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Greatest Of All Time(4)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스텟이면 아르웬도 압살할 수 있는 수준.
거기다 나처럼 사기적인 스킬과 아이템들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미친!’
그러자 분신 녀석이 날 쫓아오며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내 플레이 스타일이 그대로 기록된 녀석이라 그런지,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아이템까지 똑같은 모양이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녀석의 다음 패턴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을 피하느라 속도가 느려지면······.’
휘익! 챙!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슬낫이 날아들었다.
마력장과 들려오는 소리로 사슬낫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 수 있었기에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할 수 있었다.
‘아, 씨발.’
하지만 피했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사슬낫을 피하고자 몸을 트는 사이.
콰지지지지지지직!
분신 녀석이 내 등 뒤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콰아앙!
뇌전을 머금은 녀석의 창이 바닥을 찍으며 작은 폭발음을 만들어냈다.
‘고명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법이 없는 막막함.
나 자신에게 쫓기는 기분이란.
참 엿 같았다.
‘씨발.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나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채 등을 돌려 분신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도 몸에서 뇌전을 피우며 창을 맞받아쳤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채애앵!
‘무슨 힘이!’
순간 뒤로 튕겨져 나갈 뻔했다.
근력에서 무려 30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반발력이 어마어마했다.
찌릿!
‘윽!’
그와 동시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움찔했다.
손바닥을 타고 뇌전의 힘이 침투한 것이다.
‘젠장. 안 그래도 최악의 상황인데 뇌전까지······!’
같은 뇌신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서 뇌전 데미지는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마력 상쇄 덕분에 50%나 줄어든 건데도 이 정도 데미지면······.
‘어?’
잠깐만.
‘이 새끼······ 평균 스텟 보정 받아서 마력이 100 안 넘잖아?’
현재 녀석의 마력은 85.
반면에 내 마력은.
[마력 : 114(+5)(+26)]
순간 머리가 번쩍했다.
녀석도 나처럼 뇌전의 데미지를 받았을 터.
아니, 나보다 더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마력이 높아서 뇌전의 데미지 절댓값이 내가 더 크고, 녀석은 마력 상쇄도 40%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뇌전으로 최대한 데미지를 쌓는다.’
챙! 채챙! 챙! 채채챙!
관건은 최대한 버티는 것.
‘제발 벽력이 발동되지 않아야 할 텐데.’
문제는 무작정 버티는 것도 답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녀석이 벽력을 터트릴지 모르니까.
내가 먼저 발동될 수도 있지만, 녀석에게 치명타를 입히긴 힘들 것이다.
“렌이 네임드를 사냥한다!”
“네임드를 못 죽이게 해야 해!”
“아니, 그쪽 렌 말고 이쪽 렌을 죽여!”
그때 주위에 있던 스무 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이 내 분신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선 달려들었다.
모두들 무림 출신.
녀석들은 나와 분신에게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차라리 잘 됐어.’
나는 분신과 떨어지며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했다.
아니,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 괴물이랑 싸울 바에야.’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야 한다.
양손이 저릿저릿한 상태였으니까.
녀석의 엄청난 근력에서 오는 반발력만으로도 참기 힘든 수준인데, 한번 닿을 때마다 뇌전까지 내 몸을 파고드니 창을 잡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렌이 도망친다! 녀석을······.”
“아니, 분신부터 먼저 죽여!”
“이 개자식. 죽, 으아악!”
뒤쪽에서 플레이어들이 학살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사이에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
‘후, 다행이야.’
나는 한참을 내달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날 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젠장. 저거 못 죽일 거 같은데.’
내 분신도 죽일 때마다 체력이 회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런 스펙까지 갖추고 있다면?
혼자서 플레이어들을 다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어.’
내 분신이 제대로 날뛰기 전에 최대한 많은 네임드 분신들을 사냥해야 한다.
푸슉! 푹! 푹! 푸슉! 서걱!
그때 근처에서 플레이어들을 학살하는 다른 네임드 분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아킬레우스(분신)]
[성향 : 호전]
[근력 : 65] [민첩 : 108(+?)] [체력 : 65]
[정신 : 54] [지력 : 42] [마력 : 53]
[각성 능력 : <신속의 검> <대영웅> <특급살기> <특급마나운용> <특급검방술> <고급박투술> <최상급궁술>]
하지만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분명 빠르고 강하지만,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였으니까.
