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승급전(8) >
그림자 교환으로 이동한 나는 곧바로 전광석화부터 발동시켰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사제를 찾아 그쪽으로 돌진했다.
“······!”
“······!”
리암이 있던 위치는 무리의 중심부.
그 뒤쪽으로 다섯 명의 기사가 사제를 에워싼 채 지키고 있고, 그 바깥으로 20명 정도의 기사들이 더 큰 원을 그린 채 대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사제는 다섯 흑기사의 경계 안쪽에서 손바닥만 한 구슬을 든 상태로 무언가를 영창 중이었다.
‘사제만 죽인다.’
악마의 눈으로 누가 팔라딘이고 누가 흑기사인지 확인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창을 찔러 넣을 뿐.
푹!
녀석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사제의 목만 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방심하고 있던 건 아니군.’
내 창이 사제의 목을 관통하자마자 다섯 개의 검이 나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 반응 속도라면 미리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것.
다만 스텟이 100을 넘는 초인의 세계에서는, 0.1초의 반응 속도 차이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발리노르인 ‘아이작 머니쿠츠 드 데이커’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사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 나는 곧바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이걸로 세 번째 방향까지 클리어.
이제 한 명의 사제만 더 죽이면 된다.
“사자님!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됐습니다!”
“쿠오오오오오!”
아이작의 외침과 동시에 북쪽에서 몬스터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작에게 고개를 끄덕인 채 바닥을 박찼다.
오늘 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할 것이다.
서걱!
[킬 수 현황]
[1위. ‘렌’ 52,111킬]
[2위. ‘고군백’ 1,584킬]
[3위. ‘이청명’ 1,502킬]
[4위. ‘카롤’ 1,447킬]
셋째 날의 몬스터 웨이브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몬스터의 숫자는 첫날에 비해 50% 정도 늘었지만, 한쪽 성문으로밖에 쳐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렌님.”
“수고하셨습니다.”
함께 사냥을 나섰던 플레이어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북쪽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전날과 달리 밝은 표정의 병사들이 보였다.
오늘의 몬스터 웨이브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늘도 바로 나가실 겁니까?”
곁에서 피를 닦으며 성문 안으로 들어오던 고군백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뿌리를 뽑아 놓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요. 다녀올 테니 오늘도 신성석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오늘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니 성문 수리도 진행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군요.”
“네, 알겠습니다. 아이작에게 전달해 놓지요. 그런데 성문은 왜······?”
“혹시 모르니까요. 부상병들 회복에도 신경 좀 써달라고 해주세요.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고군백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긴 나는 다시 북쪽 성문을 빠져나갔다.
[신성석 사수까지 남은 시간 : 109:51:33]
아직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4일 넘게 남아 있었지만, 오늘 안에 남은 한 명의 사제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녀석들이 그사이에 사제를 추가해 오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 요소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숨기 전에 서둘러야 해.’
녀석들은 더 이상 나를 맞상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벌써 세 명의 사제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몰래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나타나 몬스터 웨이브를 소환하고 다시 숨기를 반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녀석들이 북쪽에 있는 아리투아포 산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이제 막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기에, 서두른다면 녀석들의 뒤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유독 트롤의 비율이 높았지.’
지도로 트롤의 영역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내달렸다.
북쪽 성문에서 엄청나게 죽여댄 덕분인지, 아리투아포 산맥을 돌아다니는 몬스터의 숫자가 별로 없었다.
그들의 먹잇감인 동물들만 간간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내가 목표로 했던 트롤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빠져나갔군.’
밟힌 덤불이나 꺾인 나뭇가지를 통해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 기울여봐도 몬스터나 동물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 지 제법 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녀석들이 이동한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초감각이 아니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흔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찾을 수 있어.’
흔적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녀석들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체 스텟이 낮은 사제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흔적만 끊기지 않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키륵키륵.”
“키륵.”
녀석들 중에 뛰어난 길잡이가 있는지, 곳곳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최대한 피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사체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추적해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거겠지.
검에 베여 죽은 것과 송곳니에 물려 죽은 것은 확연하게 다른 법이니까.
