나게 악의에 차 있는 귀곡성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그 존재가 나타났다.
―결국, 다시 상위 리그까지 왔군.
1회차 때.
내 두 눈을 가져감으로써 하위 리그에서 허덕이던 나를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게 해주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영혼을 담보로 회귀까지 시켜주었던 존재.
“나도 다시 만나보고 싶었지.”
왕.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73화. 대가의 제단(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