‘플레이 스타일을 체력이 뒤받쳐주지 못하는군.’
아킬레우스의 분신은 빠른 속도를 이용해 공격을 막기보다 피하면서 반격을 넣고 있었다.
저런 스타일은 상대를 간결하고 빠르게 죽일 수 있지만, 체력 소모가 무척 심할 것이다.
본체였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녀석은 평균 스텟 보정으로 페널티를 짊어진 상태.
‘저런 육체로는 오래 못 가.’
그에 대한 방증으로 아킬레우스 분신은 무척 지쳐 보였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체력이 떨어진 상황이라면······.
“레, 렌이다!”
“막타 못 치게 막아!”
“절대 뺏겨선 안 돼!”
녀석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콰지지지지지직!
나는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을 유유히 피하며 아킬레우스의 분신에게 창을 휘둘렀다.
녀석이 날 발견하곤 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게 녀석의 패착이었다.
서걱!
녀석의 근력으로는 내 창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 높은 민첩으로 내 창을 피했어야지, 막으려고 하면 안 됐다.
‘체력이 부족해서 못 움직였겠지.’
띠링!
[@!#[email protected]
# ‘아킬레우스(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녀석을 죽이자 킬 콜이 나왔다.
그런데 피의 회복이 켜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분신을 생명체라고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근데 저 앞에 깨진 건 뭐지?’
플레이어라고 적혀 있던 부분인데.
“저 개자식! 우리가 다 잡아놨더니!”
“웨스테로스랑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하는구나, 이 개새끼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 녀석부터 죽여!”
막타를 쳐서 킬을 먹었더니, 주위에 있던 발리노르의 플레이어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현재 생존자 수 : 2,593 명]
[킬 수 현황]
[1위. ‘웨스테로스’ 2킬]
[2위. ‘무림’ 1킬]
[2위. ‘알프하임’ 1킬]
[2위. ‘지구’ 1킬]
다행히 웨스테로스의 킬 수는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해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이 경기에 사활을 걸고 있을 테니까.
이제 네임드의 분신은 6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여기서 놀아줄 시간이 없어.’
나는 곧장 창을 휘두르며 플레이어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여기서 웨스테로스가 승리를 챙기면 지구와 공동 1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1회차에는 10경기를 끝으로 성계 대항전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구와 웨스테로스, 둘이서 11경기를 치르겠지.’
결국 우승 성계는 가려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웨스테로스가 승리하는 것 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다음 녀석은······.’
꽈아아아아아아앙!
네임드를 찾고 있는데 빛줄기가 천장까지 솟구쳤다.
벽력이 터진 것이다.
‘내 분신은 패스.’
온갖 특전을 떡칠한 덕분에 아마 분신들 중에서 스텟도 가장 높을 것이다.
잡으라고 냅둬도 못 잡는다, 저건.
그때 저 멀리서 한 자루의 대검을 사방으로 휘두르는 분신이 보였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시구르드(분신)]
[성향 : 냉정]
[근력 : 85(+?)] [민첩 : 88(+?)] [체력 : 65]
[정신 : 54] [지력 : 42] [마력 : 53]
[각성 능력 : <용살검> <특급살기> <특급마나운용> <특급검방술> <고급박투술> <최상급궁술>]
녀석이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플레이어 네다섯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웨스테로스!’
마침 시구르드의 분신을 레이드하고 있던 녀석들은 웨스테로스 출신들.
저 분신만큼은 어떻게든 내가 뺏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느라 시구르드 분신의 체력 소모가 심해 보였으니까.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가 웨스테로스인들이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저건 뺏기 쉽지 않겠는데!’
하필 웨스테로스의 네임드까지 모조리 껴 있는 상황.
하지만 여기서 1킬을 더 내준다면 이번 경기는 웨스테로스가 가져갈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든 저 분신을 내가 죽여야 한다.
콰지지지지지직!
나는 200명 가까이 되는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렌!”
“막타 못 치게 막아야 돼!”
“우리가 녀석을 막을 테니 나머지는 분신을 잡는 데 집중해!”
그러자 50명 정도가 방향을 틀어 날 막아섰다.
‘악마의 눈.’
경계해야 할 녀석은······ 세 명.
소호보다 약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도 50명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선.
‘일단은 시선을 끌어야 해.’
꼭 플레이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시구르드의 분신이 받는 압력만이라도 줄여야 한다.