‘어디로 가는 거지?’
흔적은 아리투아포 산맥을 서쪽으로 횡단하고 있었다.
가는 경로로 유추해 보자면 아마 아리투아포 산맥을 넘어, 그 밑에 있는 둠베스 산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
그때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무심코 넘겼을 정도로 무척 작은 소리였다.
‘녀석들이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녀석들의 대화 소리도 점점 뚜렷해져 갔다.
그중에는 귀에 익은 목소리도 있었다.
“피곤하시겠지만 조금만 힘내십시오, 사제님.”
“사도님들이 열 분이나 계신데, 꼭 이렇게 도망가야 할까요?”
“나자란 산에서도 사도가 여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이교도에게서 제레미 사제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죠. 둠베스에서는 루이스 사도가 그 이교도에게 죽었고, 리암 사도님은 사라진 이후로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걸로 보아 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이자벨라 사제님까지 잃게 된다면 저희는 더 이상 신성석을 깰 방법이 없어집니다.”
녀석들은 내 얘기를 하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림자 표식 스킬에 대한 압박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이 그림자 표식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자벨라라는 사제가 마지막인 모양이군.’
신성석을 깰 방법이 없다는 말에서 추가로 사제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있는 저 사제를 죽인다면 사실상 몬스터 웨이브는 끝이라는 것.
‘승급이 멀지 않았어.’
문제는 열 명의 팔라딘 사이에서 어떻게 저 사제를 죽이냐는 것이었다.
‘지금은 안 돼.’
조금만 있으면 아리투아포 산에서 내려와 탁 트인 평지로 들어선다.
거기서 싸우는 것 만큼은 피해야 했다.
은엄폐물이 없어 녀석들에게 둘러싸이면 도망칠 공간이 없다.
그러다가 위험에 처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면 녀석들을 완전히 놓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아리투아포 산을 내려가기 전에 처리하느냐, 아니면 둠베스 산을 들어왔을 때 처리하느냐. 결국 둘 중 하나군.’
아리투아포 산에서 잡는 것과 둠베스 산에서 잡는 것 둘 다 장단점이 있었다.
아리투아포에서는 적어도 녀석들을 놓칠 가능성은 없다는 것.
대신 뒤쪽을 경계하며 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치명적인 기습을 하긴 어려웠다.
반면에 크게 돌아서 둠베스 산에 먼저 자리를 잡으면 녀석들도 예상하긴 힘들 터.
다만 녀석들의 경로가 둠베스 산인지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이 어디쯤이지?’
나는 서둘러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아리투아포 산맥의 서쪽을 넘어, 5분 정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아리투아포 산맥을 완전히 내려오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될 거고.
둠베스 산과 아리투아포 산맥 사이의 평원은 대충 10킬로미터 정도 거리니까 시간적으론 여유가 있었다.
둠베스 산으로 오르면 경사까지 있으니, 녀석들이 평원으로 내려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녀석들이 둠베스 산으로 오지 않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기도 하고.
‘둠베스 산으로 가자.’
나는 곧장 지도를 품속에 넣으며 바닥을 박찼다.
2시간 정도 크게 한 바퀴를 돌며 전속력으로 아리투아포 산을 내려온 나는 곧장 둠베스 산의 초입에 숨어들었다.
[<스킬:그림자 표식>]
[액티브]
[재사용 대기 시간 : 03:27:19]
10분 정도 지나자 저 아래의 평원에서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행히 녀석들은 둠베스 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사제를 죽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녀석들이 어디로 길을 잡을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몬스터 영역의 경계선을 따라 움직이겠지.’
그게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나는 계속해서 어둠의 교단 녀석들과 일정 거리를 떨어트린 채 앞서 나갔다.
앞으로 3시간 후.
‘둠베스 산에서 끝을 봐야겠어.’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이 끝나는 순간, 사제를 죽일 것이다.
* * *
둠베스 산의 중심부.
어둠의 교단 열두 개의 검 중 일인, 해럴드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혹시 함정은 없는지 전방을 살펴야 했고, 뒤따르는 이는 없는지 후방도 체크해야 했으며, 거기다 언제든 형제들에게 검을 날릴 준비까지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잡은 검자루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자벨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한시름 놓아도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이교도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둠베스 산으로 이동한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수많은 사도들이 지키고 있음에도 벌써 세 명의 사제가 죽었다.
다음 표적이 자신이라는 걸 이자벨라 사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얘기를 하는 건.
‘우릴 배려하기 위함이겠지.’
해럴드를 포함한 열 명의 팔라딘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호위를 하다 보니, 정신력 소모가 엄청났다.
그 모습을 딱하게 여긴 사제, 이자벨라가 해럴드에게 조금은 편안히 있을 것을 주문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사제님. 어제도 불시에 나자란 산으로 이동했지만,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교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를 저희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녀석은 엄청나게 빠르고, 강했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창을 찌른다면 집중하고 있지 않은 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어제 한차례 겪지 않았던가.
여섯 명의 팔라딘이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제레미 사제 한 명을 지켜내지 못했다.
리암 사도님과 모습이 뒤바뀌고 고작 0.1초만에 반응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마법이라고 했나요? 사도님들과 비견될 정도의 강자가 어떻게 그런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이자벨라의 물음에 해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다만, 헤르세벨그의 주민들이 믿는 태양신의 전사가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태양신의 전사요?”
이자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그의 수준은 리암 사도보다 뛰어났습니다. 한마디로 마스터급이라는 뜻이죠. 그 정도의 강자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날 리 없습니다. 어둠의 신께서 저희에게 ‘헬리퍼’님을 보내주신 것처럼, 태양신이 저들에게 내려준 전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네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이 땅에 신의 권속이신 필로타누스님만 강림한다면, 태양신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직접 강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
쿠구구구구구구궁-
그때였다.
무수한 진동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한 해럴드는 곧바로 이자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취이이이익! 취이이익!”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들리는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
주위에 있던 팔라딘들도 모두 긴장한 채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교도다!”
“모두 전투 준비!”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이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취이익! 가만두지 않겠다, 인간!”
그 이교도의 뒤에서 엄청난 숫자의 뿔 오크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순간 해럴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이교도 놈이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지만, 자신들이 향하는 방향에서 몹 몰이를 하며 나타난 것이다.
“모두 뿔 오크의 돌격에 대비하라!”
해럴드가 큰 소리로 외치며 속으로 읊조렸다.
저 개새끼.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욕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던 해럴드였다.
* * *
녀석들의 주위를 배회하던 나는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이 끝나는 순간, 뿔 오크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자마자 뿔 오크들을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취익! 절대 놓치지 않겠다!”
동족이 죽었기 때문인지, 뿔 오크들은 눈이 뒤집힌 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녀석들을 피해 경사 아래로 달리자, 저 멀리서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보였다.
뿔 오크들의 포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두들 전투 태세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빙고.’
마침 태양이 슬슬 저물어 가는 상황이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 상태로 뿔 오크와 팔라딘들을 싸움 붙여 놓고 표식을 등록하면 될 것 같았다.
“모두 전투 준비!”
거대한 방패를 마치 벽처럼 쌓는 팔라딘들.
콰지지지지직!
나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방패 벽에 돌진했다.
카가가가가강!
벽력섬전을 겨드랑이에 고정시키고 녀석들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지만, 팔라딘들은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을 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교도여! 너를 반드시 신의 곁으로 보내주겠다!”
내 돌진을 막은 팔라딘들이 방패벽을 해제하며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좌우로 이동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발리노르인 ‘롤란스’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발리노르인 ‘해럴드’의 그림자에 표식을 ······.]
그러자 무수히 뜨는 알림창들.
하지만 뿔 오크들이 바로 뒤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쯧. 일단 빠져야겠군.’
그래서 일단 몸을 빼려 할 때였다.
띠링!
[발리노르인 ‘이자벨라’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표식 등록!’
운이 좋게도 몸을 빼던 순간에 사제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었다.