콰지지지지지직!
‘일단 돌파부터.’
나는 뇌전을 머금은 창을 힘껏 휘둘렀다.
채앵! 챙! 챙!
“노옴!”
하지만 녀석들도 내 계획을 눈치챘다는 듯, 날 죽이는 것보다 저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젠장. 이럴 땐 왜 벽력이 안 터지는 거야.’
이럴 때 벽력이 터지면 이런 저지선 쯤은 우습게 날려버릴 수 있는데.
평소에는 잘만 터졌으면서, 오늘따라 잠잠했다.
분신은 꽤 여러 번 터진 것 같은데.
“분신 녀석이 지쳐간다! 조금만 더!”
“렌을 막고 있을 때 빨리 죽여야 돼!”
창을 휘두르며 힐끗 보니,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던 시구르드 분신의 움직임이 많이 느려져 있었다.
압도적인 기세도 사라졌고, 이제는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급급해 보였다.
‘씨발.’
어떻게 하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른 네임드 분신을 죽이러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순간 뇌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판사판이야.’
나는 돌파하는 걸 멈추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도망간다!”
“모두 정지! 따라가지마! 일단 네임드 분신부터 먼저 처치한다!”
제발.
여기 근처에 있어라.
제발.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찾았다.’
내 분신은 근처에서 무림인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었다.
여포의 화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곧장 활을 꺼내 녀석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핑! 챙!
날아간 화살이 내 분신의 창에 허무하게 막혔지만, 녀석의 시선을 끄는 데엔 성공.
‘제발 좀 따라와라.’
핑! 핑! 핑! 핑! 핑!
내가 끈질기게 화살을 쏘자, 무시한 채 무림인들에게 창을 휘두르던 녀석이 결국 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분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빨리······!’
시구르드 분신이 죽기 전에 어서 이 괴물을 데려가야 한다.
내 분신의 근력과 민첩이면 웨스테로스가 펼친 저지선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뚫어낼 것이다.
챙! 채채챙! 챙! 챙!
다행히 웨스테로스 레이드 근처까지 다가가자, 여전히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다행이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웨스테로스인들에게 돌진했다.
그사이 내 분신도 어느새 내게 바짝 붙어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창의 간격 안에 들어갈 것 같았다.
평소라면 욕지거리를 내뱉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녀석이 다시 온다! 준비!”
“크하하하! 멍청한 자식. 아직도 여길 뚫을 수 있을······.”
‘침묵의 망토.’
녀석들에게 다다를 때쯤, 침묵의 망토를 쓴 나는 곧장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공격 판정이 되면서 은신이 바로 풀렸지만 상관없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잠깐의 순간, 내 분신이 나를 놓치는 바람에 웨스테로스의 저지선과 부딪히고 있었으니까.
‘됐어.’
“윽, 뭐야! 렌 분신인데?”
“으악!”
내 분신이 플레이어들 사이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렀다.
한번 창이 번쩍! 할 때마다 두세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번 경기에서 만큼은 내 분신이 여포나 마찬가지였다.
웨스테로스는 순식간에 진영이 붕괴되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됐어, 이 틈에!’
나도 곧장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 여기에 진짜가······!”
서걱!
뒤늦게 날 알아본 플레이어들이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진영이 붕괴된 이상 날 막아낼 수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근처에서 눈부실 정도의 빛이 생겨나더니, 엄청난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내 분신은 벌써 오늘만 해도 세 번, 아니 네 번의 벽력이 터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녀석들의 시선이 내 분신에게 향했고.
서걱!
그 틈에 나는 최대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시구르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챙! 챙! 채챙! 챙! 챙! 채앵!
웨스테로스의 플레이어들과 싸우다가 체력이 다 빠졌는지 대검을 놓치는 시구르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웨스테로스인들의 공격.
‘안 돼!’
나는 급한 마음에 시구르드에게 창을 던졌다.
뇌전을 머금은 창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날아갔다.
푹! 푹!
분신을 레이드하던 플레이어의 검과 내 창이 동시에 시구르드의 가슴에 박혔다.
‘제발!’
왜 죽였다는 판정이 안 뜨는 거지?
설마 놓쳤나?
띠링!
[@!#[email protected]
# ‘시구르드(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됐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1회차까지 통틀어 내가 여태껏 뺏어 먹어봤던 막타 중에 제일 짜릿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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