표식을 등록한 나는 그대로 측면으로 빠지며 뿔 오크와 팔라딘의 사이를 벗어났다.
‘침묵의 망토.’
그리고는 곧장 근처 나무 뒤로 숨으며 은신을 사용했다.
캉! 카가가강! 카카카강!
대규모 뿔 오크 군단과 팔라딘들의 방패벽이 부딪히며 엄청난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취익! 인간! 방금 도망치던 그 인간을 내놓아라!”
“동족의 원수! 취익! 동족의 원수를 죽여야 한다!”
“한낱 오크 따위가 신의 종들을 핍박하다니! 신을 대신하여 우리가 네놈들에게 철퇴를 내리겠다!”
둠베스 산의 중턱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엄청 잘 싸우네.’
일곱의 팔라딘과 열 명의 흑기사가 방패로 막고 있고, 세 명의 팔라딘이 사제의 주위에 선 채 내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확실히 탱커의 숫자가 무척 많다 보니까, 뿔 오크 군단의 돌파가 통하지 않았다.
뿔 오크들은 방패에 가로막힌 채 맨 앞줄부터 차례차례 죽어 나갈 뿐이었다.
‘슬슬 나가볼까.’
뿔 오크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자 나는 은신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곧장 뿔 오크 군단 사이를 파고들었다.
“취익! 동족의 원수!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내 모습을 발견한 뿔 오크들이 검과 도끼를 방방 휘둘러댔다.
‘지금!’
뿔 오크의 도끼가 내 머리를 쪼개려는 순간.
[발리노르인 ‘이자벨라’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꺄아아아아악!”
그러자 내 위치가 순식간에 세 명의 팔라딘 사이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뿔 오크 군단의 한가운데에서 이자벨라라는 사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안돼!”
그리고는 곧장 고군백에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제에에엔장!”
고군백의 곁으로 순간 이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살기로 인해 두 눈이 빨갛게 변한 채 내게 검을 휘두르는 해럴드의 얼굴이었다.
‘안녕.’
광기와 피비린내로 가득하던 전장에서 평화로워 보이는 중앙 광장으로 한순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림자 이동으로 고군백의 곁에서 나타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네 명의 사제를 모두 죽였다.
이걸로 몬스터 웨이브는 끝.
[신성석 사수까지 남은 시간 : 86:17:29]
이제 86시간 동안만 신성석을 잘 지키면 된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고군백이 차분하게 물었다.
“예. 마지막 사제까지 처리했습니다. 이제 몬스터 웨이브는 없을 겁니······.”
띠링!
[경기 종료 시점까지 신성석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알림창.
거기엔 경기가 종료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아직 86시간이나 남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플레이어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1위. ‘렌’ 52,111킬]
[2위. ‘고군백’ 1,584킬]
[3위. ‘이청명’ 1,502킬]
[4위. ‘카롤’ 1,447킬]
[킬 수 ― 52,111 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52,111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3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킬 수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20,000 P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받게 됩니다.]
하지만 종료 콜이 뜬 이상 경기가 종료된 것은 확정된 사실이었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상위 리그.’
경기가 끝났다는 것은, 내가 승급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업적!]
[몬스터 웨이브를 조기에 끝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악마 강림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추가로 x 2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7 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54,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6,000 P 차감)]
[기본급 +10,000 P / 승리 수당 +10,000 P / 추가 보너스 +100,000 P / 서브 미션 수당 +100,000 P / 수수료 -66,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2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션의 원인을 없애면 조기 종료도 가능한 거였군.’
1회차에서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하긴.
지금의 나도 그림자 표식 스킬이 없었다면 조기 종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밤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다른 플레이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빴겠지.
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미션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미션에 실패할 뻔했을 정도로.’
[플레이어 ‘렌’이 상위 리그로 승급하셨습니다!]
이걸로 하위 리그는 끝.
이제 상위 리그를 치를 차례였다.
이제야.
진정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1회차 때와는 많이 다를 거야.’
내 몸을 감싸는 빛무리 속에서.
나는 작게 읊조렸다.
< 65화. 승급전(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